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8화. 마(魔)의 숨결 (3)
청해 신마림까지 가는 길은 꽤 험했다.
감숙에서 벗어나 청해로 진입한 일행은 청해의 날씨가 상당히 건조하고 춥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다들 내공이 풍부했고, 야숙에 익숙한지라 두툼한 옷들을 준비해서 추위를 탈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청해의 공기는 감숙과 또 달랐다. 감숙보다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평야, 그리고 저 멀리 줄지어 선 산들의 모습이 압권이었다.
이곳을 보면 황량하고, 저곳을 보면 웅장했다. 조화로운 듯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땅. 그래서 더 신비하고 무서우며 자주 보고 싶은 마력을 주는 땅이었다.
“이쪽입니다.”
천효락 역시 마차 천장에 올라섰다.
드넓은 고향 땅의 냄새를 맡는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격동이 가득했다. 이곳을 넘어 중원으로 오는 길이 얼마나 고되었던가. 감상에 젖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당관의 상세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입은 내상을 생각하면 한 달은 정양해야 옳았지만, 초기에 연호정이 내상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름이 지난 지금은 상당히 회복된 상태였다.
“형님.”
“음?”
연지평이 육포를 내밀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육포를 받았다.
“고맙구나.”
“신기하네요.”
“무엇이?”
“형님과 청해까지 오게 될 거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서로가 워낙 바쁘게 살아서 그렇다. 특히 연호정은 강호 출도 이후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오지 않았는가.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훗날 중원 상황이 좀 나아지면 또 한 번 오도록 하자. 아버지도 모시고.”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연지평의 얼굴은 상당히 차분해 보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양을 잘 쌓은 것 같았다.
연호정은 굳이 연지평에게 무공이나 마음가짐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믿음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쟁취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일 처리나 적을 대하는 방식 등을 보고 배우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연지평의 어깨를 두들기던 연호정이 옥청을 보며 말했다.
“너, 이제 곧 터지겠다.”
“예?”
“혼원기가 온몸에 꽉 찼는데? 맹에서 출발했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천양지차다.”
옥청이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조마조마합니다.”
연지평을 대하는 것과 달리, 연호정은 옥청에겐 조언을 서슴지 않았다.
“천 공자와 그 호위 때문에 혼원기가 자극을 받아 성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사실 네가 무당의 차기 검선(劍仙)이 되려면 멸사군에 입대해선 안 되었다.”
옥청이 담담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나?”
“예. 어렴풋이요.”
“탁무자 노선배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너의 선골(仙骨)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하시더군. 어쩌면 무당의 조사께서 현신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셨다고 들었다.”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초반에 날 많이 욕하셨다. 물론 장난이지만.”
옥청이 표정이 씁쓸해졌다.
“당연하지만, 제가 보는 세상과 사부님이 보는 세상은 다릅니다.”
“그럴 수밖에.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사부님께서는 제가 무당산의 정기 안에 몸을 뉘어 진정한 검선이 되기를 바라셨지요. 어쩌면…… 제가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빠르게 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흑암제 시절 옥청의 무력은 대단했으니까.
안타깝게도 삼교에서 보낸 고수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젊은 연배에 무극을 뚫은 천재가 옥청이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제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냐.”
“산에 틀어박혀 얻은 도(道)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나 자신의 완성을 이룰 수 있겠지.”
“예, 고작 그거 하나지요.”
고작 그거 하나.
옥청이 보는 개인의 성취는 그것뿐이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나?”
“멸사군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겁니다.”
“그랬군.”
“도를 이룰 재목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게 힘이 있다면 그저 성심을 다해 천하를 위해 쓸 뿐입니다. 도에서 멀어진다 한들, 그것이 제 눈에는 더 올바르게 보입니다.”
가만히 옥청을 보던 연호정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도사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천축의 석가께서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와 명예를 벗어던지고 세상에 나와 고행을 하셨더랬지.”
“…….”
“고생한다고 다 얻을 깨달음이 아니다. 고생을 해야만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지. 그래도 석가께서는 세상에 나와 고해(苦海) 가득한 삶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셨다. 그 자체가 괴로움일 텐데도.”
“…….”
“인생의 순간순간은 다 나름의 의미가 있어. 산중에 틀어박힌 도가 세상을 겪고 발아한 도보다 천박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맞습니다.”
“결국은, 세상을 보는 방식의 차이라는 것이지. 그 차이 속에서도 천하(天下)는 꿈틀대고 있는 법이다.”
연호정이 옥청의 등을 두들겼다.
“혼원기가 아우성을 치고 있구나. 네가 보고 겪은 것들이 곧 너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다. 끊임없이 정진토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지만, 일행 모두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대화를 진지하게 곱씹었고, 누군가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하지만 적어도 대화가 남긴 흔적은 그들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신마림으로 가는 길은 고요하기만 했다.
청해성의 인구 밀도는 상당히 낮았다. 그래서일까?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
청해에 들어온 지 칠 일째 되던 날.
막원은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동생.”
“예.”
“나만 느끼는 거 아니겠지?”
연호정이 눈을 떴다.
“구역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
묵비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청해에 진입했을 때부터 좀 묘했다. 마주친 사람이 얼마 안 되긴 하지만, 대부분 우리를 보는 눈에 신기함이나 경계심이 거의 없었어.”
“그런 게 느껴져요?”
“조금은.”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부터 유독 매가 많이 보여.”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신마림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정확히는 신마림이 아니라 대공자 측이겠지요.”
연호정이 천효락을 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소?”
천효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한데…….”
“……?”
“이상하군요. 본 림의 정보력이 무척 뛰어난 편이기는 합니다만, 전서응을 저리 많이 쓰지는 못하는데.”
천효락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이제야 알아챘는데, 속도가 본 림에서 키운 전서응들보다 더 빠른 것 같습니다. 날아가는 거리를 보면 지구력도 더 뛰어난 듯하군요.”
“광혈교로군.”
눈을 감은 채 말을 타던 당관이 말했다.
“광혈교의 전서응일 것이다. 나도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지.”
일행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연호정이 말했다.
“우리를 주시하는 눈이 더 예리해졌습니다. 아마 신마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천효락이 말했다.
“진짜 신마의 영역은 하루를 더 가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대사형이 광마의 힘을 끌어와 주둔하고 있다면…… 어쩌면 이미 싸움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일행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호정이 당관을 돌아보았다.
당관이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멀쩡하다.”
완전한 몸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싸우는 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연호정이 패율과 부선 옆으로 말을 몰았다.
“선배님.”
“말해라.”
“부선과 함께 선두에 서십시오. 만약 적을 발견하면, 그땐 둘이서 선봉장이 되어야 합니다.”
“둘이서?”
연호정이 당관과 묵비를 돌아보았다.
“후방에서 지원 사격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묵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시위를 점검했고, 당관은 콧방귀를 뀌었다.
“굳이 선봉장을 둘 필요가 있겠느냐? 오기도 전에 다 머리통을 날려 버릴 터인데.”
패율이 씨익 웃었다.
“좋다.”
연호정이 부선을 돌아보자, 그녀가 곧장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싸운다, 알고 있습니다.”
“좋아. 역시 한번 말한 건 안 잊어 먹는군.”
그때, 부선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뒤에서 잘 봐주세요.”
“음? 뭘?”
“사형의 무공을 보고 제 나름대로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생겼어요. 싸움이 벌어지면 잘 봐주시라고요.”
패율이 휘파람을 불었다.
“실전에서 시험을 해 본다고? 역시 대단하구만. 강단이 있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눈먼 칼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저의 한계가 거기까지인 거겠지요.”
“좋아. 제대로 봐주마.”
막원이 뒤로 물러나 마차 우측에 섰다. 옥청이 있는 자리였다.
연호정은 연지평과 함께 마차의 좌측을 맡았고, 마차에서 오 장 거리를 벌린 당관과 묵비가 좌우에서 말을 몰았다.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과 십여 장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철기단이 있었다.
황석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대화를 다 들었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이제 나를 보내 줘.”
마차 안에서 대금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신 식량이 부족해. 물은 넉넉히 채워 줄 테니, 식량은 알아서 해결해라.”
“조, 좋다.”
대금불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호정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시원하게 보내 준다고 한 까닭이었다.
연호정이 천효락과 화향에게 말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오. 내가 천장에 앉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연지평이 연호정의 말고삐를 쥐었다.
연호정이 천장으로 올라가자, 문이 열리고 대금불이 나와 말에 올라탔다. 아직 본래 내공의 일 할도 사용하기 힘든 상태지만, 평생을 수련한 신체 능력이 어디 가진 않았다.
천효락과 화향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연호정이 말했다.
“가라.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대금불은 대답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곤 시원하게 서쪽으로 달렸다.
묵비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쏠까요?”
당관이 뜨악한 눈으로 묵비를 보았다.
“이 사람아, 놔줬는데 뭘 또 쏴?”
“연 공자가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놔주는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뭔가 흑심이 있는 것 같은데.”
“본가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해. 이 사람이 생각보다 막 나가는 구석이 있구먼.”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그냥 놓아줘. 어차피 대세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상태다.”
“그래도요.”
“혹시 모르지. 나름의 분열을 일으켜 줄지도.”
“네?”
그때였다.
“왔군.”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적어도 이십 리는 훌쩍 넘는 듯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갑자기 나타났다고?’
산을 제외하곤 탁 트인 평야였다. 나타나려면 더 빨리 나타났어야 했다.
‘뭔가가 있군, 역시.’
막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잘은 모르겠군. 거리가 너무 떨어졌어. 그래도 하나같이 말을 탔다.”
“마인이 맞습니다.”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똬리를 튼 황룡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마기의 냄새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청해의 공기 속에, 강렬한 악의를 지닌 쾌쾌한 향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할 셈인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답무용이지요.”
“그래도 얘기는 들어 봐야…….”
“얘기는 다 때려눕히고 나서 들어 봅시다. 패율 선배.”
패율이 힘차게 고삐를 휘둘렀다.
“이랴!”
히히히힝!
선두에 선 패율과 부선이 속도를 올렸다. 동시에 마차와 후미를 따르는 말들도 똑같이 속도를 올렸다.
광룡부를 마차 천장에 내려놓은 연호정이 흑백쌍룡부를 뽑아 무릎 위에 놓았다.
‘자, 어떻게 나올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