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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13화 (913/963)

913화.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1)

끼이익.

철문이 열렸다.

훅 하고 끼쳐 드는 고약한 냄새에도 목계담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역시.’

목계담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보는 곳에는 불과 수일 전보다 더 늙고 말라 버린 노인 하나가 있었다.

예전과 달리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목계담은 알 수 있었다. 이 노인은 자신의 등장을 분명 인지하고 있다는 걸.

‘힘은 없지만, 아직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마음만 꺾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기도 아직 건재하다. 육신이 저 정도로 피폐해졌다면 생명을 지탱하는 마기도 줄어들어야 정상인데, 얼마 전에 찾아왔을 때와 아무 차이가 없었다.

한참 동안 노인을 내려다보던 목계담이 천천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카아아앙!

목계담의 코앞에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어느새 움직인 노인이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다만 벽과 연결된 발목의 쇠사슬 때문에 닿지 못한 것이었다.

“대단하십니다.”

목계담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재하실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때가 묻은 하얀 머리카락 사이.

무시무시한 한 쌍의 눈빛이 목계담을 향했다.

그 눈을 마주한 목계담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빛은 곧 마음의 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무림인에게 있어 안광(眼光)은 그 사람이 지닌 힘을 엿볼 수 있는 창이기도 했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붉게 일렁거리는 노인의 눈은 압도적인 위엄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힘을 잃고, 그럴듯한 무공 초식 하나 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눈빛만으로 상대에게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역시.”

노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탁하고 작아졌다.

“닿지 않는구나.”

“예, 닿지 않았습니다.”

목계담이 손가락을 들었다.

“저와는 다르게 말이지요.”

그가 손가락으로 노인의 손을 가볍게 때렸다.

쾅!

폭음과 함께 날아간 노인이 벽에 처박혔다.

스스스.

떨어진 돌가루가 노인의 머리카락을 회색으로 뒤덮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라면 부딪친 것만으로도 등뼈가 골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멀쩡했다. 또다시 힘이 없어진 것 같았지만, 고개를 들어 목계담을 노려보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목계담이 고개를 저었다.

“이 무슨 짓거리입니까. 이러다가 내가 살심을 품으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텐데요.”

“죽을 수 있다면 죽는 것도 좋지.”

“정 그렇게 죽고 싶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만 아닙니까?”

노인의 머리카락이 꿈틀거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마인에게 자살이 웬 말이더냐.”

“그래서 당신을 이곳에 잡아 둘 수 있었지요.”

“…….”

“죽고 싶은 겁니까?”

“네놈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느니 죽는 게 낫기야 하겠지.”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노인은 말없이 목계담을 노려보았다.

물끄러미 노인을 마주 보던 목계담이 담담하게 말했다.

“셋째가 무림맹 병력을 끌고 왔습니다.”

“……!”

“아무래도 이곳을 통째로 무너트릴 생각인 모양입니다. 성마의 고수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말입니다.”

“네놈에게 유린당할 바에야, 차라리 사라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림주로서 할 말은 아니로군요.”

“그 림주를 몰아내고 스스로 권좌를 차지한 자가, 아직도 나를 림주라고 부르는구나.”

“…….”

“패자의 비참한 꼬락서니를 구경할 생각으로 왔다면 잘 구경하다가 가라.”

“…….”

“그게 아니라 따로 할 말이 있다면 어서 뱉고 꺼지거라. 네놈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역겹다.”

목계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였다. 하지만 그 변화야말로 목계담의 마음에 금이 갔음을 증명했다.

“할 말만 하고 가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어수룩한 놈.”

“예. 어수룩하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마(魔)란 혼돈이요, 불규칙성 그 자체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魔)가 아닙니까?”

“조막만 한 머리로 세상을 알았다고 착각하는 얼치기라…… 정저지와가 따로 없구나. 예전부터 성급해하지 말라고 그리 가르쳤거늘 천성은 바꿀 수 없는 것인가.”

철컹!!

어느새 노인의 앞으로 다가간 목계담이 그의 목을 잡아 벽에 밀쳤다.

목계담이 차갑게 말했다.

“넷째의 신상이 궁금하지 않소?”

“…….”

“그래, 궁금하지 않겠지. 당신을 배신하고 내 곁에서 반란을 도운 핏줄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

“죽었소이다.”

“……!”

“그것도 꽤 비참하게 죽었소. 온몸이 쪼그라들었는데, 구십 먹은 노파도 그보다는 어여쁘게 보일 거요.”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목계담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많이도 먹였던 모양이오. 온몸의 기운을 다 빨아들였는데, 그 양이 엄청나더군.”

“너 설마?”

“채음보양(採陰補陽)이라…… 당신은 그러한 마공을 천하디천한, 비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잡술이라고 매도했지.”

목계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소이다. 맹수가 사냥감을 잡아먹고 제 살을 불리는 것처럼, 채음보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법의 하나요.”

“이……!”

“넷째의 몸을 탐하는 놈들이 많았소이다. 전리품이란 명목으로 던져 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 꼴을 보고는 누구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소. 하긴, 손만 쥐어도 바스러질 만큼 오그라들었으니.”

노인의 위엄 가득한 안광에 증오와 슬픔이 깃들었다.

“네놈이 정녕……!”

“인외마도(人外魔道)를 걷는다고 말할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게 칭찬이라고 말해 주고 싶소. 마도를 걷는 자가 진정 마인이 되었으니 이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목계담이 코웃음을 치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바닥에 떨어진 노인이 목계담을 올려다보았다.

“이보시오, 사부.”

“…….”

“파천결의 구결을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을 참이오?”

“미친놈.”

“무림맹에서 고수 몇 명 데리고 왔다 한들, 이곳에 모인 병력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소이까?”

“닥치거라. 네놈은 절대 파천결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셋째를 잡으면 녀석을 죽일 것 같소? 나는 절대 셋째를 죽이지 않을 거요.”

목계담의 눈에 피처럼 붉은 기운이 아른거렸다. 위엄 가득했던 노인의 안광과는 다른, 지독한 욕망으로 가득한 눈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그가 말하는 마(魔)와 닮은 눈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오. 천상의 쾌락과 지옥의 고통을 안겨 줄 것이오. 녀석의 정신을 완전히 굴복시켜 내 발이나 핥으면서 사는 개로 만들 것이외다.”

“이, 이놈!”

“청해에 사는 천씨 방계들은 완전히 망가지게 되는 것이오. 하긴, 셋째의 몸 상태를 보면 이미 다 망가진 거나 다름이 없긴 하오만.”

“절대, 절대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용서를 구한 적 없소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소.”

“이놈…….”

“파천결을 넘기시오.”

“닥쳐라!”

“사부가 파천결을 넘긴다면 셋째가 내 개로 사는 일은 없을 것이오. 살려 둘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깔끔한 죽음을 약속하겠소.”

“이!”

“하루를 주겠소. 나도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

목계담이 몸을 돌렸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 것이오. 그때도 파천결을 건네지 않는다면 셋째는 넷째보다도 비참하게 살아가겠지.”

“…….”

“어차피 파천결은 내 손에 들어올 터인즉, 사부는 생각을 잘해 보시오.”

쾅!

철문이 닫혔다.

천장 바로 아래, 작은 철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오늘따라 꽤 밝게 보였다.

“…….”

철문을 노려보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 변화는 느릿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역동적이었다.

노인이 눈을 감았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로군.’

그는 넷째, 아니 자신의 딸이 변절했다는 걸 믿지 않았다.

당연히 목계담에게 채음보양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다. 아니, 확신했다.

‘채음보양이라…… 말 같지도 않은 수작으로 날 흔들려 하다니, 네놈도 아직 멀었어.’

이전에 놈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는 번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번민은 놈이 다시 오기 일각 전에 끝이 났다. 그는 오랜 고민의 답을 구했고, 마침내 선택을 내렸다.

그 순간 놈이 이곳의 문을 열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만, 그야말로 운명 같은 순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인이 손을 들었다.

손목에 묶인 굵은 쇳덩이 때문에 팔 하나 드는 것도 힘이 들었다. 놈의 목을 움켜쥐기 위해 달려드는 그 순간에 이미 모든 힘을 소진했다.

그렇게 도발하고, 도발당하는 연기를 한 덕을 보았다.

우웅. 우웅.

노인의 몸에서 은은한 마기가 일었다.

푸르스름한 그 마기는 노인의 기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음험하고 차가웠다.

그 기운은 노인보다 목계담의 기도와 어울리는 것이었다.

‘네놈은 채음보양을 모른다. 아니, 흡정(吸精)이라는 것을 몰라.’

흡정.

정(精)이란 곧 정수를 뜻한다.

무림인의 정수란 내공이고, 사람의 정수란 곧 생명력 그 자체다.

노인은 젊은 시절 온갖 마공에 손을 대 보았다. 마(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마로써 극에 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흡정마공(吸精魔功)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실제로 펼쳐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행위 자체는 쉬웠지만,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신체, 무공에 대한 감당이 아닌 인간성을 상실할 것 같았기에 그는 흡정마공을 펼치는 데 망설였다.

단 한 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단 한 번 흡정마공을 사용했던 그는, 마(魔)의 극치를 이루는 것을 포기하고 무(武)의 극치로 눈을 돌렸다.

그런 그가 지금, 스스로 봉인해 두었던 흡정마공을 사용했다. 상대가 깨닫지 못한 순간에, 깨닫지도 못할 만큼의 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양이었지만, 그 상대가 목계담이었기에 의미가 있는 한 수였다.

우우우우우웅!!

성마에 이른 목계담의 마기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노인의 마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녹이 잔뜩 슬어 단단하게 굳은 노인의 마기가, 그 멈춰 버린 수레바퀴가 또 다른 성마의 힘에 자극을 받아 서서히 회전을 시작했다.

쿠르르릉!!

수레바퀴에 묶인 쇠사슬이 무시무시한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툭툭 끊어져 버렸다.

현실의 쇠사슬도 마찬가지였다.

카앙!

팔다리를 구속하던 쇠사슬이 단번에 끊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사지의 자유를 느끼는 그였다. 철저하게 고립된 독방이기에 미리 끊어 놓는 것도 가능했다.

잠시 제 손을 보던 노인이 다시 눈을 감았다.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한번 싹을 틔우면 돌이킬 수 없기에 기분은 홀가분하면서도 착잡했다.

‘내 잘못으로 악화된 상황이라면, 내 목숨으로써 끊어 낼 수밖에.’

노인의 얼굴에 자조 섞인 웃음이 깃들었다.

‘후계도, 천씨 일가의 저주도, 광혈과의 관계도, 흡정마공도…… 무엇 하나 내가 원했던 것을 이루지 못한 삶이었구나.’

쿠르르릉!!

마기의 회전이 빨라졌다.

거의 모든 힘을 빼앗겼지만 그릇은 그대로다. 그 빈 그릇에 노인의 막강한 생명력이 차올랐다.

죽을 날을 기다리던 노인이 신마림주 혁련휘로.

성천에 이름을 올린 마선(魔仙)이 천씨 성을 지닌 마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루라…… 네놈은 내게 하루라는 시간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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