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15화 (915/963)

915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3)

“……?!”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스륵.

마차 천장에서 내려온 그의 곁으로 묵비, 패율, 부선이 차례대로 섰다.

그 뒤에는 연지평과 옥청이 섰고, 마차 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막원이 철봉을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끼이익.

마차가 살짝 뒤로 움직였다.

모두를 제치고 선두에 선 막원이 눈앞에 나타난 귀신을 보았다.

‘……크다.’

막원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어렸다.

느닷없이 나타난 귀신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굽은 허리,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는데 비범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원의 눈에는 그 노인이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

뜬금없이, 아무 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름 모를 귀신.

그 귀신에게서는 어떠한 기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막원만이 느낄 수 있는, 태산처럼 거대한 존재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놀랍군.”

노인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시원해지는 듯했다. 어찌나 맑고 깊은 목소리인지, 눈을 감고 듣고 싶을 정도였다.

“무림맹에서 파견한 고수들이라…… 하나같이 특색이 있어. 그중 성마에 진입한 고수가 둘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막강한 군기(軍氣)로 둘러싸인 철기 부대라?”

막원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대?”

노인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고얀 놈이로고. 비록 적아로 만났다고는 하나,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앞에서 너무 예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얘기나 하러 오셨소?”

“허허허!”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빈틈이 없다.’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는데도 한 점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빈틈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어딜 어떻게 공격해도 일격에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만한 존재감을 지닌 고수가 이렇게나 많은 빈틈을 보여 주고 있다면, 먼저 공격하는 측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빈틈이 없었다. 선공을 가할 수가 없었다.

‘하긴, 어차피 지금은 싸울 수도 없는 상황이니.’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어차피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 사이거늘 나이 따지며 존중을 바라서는 아니 되는 일이겠지.”

“…….”

“먼 길 오시느라 수고들 했네. 하남 무림맹에서 청해까지, 수천 리가 넘는 길인데 참으로 피곤했겠어.”

“본론이 뭐요?”

쿵!

땅을 찍은 철봉에서 강렬한 진동이 일었다.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강렬한 기도로군. 내 나름대로 중원의 고수들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자체에게서 병장기의 기운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

“…….”

“자네가 백병신군 막원인가?”

“날 아시는군.”

“모를 수가 없지. 중원 무림이 전설로 칭송한다는 성천의…….”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검은 벼락이 막원의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가 노인의 몸을 관통하고는 다시 거대한 호선을 그리며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철컹!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오른손에는 광룡부를, 왼손에는 조금 전 던졌던 흑룡부를 들고 있는 연호정이 보였다.

“적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리면 안 되지.”

연호정의 말에 깜짝 놀란 일행이 다시 노인을 바라보았다.

“흐음.”

노인이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흑룡부가 관통한 그의 가슴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상처는커녕 의복조차 찢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구먼.”

막원이 툴툴거렸다.

“처음 왔을 때부터 알았소.”

“사실인가?”

“물론이오. 조금 긴가민가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오.”

“대단하군. 성마에 든 고수라도 알아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엄청나게 민감한 기감을 지니고 있구먼, 자네.”

스윽.

연호정이 막원의 옆에 섰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두 사람을 보며,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백병신군 막원에 벽산호장 연호정이라…….”

벽산호장은 패왕이 되기 전의 별호였다.

연호정의 무력이 성천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의 별호가 바뀐 것은 모르고 있다는 것. 외부와 단절된 채 중요한 사실만을 정보로 받았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귀신 놀음은 그쯤이면 됐고, 뭐 하러 왔나? 때 되면 쳐들어가서 모가지를 반듯하게 잘라 줄 생각이었는데.”

노인이 피식 웃었다.

“보고받은 그대로구먼. 과격하기 그지없다더니 과연…….”

“묻잖아, 뭐 하러 왔느냐고.”

“…….”

“그냥 얼굴 한번 보러 온 거면 다시 가라. 어차피 곧 보게 될 거다.”

웃음 짓던 노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자네는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이군.”

“알 게 뭐야.”

“상대를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말투, 목소리, 표정, 눈빛…… 사소해 보이지만 절대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지. 과연 백전노장이라 할 만해.”

“칭찬이 과하구먼.”

“과하지 않네. 내 나름 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앞뒤 다 제치고 붙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자네의 어조는 독특한 데가 있군. 감탄했네.”

“너무 빨리 감탄해 주면 민망한데?”

“…….”

“그래서 본론이 뭐냐니까? 본체(本體)는 숨겨 두고 사술 비슷한 걸로 모습을 드러낸 마졸(魔卒) 놈아.”

“큭큭.”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트린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그쪽, 천효락이라는 녀석이 말은 다 했겠지? 광혈에서 왔다고 말이야.”

“그래.”

“나는 광혈의 제일(第一) 사제장(司祭長) 묵로(黙老)라고 하네.”

“묵로? 말이 그렇게 많은데 묵로야?”

“상대를 침묵시키는 게 내 장기지.”

“알 것 같군.”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연호정은 내심 무척 놀란 상태였다.

광혈교의 일사제장.

과거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비왕 공손백룡이 바로 광혈교의 오사제장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눈앞의 이 노인은 사제장 중 첫째로 손꼽히는 고수라는 것이다.

‘확실히.’

본체가 아니라서 진짜 무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술로 만든 허상의 존재감만으로도 제왕급의 고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묵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제안 하나 하겠네.”

“읊어 봐라, 늙은이.”

“혹 본교로 들어올 사람은 없나?”

“설마 그게 말로만 듣던 유언, 뭐 그런 건가?”

“…….”

“몸뚱이에다가 오줌 갈겨 주기 전에 헛소리는 지양했으면 좋겠다.”

옥청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었다가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농담 같은 말은 잔뜩 긴장한 일행의 몸을 유연하게 풀어 주고 있었다.

노인, 묵로가 고개를 저었다.

“말로는 못 당하겠군.”

“그러게. 내 무공이 주둥이의 절반만 따라갔어도 고금 제일 확정인데.”

“본교로 들어올 이가 없다고 하니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사실 예상은 했네만, 그래도 씁쓸하군.”

“말해, 본론.”

묵로가 일행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눈빛이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다. 무공의 경지를 떠나 한 명 한 명이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들이었다.

묵로는 또 한 번 씁쓸함을 느꼈다.

‘적을 부러워해선 안 되지만, 정말 부럽군. 중원에는 인재가 참 많아.’

한숨을 푹 내쉰 묵로가 눈을 빛냈다.

“자네들과 싸우는 게 무섭지는 않네.”

“희한한 상황에서 동질감을 느끼는군.”

“우리가 이기기야 하겠지. 다만 양측 다 피해가 몹시 클 것이네.”

“그건 인정 못 하겠다만, 어쨌든.”

“대표 고수 셋이서 승부를 가르는 게 어떤가?”

천하의 연호정도 상대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생사결 비무로 승부를 내자고?”

“그렇다네.”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네.”

“거절할 게 뻔하다고도 예상은 했지?”

“전혀.”

묵로가 고개를 저었다.

“말했듯 자네들이 쳐들어오면 꽤 큰 싸움이 될 걸세. 그러나 우리가 이기겠지. 지금 자네들의 병력으로는 우리를 이길 수 없으니.”

“계속해 봐.”

“그러나 우리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한데, 그걸 바라지는 않는다네. 우리 나름대로 할 일이 많거든. 그리고 솔직히…….”

“…….”

“자네 때문에 본교는 물론 신화와 사음에서도 큰 피해를 보지 않았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수를 잃었다네, 우리는.”

“알아.”

“더는 쓸데없는 전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게 상부의 생각이네. 그건 자네들도 마찬가지겠지.”

연호정은 말없이 묵로를 노려보았다.

막원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군. 아우도 알지?”

묵로가 끼어들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판단하면 지금 당장 쳐들어와도 괜찮네. 사실 우리도 그게 더 편해. 어차피 터질 전쟁이라면 빨리빨리 끝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

“그래도 무의미하게 피 흘리는 게 싫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라네. 내 말, 이해했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는 했다.”

“동의하겠나?”

“하나만 묻자.”

“그러시게.”

“우리가 뭘 원하는지는 알고 있나?”

“뻔하지. 천효락에게 모든 상황을 다 들었다면, 신마림을 본래대로 돌려놓는 게 자네들의 목적 아니겠는가?”

“뭐, 크게 보면 그렇지.”

“그 과정에서 원수라 할 수 있는 대공자를 족치고 광혈의 병력을 몰아내는 것이 자네들이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이겠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왜 이놈이 나왔지?’

연호정은 의아했다.

‘차라리 대공자인가 뭔가 하는 놈이 나오면 될 텐데. 단순히 이런 환영을 만들지 못해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연호정이 굳이 묵로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며 대화를 이어 가는 이유는 그에게서 뭔가를 더 알아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호했다. 분명 이놈들이 원하는 게 있는데,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더 찔러 보면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듯하여, 연호정은 공격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이기면 어쩔 텐가?”

“광혈은 물러나게 되겠지.”

“대공자와 약속을 한 거 아닌가?”

“약속?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 승부에 서로의 명예를 건다면, 우리는 그에 따라 움직일 것이네.”

더, 더 필요했다.

“대표 고수라…… 각 측에서 가장 강한 고수를 내세우는 건가? 아니면 지명인가?”

“각자가 보유한 최고수들을 내세우면 전쟁을 치르는 것과 다를 게 무언가? 생사결이라면 한쪽이 살아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데.”

“그런가?”

“지명을 하도록 하지. 그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

지명…… 세 판의 생사결…….

‘이놈들, 분명 원하는 게 있다.’

연호정의 머리가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의미한 병력 상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이놈들은 그런 걸 아까워할 놈들이 아니야. 변질된 신마림이라면 모를까 임무 하나에 목숨을 거는 광신도들이다.’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이놈들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가?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대공자도 나오나?”

“모르겠네.”

“왜? 네놈들이 붙잡아 둔 마선 혁련휘를 감시하느라 못 나오는 건가?”

순간 묵로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연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옥청, 당가주님, 묵비!”

치리링!

한순간 교룡쇄와 광룡부의 끝을 연결한 연호정이 버럭 외쳤다.

“세 사람은 나와 함께 들어갑니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천 공자를 보호하십시오!”

묵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무슨!”

“이놈들은 천 공자를 죽일 생각이 없어! 사로잡을 생각이다!”

번쩍!

황룡기 가득한 광룡부를 휘둘러 묵로의 환영을 베어 낸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파아아아악!

그의 뒤를 당관과 옥청, 묵비가 재빠르게 따랐다.

느닷없이 나타난 묵로, 느닷없이 침투 결정을 내리는 연호정.

마차에서 나온 천효락이 외쳤다.

“연 소부주! 무시무불대진은 어떻게……!”

“이거 다 사기였소! 저 늙은이의 환영처럼!”

우우우우우웅!!

황룡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연호정이 허공에 광풍구룡살을 구사했다.

콰르르르르릉!!

허공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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