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09화 (909/963)

909화. 마(魔)의 숨결 (4)

서로를 향해 힘차게 달리는 그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오호.’

적들과의 거리가 성큼 좁혀지자 그들 뒤에 버티고 있던 거대한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저 정도 너비와 높이를 자랑한다면 진즉에 보였어야 했는데, 이제야 시야에 산이 나타난 것이다.

산 정상쯤에는 허연 눈이 쌓여 있었다. 청해 땅 자체가 다른 지역보다 고도가 높은 축에 속하니, 저토록 높은 산이라면 만년설(萬年雪)을 품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말발굽 소리,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연호정은 입을 열었다.

“저 산이오?”

마차 안에서 천효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이 보이십니까?”

“꼭대기에 눈이 덮여 있군.”

“주봉(主峯)은 아닙니다. 그래도 거의 다 왔군요.”

“산 이름은?”

“저희는 아니설산(阿尼雪山)이라고 부릅니다.”

“아니설산…… 그나저나 저것도 술법이오? 저 정도 높이라면 진즉 보였어야 했는데.”

“저도 이 길로 와 본 적은 없어서…… 생각해 보니 소부주 말씀대로 한참 전부터 보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차의 창으로 고개를 내민 천효락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순간 천효락의 눈에 마기가 스쳤다. 옆에서 말을 몰던 옥청이 움찔했다.

“무시무불대진(無視無不大陣)이군요.”

“무시무불대진?”

“신마림에서 보유한 광역진법입니다. 사방 수십 리의 시야를 봉쇄하는 초일류 환진(幻陣)이지요.”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가에도 광역진이 있긴 하지만…… 수십 리를 뒤덮는다고? 그런 진법도 있나?”

그때, 부선이 말했다.

“있습니다.”

모두가 부선을 보았다.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부선이 말을 이었다.

“본 부에도 저것 못지않은 진법이 있습니다. 아직 제대로 깔아 본 적은 없습니다만.”

연호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게 있었어?”

“네. 지상으로 올라올 때 쓸 거라고 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그거, 이 사람들이 들어도 되는 거야?”

패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놈 자식이? 야, 아무리 묵룡부로 들어갔다고 해도 그게 할 말이냐? 우리가 남이야?”

“남이죠.”

“……남은 남이지. 그래도 인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부선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니까요.”

“그렇구만.”

천효락이 침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이하군요.”

“뭐가 말이오?”

“신마림 역시 평소에 무시무불대진을 깔아 두진 않습니다.”

“……?!”

“무시무불대진은 환진이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괜한 의심을 끌 수 있는 진법이기도 합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이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어지간한 정심으로는 환진을 벗어날 수 없지요.”

“흐음.”

“하지만 모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당장 연 소부주나 여기 계신 백병신군이시라면 큰 무리 없이 저 대진을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즉, 무극을 넘어선 고수가 진법을 발견하면 결국 신마림의 본거지가 들통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렇습니다. 본래 이 산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나치게 높고 날씨도 좋지 않으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신마림의 건물들이 있는 주위에만 소형 진법을 깔아 두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긴, 어떤 무극수가 청해까지 와서 저 산을 오르겠나 싶기도 했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오?”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무시무불대진은 재료가 준비된 상황에서도 제진(製陣)에만 반년은 족히 걸리는 초대형 진법입니다. 사실 재료를 구하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요.”

“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어느새 적아 간의 거리가 십 리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말하자면 대공자란 놈은 미리 저 진법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재료들이…….”

“그 재료들은 광혈교에서 가져왔겠지.”

“광혈교주가 원하는 것은 신마림 본진의 파멸과 병력의 흡수입니다. 굳이 거창하게 저만한 진법을 깔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지부로라도 쓸 생각인 모양이오.”

“지부……?!”

“삼교가 중원을 넘보기 시작한 건 그들의 힘이 충분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오. 말하자면 포화 상태라는 것이지.”

“……!!”

“신마림을 본단으로 흡수하려는 게 아니라, 아예 광혈의 힘을 확장하려는 것 아니오?”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도끼 손잡이로 마차 천장을 툭툭 때렸다.

“이만 들어가시오. 목 아프겠소. 곧 싸움이 벌어질 거요.”

천효락의 얼굴이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끊기지 않았다.

“소부주님. 저들의 기세가 느껴지십니까?”

“그렇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아직 적의(敵意)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데 상당히 삼엄하군. 딱히 패잔병처럼 보이지도 않고.”

“음.”

“돌격하는 기세가 상당하오. 게다가 우리가 이곳에서 접근하는 걸 안다면 기다려도 괜찮을 텐데, 굳이 무장을 한 채로 달려오는군.”

천효락이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이 덤덤하게 말했다.

“저들의 대응을 보고 결정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적이라고 생각되면, 그때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겠소.”

“예, 알아들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마침내 두 집단의 거리가 이백여 장 정도로 좁혀졌다.

그때, 신마림에서 나온 병력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패율이 외쳤다.

“어떻게 할 거냐?”

가만히 저들의 기세를 읽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속도를 줄입시다.”

두두두두두.

경쾌하기 그지없었던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묵직해졌다.

쿠르르릉!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구름이 바람을 맞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속도를 줄이자 서로 간의 거리는 백여 장으로 줄어들었다.

후우우우웅!

청해의 건조한 바람이 두 집단의 첨예한 기세를 다독였다.

연호정이 적의 병력을 살펴보았다.

‘얼추 오백…… 많이도 보냈다.’

신마림 자체가 광혈교의 눈을 피해 만든 단체이며, 그러한 기조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

한데도 저만한 병력을 보냈다는 건 전체 병력 규모가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광혈인가? 아니야. 기세가 달라.’

같은 마기라도 차이점이 분명하다. 연호정은 저들이 신마림 소속의 부대라고 확신했다.

잠시 후.

“삼공자님.”

선두에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온 중년 사내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외부 병력을 끌고 오다니요. 신성한 신마림의 앞마당에 불온한 이들을 들인 사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사내를 보던 연호정이 주먹으로 마차 천장을 가볍게 두들겼다.

딸칵.

마차 문이 열리며 천효락과 화향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 사내를 본 천효락이 한숨을 쉬었다.

“위 단주.”

중년 사내, 신마림 호마단(護魔團)의 단주 위소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외부의 병력을 끌고 온 것, 이는 신마림에 대한 반역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해명하시겠습니까?”

“림주님은 괜찮으신가?”

“해명하시겠느냐 물었습니다.”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하게. 림주님은 괜찮으신가?”

위소강이 코웃음을 쳤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분을 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왜? 막상 우리를 눈앞에 두니 겁이라도 나신 겁니까?”

“내가 말을 잘못했군.”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내 사부님은 멀쩡하신가?”

“…….”

“외부 병력을 끌고 와 본 림을 장악하고 기괴한 술수로 제 사부를 붙잡아 둔 배은망덕한 사람 말고, 자네들이 예전부터 믿고 따랐던 림주께서는 멀쩡하시냔 말이네.”

위소강의 미소가 진해졌다.

“이보시오, 삼공자.”

달라진 말투, 목소리는 음침해졌다.

“정말 감이 많이 떨어지셨소이다.”

“…….”

“신마림은 강자존이오. 강한 자가 기존의 강자를 잡아먹고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곳, 약자는 철저하게 도태되어 스러지는 곳. 신마림은 그런 세상이었잖소?”

“그래서 대사형에게 붙었는가.”

“붙었다? 꽤 불쾌한 말이외다. 림주가 바뀌었거늘 전대 림주님을 잊지 못해 항명이라도 하란 말이오?”

“…….”

“하늘은 바뀌었고,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사람을 위해 살아갈 뿐이오.”

“언제부터였나.”

“무슨 말이오?”

천효락이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한 표정, 담담한 목소리에 소름 끼치는 한기가 깃들었다.

“본 림이 언제부터 협잡과 배신을 강자의 능력이라고 인정했느냔 말일세.”

위소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효락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가 호마단을 이끄는 걸 경계했네. 이유는 분명했지. 자네에게는 우직함이 없어. 다른 조직은 몰라도 호마단은 그래선 안 되지.”

“말씀은 끝났소?”

“그 옛날 대사형의 추천으로 호마단의 부단주가 되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거늘.”

“선택하시오. 얌전히 물러갈지, 아니면 피투성이가 되어서 끌려갈지.”

“지금 네놈의 행태를 보니 이제 신마림도 끝이 났다는 걸 알겠다.”

“물론 데리고 온 병력은 다 여기서 죽을 거요.”

“쓰레기 같은 놈.”

위소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천효락이 말했다.

“화향.”

“네, 주인님.”

“싸움이 벌어지면 다른 놈들 족칠 필요 없다. 위소강을 살려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화향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목숨을 걸고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위소강이 코웃음을 쳤다.

“기어이 벌주를 마시겠다, 이거군. 좋소. 원하는 게 그거라면…….”

“소부주님.”

순간 연호정의 손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퍼버버벅!

빛살처럼 날아간 백룡부가 호마단 앞줄 다섯 명의 목을 날려 버린 후 되돌아왔다.

“……?!”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위소강은 물론 호마단원들도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혓바닥은 무극수 뺨을 후려치는군.”

훅!

패율과 부선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히히히힝!!

앞다리를 들며 우렁찬 용울음을 토해 낸 두 마리 명마가 쏜살같이 질주했다.

그제야 위소강이 외쳤다.

“삼공자를 제외하고 모두 죽여라!”

피피피피피피핑!

호마단 후방 부대에서 쏘아진 화살 이백여 개가 작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순간 옥청과 연지평이 천효락의 앞에 서서 검을 뽑았다. 어느새 마차 천장에서 내려온 연호정 옆에는 막원이 섰다.

황석태가 창을 들었다. 그러자 철기단이 좌우로 진을 펼쳤다.

그때였다.

‘……?’

연호정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확인한 황석태가 미소를 지으며 창을 하단으로 내렸다.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는 것이로군.’

파아아악!

마차 위로 올라온 당관과 묵비.

묵비가 시위에 세 발의 철전을 걸었다.

당관이 말했다.

“철전 두 개는 빼.”

“네?”

“적이 강하든 약하든, 저런 멍청이들을 상대로 과하게 힘쓰지 말란 말이다.”

“하지만…… 설마 독을 쓰시게요?”

“그럴 리가. 무극에 도달치 못한 나의 독공은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려. 저런 잡것들을 상대로 써먹기는 아깝지.”

당관의 손에 비수 한 자루가 들렸다.

그가 묵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당가의 사출식(射出式)을 알려 주지. 못 알아들으면 앞으로도 가르치지 않겠다. 재능 없는 놈에게 가문의 비전을 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당관을 올려다보던 묵비가 철전 두 개를 화살통에 넣었다.

“다 뺏어 먹어 드리지요.”

“먼저 한 방 갈겨 봐라.”

피이이이이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철전 하나가 부선 앞으로 다가온 마인 둘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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