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화. 마(魔)의 숨결 (2)
막원이 돌아온 것은 싸움이 벌어지고 한 시진이 지나서였다.
“허!”
당관의 창백한 안색, 조금 험해진 연호정의 의복을 본 막원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늦었군.”
“그러게요.”
“적들은 어떻게 되었나?”
“물리쳤습니다. 몰살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싸우다간 아군의 피해가 커졌을 겁니다.”
막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물었다.
“어땠습니까?”
“네가 말해 준 지점들을 전부 돌아보았다. 혹시나 해서 조금 더 먼 곳까지 보다가 왔는데, 그래도 없더구나.”
“역시 그랬군요.”
막원이 눈을 끔뻑였다.
“역시라니?”
연호정은 본인들이 겪었던 싸움, 혈승과 나누었던 대화를 간략하게 전했다.
“아무래도 술사들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천리안 같은 술법은 혈승 혼자서 벌인 일이었어요.”
막원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괜히 빠졌구나.”
“몰랐잖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술법을 혼자서 펼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렇기야 하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군. 당가주가 저렇게 다칠 이유가 없었는데.”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자, 자신 앞에 떨어진 싸움은 오롯이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법이오. 신군께서는 그리 말씀하실 필요가 없소.”
막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할 말이 없소.”
연호정이 말했다.
“죄송하다고 하면 제가 더 죄송하지요. 혹시 모를 술법 병력을 해치우기 위해 형님을 보낸 것은 저였습니다.”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느냐.”
“그렇다는 겁니다.”
막원이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처음 아닌가? 동생의 예측이 빗나간 것은?”
“처음 아닙니다. 이런 실수는 종종 했었지요. 드물었긴 합니다만.”
“음.”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확?”
“말 나온 김에 조금 더 쉬었다가 갑시다. 가주님도 운기 좀 하고 계십시오.”
연호정이 일행을 전부 불렀다. 천효락과 화향까지 나오게 했다.
“봅시다.”
그가 지도를 펼쳤다.
“형님께서 돌아보고 오신 곳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지요?”
“거기까지 보고, 난주 동북쪽을 조금 더 살펴보다가 왔다.”
“그러셨군요.”
일행은 입을 쩍 벌린 채 막원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짧은 시간 안에 다 둘러보고 올 만한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막원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그리 놀랄 것 없네. 이 정도는 연제도 가능한 일이야. 여기 묵 소저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했을 겁니다.”
“자네 신법이 무척이나 빠르던데? 나와 별 차이가 없더구먼. 무극이라고 신법까지 빨라지는 게 아니라네. 초절정고수와의 신법 속도 차이는 크지 않아.”
“물론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더 짧은 거리에 그쳤을 겁니다. 절대적인 내공 양의 한계 때문이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공이라는 건…….”
연호정이 손을 들어 막원의 말을 막았다.
“무공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하시지요.”
“아, 그럴까?”
연호정이 다시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우리는 현재 이 부근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혈승이란 놈은 그보다 안쪽에 있었지요. 우리가 왔던 길과 속도를 생각하면, 대략 요 부근 안에서 술법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에 작게 그려진 원.
“술법이 허용되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놈과 싸워 보며 느낀 점은, 놈들의 무공이 중원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음, 그렇겠지.”
“하지만 기(氣)를 다루는 것은 동일합니다. 기의 한도를 보았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천 리 거리는 무리입니다.”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백 리가 넘는 거리에서 일어난 일을 술법으로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것은 신기(神技)라는 말로도 부족한, 거의 역천(逆天)에 가까운 힘이다.
진정 깨달음이 극에 달하여 신선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이 정도 거리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천효락이 불쑥 말했다.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진정 천 리 밖을 내다보는 방법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일행이 천효락을 보았다.
천효락이 한숨을 쉬었다.
“마도의 사술이학 중에는 중원인들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괴악한 것들도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도는 말만 들어 봐도 이것이 멀쩡한 인성(人性)으로 가능한가 싶은 사악한 비술들이 존재하지요.”
“이를테면?”
“생기가 왕성한 동남동녀(童男童女)의 피를 모아 마공의 성취를 높이거나, 술법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것들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순간 일행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런 사악한 비술 대부분이 사라졌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당장 삼백 년 전까지만 해도, 소위 마인(魔人)이라 불리는 이들은 심심치 않게 그러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더군요.”
“…….”
“그래서 마인이라면 치를 떠는 것입니다. 물론, 마도 무림에 속한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잠시 침묵이 일었다.
침묵을 깬 것은 연호정이었다.
“일단은.”
그가 지도를 가리켰다.
“최소 거리가 이 정도라고 봅시다. 정기를 흡수하든 어쩌든, 애초에 이런 술법은 정상이 아니오. 소뢰음사가 이 정도 술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서장에만 박혀 살지는 않았을 것이오.”
천효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애초에 술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적습니다. 무공이야 둔재도 익힐 수 있지만, 술법은 재능이 없으면 입문조차 못 하니까요.”
“설령 타고난 재능이라도 이런 종류의 술법을 곧장 구사하긴 힘들 것이오.”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술법이란 무릇 상단전의 신기를 활용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자유자재로 쓸 수 없을뿐더러, 신기를 잘 활용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행 중에 죽어 나가는 사람도 태반이고요.”
이런 것까지 생각해 보면 혈승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무공은 성천에 비해 큰 모자람이 없고, 와중에 천리안 같은 술법까지 구사하고 있었으니까.
막원이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신마림과의 싸움에 소뢰음사의 법사들이 참전할 수 있다고 보는가?”
“안 올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여하간 형님이 이 근방을 다 둘러봐 주신 덕분에 술법의 허용 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확신할 수 없는 거리잖느냐.”
“세상사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큰 이득입니다.”
패율이 농담처럼 비꼬았다.
“본인의 실수를 덮으려고 말 지어내는 거 아니지?”
“부끄러운 게 없는데 왜 지어내겠습니까? 저도 실수 많이 해요.”
“잘났다.”
패율의 농담에 일행의 얼굴이 다소 풀어졌다.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물었다.
“외팔이 개새끼 상태는 어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흐음.”
연호정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황룡기로 어느 정도의 내상을 바로잡긴 했지만, 독정을 안고 사는 사람의 내상은 그 자신이 아니면 쉽게 고치기 힘들다. 그 빼어난 살상력만큼이나 책임도 확실하게 져야 하는 것이 독인의 삶이었다.
“가주님 상태도 이러하니, 전리품 처리는 지금 해야겠군요.”
“데리고 올까요?”
“그러게.”
잠시 후, 일행 앞에 대금불이 놓였다. 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호정이 대금불의 뺨을 때렸다.
퍽!
소리만 들으면 머리통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입에서 피가 터졌을 뿐, 그의 몸은 여전히 무릎 꿇은 자세를 유지했다.
“크윽.”
대금불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눈을 떴다.
“……!”
흐릿한 시야가 잡히자 대금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연호정이 보였던 것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안녕?”
“…….”
“몸은 좀 어떠냐?”
대금불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말없이 연호정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그 독기는 상대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바탕으로 했다.
“팔 하나는 날아가고, 내상은 깊고. 치명적인 혈도는 피해 갔지만, 내공 운용에 필요한 주요 혈도가 꽤 많이 작살났지.”
“…….”
“십 년 정도 정양하면 본래의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을 거다. 어때? 희망차지 않나?”
대금불이 피 섞인 침을 뱉고 말했다.
“죽여라.”
“그럼 살려 줄 줄 알았냐?”
대금불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죽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고, 대뢰에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무승이었다. 언제나 위를 바라보고 살았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산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정말이지 꿈만 같다고 여기던 순간.
그는 문득 대뢰음사 주지 사형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불자라네. 불자의 도리는 언제나 위를 향해 있지. 그리고 우리의 위에는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의 발자취가 가득하다네. 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깨달음을 공유하여 슬피 우는 민중을 고해(苦海)에서 구해 내야만 해.’
무공에 심취한 것도 좋지만, 그 힘으로 민중을 보살펴라.
그것이 바로 대뢰음사 출신 무승들의 숙명이었다.
하지만 대금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대뢰음사는 썩을 대로 썩은 사찰이었다. 민중을 차기 부처들이 아닌 연꽃의 꽃잎 하나만도 못한 천한 놈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꽃잎이 되었다.
“당연히 널 죽일 거다. 너는 화탄까지 동원했어. 저기 철기단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아군도 상당한 피해를 봤을 거야.”
“…….”
“하지만 지금 죽일 수는 없지.”
대금불이 이를 악물었다.
“고문을 해도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대금불의 말은 단순히 독기 어린 자의 다짐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묘하군.’
하지만 대금불의 성격은 알 것 같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군.”
“…….”
“싸우면서도 알았다. 널 전리품으로 채웠지만, 너를 통해서 서장 무림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없었어. 술술 불 것 같지 않았거든.”
“……그럼 왜?”
“돈 안 깎아 주는 장사치에게는 미래를 담보로 거래해야 하는 법이지.”
“……?”
“신마림이 어디인지 알고 있지?”
대금불이 침을 삼켰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알고 있군. 네가 알고 있다면 네놈과 한패인 이들도 다 알고 있다고 볼 수 있겠어. 그렇지?”
“…….”
“그놈들이 이동하는 경로가 있을 것이다. 서장에서 중원으로 오려면 사천보다는 청해를 가로지르는 게 빠르니까 말이야. 청해에 대해선 빠삭하겠지. 맞나?”
“나는 말해 줄 수…….”
“그들이 쫓아오지 않을 길을 안내해라. 그럼 널 놓아주겠다.”
“……!!”
대금불이 또 한 번 침을 삼켰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는가.”
“서장에는 허풍 떠는 놈들이 많은 모양이군. 하지만 중원에는 그런 자들이 별로 없어.”
연호정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책임지고 보내 주겠다. 어때? 거래하겠나?”
뒤에 서 있던 패율과 묵비, 막원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좋다. 어차피 임무에 실패했으니, 내 목숨이라도 건져서 가겠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서 다행이군. 좋아, 그렇게 하지.”
코웃음을 쳤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대금불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