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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16화 (916/963)

916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4)

투우웅!

“큭!”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묵로가 튕기듯 뒤로 넘어갔다.

쿵!

부러진 의자를 밟고 자세를 유지한 묵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그때, 한옆에서 손톱을 다듬던 삼사제장(三司祭長) 야혁(野革)이 눈을 빛냈다.

“투공마영(透空魔影)이 강제로 끊어졌는데?”

야혁 특유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도 묵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지, 이 힘은?’

묵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투공마영을 뚫어 버렸다고?!’

기(氣)를 끊어 버린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닌 말로 성마에 들지 못한 혈마(血魔)급 고수라도 전력을 다한 일격이라면 기의 흐름을 끊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투공마영의 환상을 통해 기파를 전달, 충격까지 줄 수는 없다. 이런 건 묵로 자신도 불가능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투공마영의 비술 자체가 상단의 영력(靈力)을 바탕으로 한 진기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백번 이해해서 다른 사람이 펼쳤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성마에 오른 자신이 직접 구사한 투공마영을 통해 본체에 충격을 전달하는 것은 성천십삼좌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마(萬魔)의 정점에 오른 교주님이나 화신(火神)의 경지에 든 신화교주, 극사(克邪)에 진입한 사음교주라면 또 모를까?

‘말도 안 돼. 설마하니 그놈이 벌써 삼신공(三神公)에 근접한 실력자가 되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처음부터 무시무불대진의 허실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보시오, 묵로.”

“……위험한 놈이다.”

치이이익!

묵로가 주먹을 쥐었다. 주먹에서 누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무공을 익히고 있어. 마령(魔靈)까지 흔들 정도라니, 중원에 이런 놈이 있나?”

야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뭔 소리요?”

묵로가 눈을 빛냈다.

“자네는 혈마검(血魔劍)들을 이끌고 전투를 준비하게.”

“전투? 그거 좋지.”

씨익 웃던 야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갑자기 전투 준비라니? 무슨 일이 터진 것이오?”

“놈들이 공격을 시작했어. 전력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방비를 해야지.”

“공격을 시작했다고? 벌써?”

“그렇다네.”

“아니, 대체 왜? 생사결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오?”

묵로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놈들은 이쪽의 의도까지……!”

말을 하던 묵로의 표정이 멍해졌다.

생각해 보니 연호정 그놈이 이쪽에서 천효락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잡을 계획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설마 그 잠깐의 대화로?’

말도 안 된다.

묵로는 조금 전 그 대화의 어느 부분에서 천효락을 사로잡을 거라는 의도가 드러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통찰력이라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상황에서, 말 몇 마디로 상대의 정보를 탈탈 털어 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무서운 능력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신마림의 병력은 최대한 보전해야 한다! 자네가 혈마검들을 끌고 가서……!”

“어쨌든 다 작살내라, 이거 아니오?”

“최일선 방어를 맡아 주게. 놈의 기감이라면 분명 본진의 위치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야.”

“좋소. 그리하겠소. 찌뿌드드해서 따라왔는데, 역시 묵로와 함께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긴단 말이지.”

그때, 묵로가 지팡이를 들었다.

“아니, 잠깐만 기다리게.”

“왜 또 그러시오?”

묵로의 눈이 스산해졌다.

‘삼사제장의 무공은 방어보다 공격에 치중되어 있다.’

그가 야혁을 바라보았다.

야혁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은 것 같았다.

“자네, 성천십삼좌 알지?”

“물론이오.”

“그중 삼군(三君)을 이길 자신이 있나?”

야혁이 피식 웃었다.

“내가 제일 붙어 보고 싶은 놈들이 삼군이오. 당연히 이기겠지만 적당한 흥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될 테니까.”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세간에 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딱 삼군 정도가 가지고 놀기 적합하다. 야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묵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로(東路)를 이용해 우회하여 남은 놈들을 공격하게. 대신 천효락 그놈은 절대 죽여선 안 되네. 무조건 생포해야 해.”

“걱정하지 마시구려. 한데 천효락이 누구인지는 어떻게 아오? 난 본 적도 없는 애송인데.”

“제대로 운용은 못 할지라도 마공을 익힌 놈이야.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걸세.”

“오, 그렇구만.”

우두둑! 우두두둑!

양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뼈 소리를 낸 야혁이 곧장 방을 나섰다.

“어쩔 수 없군.”

쿵.

지팡이로 바닥을 찍은 묵로가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내가 막아 줄 수밖에.”

연호정의 추측은 옳았다.

실제로 광혈에서 많은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가 많을 필요가 없는 초고수 둘을 파견했을 뿐이다.

그 둘이 바로 일사제장과 삼사제장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제왕급이니, 마선이 봉인된 신마림을 휘어잡는 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전력이었다.

하물며 함께 파견한 혈마검 일백 병력은 하나하나가 광혈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예 고수들이었다. 말 그대로 일당백의 검사들이니, 놈들을 쓸어 버리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삼백의 철기 부대인데, 군기는 인상적이었으나 개개인의 무력은 혈마검보다 한참 아래로 보였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지.’

묵로는 숙소를 벗어나 목계담에게 향했다.

신마림의 대전에서 창밖을 보고 있던 목계담은 느닷없는 묵로의 출현에 내심 놀랐다. 묵로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놈들 중 일부가 쳐들어오고 있네.”

목계담의 눈이 흔들렸다.

“일부라면 둘 이상이란 말이오?”

“보고 들은 게 사실이라면 넷일세.”

“성마에 든 고수가 넷이나 있다고?!”

무시무불대진의 신묘함을 알기에 나올 수 있는 대사였다.

묵로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연호정 그놈이 무시무불대진이 반쪽짜리라는 것을 알아챘네.”

“……어떻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설명할 시간이 있다 한들, 이처럼 다급한 순간에 아군의 신뢰를 잃게 만드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놈의 안목과 무공은 대단히 뛰어나네.”

목계담의 눈이 음침해졌다.

“당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가?”

“말 그대로요.”

묵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네는 몰라도 내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네.”

“그럼 잘 막아 주시오. 나는 제물들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소.”

“준비는 아직인가?”

“그 준비가 다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확인하러 간다는 것이오.”

묵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껏 그것도 확인 안 하고 뭐 한 건가!”

우우웅!

목계담의 눈에서 살의 가득한 마기가 일렁였다.

“나한테 소리칠 시간 있으면 가서 놈들이나 막으시오.”

건방진 놈.

마음 같아선 한바탕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묵로는 분을 삭였다. 아직은 이놈을 어떻게 할 때가 아니었다.

“제물이 아닌 신마림도들을 추려서 방어선으로 보내게.”

“알겠소. 하지만 얼마 안 될 거요. 삼백 정도일까.”

“그 정도면 충분해. 아니 근데…… 나머지는 다 제물로 묶어 두었나?”

“그렇소.”

“…….”

“왜? 문제라도 되오?”

묵로는 떨떠름함을 느꼈다.

제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주님께는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인이라 해도 결국 사람인데,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이들을 싹 인간 제물로 바칠 생각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준비시키게. 혹시 모르니 제물들은 안전한 곳에 따로 빼 두고.”

“알겠소.”

“마지막으로, 막내 제자는 꼭 곁에 두도록 하시게나.”

목계담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지간히 탐을 내는군. 하긴, 오죽하면 더 이상 제자 안 받겠다던 그 늙은이도 약속을 깨고 받아 버렸으니.”

“움직이게.”

“반드시 막으시오.”

그 말을 끝으로 목계담이 대전을 나섰다.

목계담이 나간 문을 바라보던 묵로의 얼굴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네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그 자신이 어떻게 이용당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자, 그럼.”

묵로가 심호흡을 했다.

우둑! 우두두둑!

뼈마디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묵로의 굽었던 허리가 서서히 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그라든 어깨도 쫙 펴졌고, 쭈글쭈글하던 손가락도 조금씩 탄력 있게 변했다.

한순간 묵로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축골공(縮骨功)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 작았던 몸이 펴지자 육 척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가 되었다.

푸스스스스!

어두운 마기를 뿜어내며, 묵로가 움직였다.

생각보다 일렀지만 슬슬 교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 * *

치리리리링! 퍼어엉! 퍼퍼퍼펑!

광풍구룡살의 압도적인 일격에 직격당한 환영벽(幻影壁)에 금이 가더니, 허공 여기저기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투명한 초자가 깨지며 우수수 떨어지는 광경이 모두의 눈에 비쳐 들었다. 그래 봤자 본래 보이던 시야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무시무불대진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앙!

연호정의 뒤를 따르는 당관과 묵비, 옥청의 신법은 무척이나 빨랐다.

다급한 순간이기도 했지만, 셋 모두 신법에 일가견이 있는 고수들이라 연호정을 따라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중 옥청의 속도가 가장 처졌으나, 그는 무당 최고의 신법인 제운종을 배운 도사였다. 게다가 산에 다가갈수록 진해지는 마기는 그의 혼원기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내공이 떨어지기는커녕 불처럼 타오르며 강력한 힘을 부여하고 있다. 옥청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일렁였다.

당관이 외쳤다.

“싸가지! 갑자기 이렇게 돌진해도 되는 거냐?!”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은 묵비는 굳이 물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당관은 아니었다.

연호정이 외쳤다.

“놈들에게는 애초에 무시무불대진을 펼칠 재료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진법을 펼쳤다고 상대가 오해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

“이놈들은 신마림을 지킬 생각이 없습니다! 거점이고 지부고 세울 생각이 없는 겁니다!”

“설마 이놈들?!”

“어떤 종류의 일을 벌였든 간에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 우리가 도착했으니, 생사결이니 뭐니 하는 소리로 시간을 끌 속셈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미친! 야, 이 자식아! 그럼 더더욱 지금 치고 들어가면 안 될 것 아니냐?! 더 신중해야지!”

“지금은 이대로 가면 됩니다. 우리가 치고 들어갈 걸 알았으니 놈들도 분주해질 겁니다. 기습의 묘를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빌어먹을! 이거 괜찮은 거 맞지?!”

“저를 믿으십시오.”

자신을 믿으라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 할 것인가.

당관이 투덜거렸다.

“젠장, 누가 너더러 전략 전술의 귀재라고 한 건지 모르겠구나.”

“감당하기 힘들면 다시 빠지면 됩니다.”

“퍽이나 그럴 수 있겠다. 그나저나, 그럼 남은 이들은?”

“병력을 나누는 겁니다. 놈들의 일부는 샛길로 빠져서 천 공자를 노리겠지요.”

“이 자식아! 그럼 더더욱 병력을 쪼개면 안 되는 거잖냐!”

“아뇨, 그러니 더더욱 병력을 쪼개야지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쳐든 황룡이 하늘 위에서 마기의 흐름을 선명하게 읽어 주고 있었다.

이제 곧 신마림의 본진이 드러날 것이다.

“막원 형님도 든든하지만, 그곳에는 황 단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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