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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05화 (905/963)

905화. 속전속결 (5)

뇌기의 폭발에 밀려 나간 것은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호정은 약간의 타격도 입지 않았다. 황룡공을 이용, 뇌기의 흐름을 나선형으로 휘게 하여 하늘 높이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건드릴 수 없다.’

혈승을 건드릴 수가 없다.

혈승의 의복은 너덜거리고 있었다. 핏빛 가사 자락은 물론이요, 세 갈래로 딴 수염도 뇌기에 타서 잔뜩 오그라들었다.

그런 지금조차도 흘러나오는 뇌기의 양이 방대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부지런하고 알뜰해야 하는 법이다.

전투도 그와 같다.

멀찍이 떨어진 대금불은 기절했고, 남은 것은 홍나한과 나찰군이었다.

콰아아앙!

무서운 속도로 그들에게 달려가는 연호정.

홍나한 중 한 명이 외쳤다.

“피해라!”

퍼어어어엉!

지독한 학살극의 시작이었다.

광풍구룡살, 무참의 일격에 홍나한 다섯과 나찰군 십여 명이 휩쓸려 날아갔다. 당연히 그들의 몸뚱이는 여러 갈래로 찢겨 있었다.

퍼퍼퍼펑!

살아남은 홍나한들이 권장을 뿜고, 나찰군들의 손에서는 온갖 비수가 쏘아졌다.

연호정이 광풍구룡살의 이초, 승공세를 펼쳤다.

콰르르르릉!!

장력과 비수들이 허무하게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것은 장력과 비수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홍나한 하나와 나찰군 이십여 명의 몸뚱이도 산산조각이 나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단 두 번의 도끼질로 수십 명을 죽였다.

성천에 오른 연호정의 진짜 힘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힘은 혈승과 붙었을 때보다 약해진 것 같았다.

그 약해진 힘에도 적들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연호정이 강해도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이 가능하진 않다. 홍나한과 나찰군의 마음이 이미 꺾여 버린 데다, 퇴각하는 도중이라 오히려 피해가 커진 상황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나찰군을 보는 연호정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어렸다.

“소부주님!”

황석태가 이끄는 철기단이 연호정의 뒤로 따라붙었다.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여 줄 사내, 그가 바로 황석태다.

피피피피피핑!

이백여 개의 화살이 다시 하늘을 날며 도주하는 나찰군을 노렸다.

그때, 연호정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쩌저저저저저정!

이백 발의 화살은 나찰 하나의 목숨만을 앗아갔을 뿐, 나머지는 전부 막혔다.

도주하는 처지에 저 많은 화살을 쳐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철기단이 쏘아 낸 화살이다. 묵룡부 최강의 부대이자 무림맹의 어떤 부대보다도 집결력이 강하고 막강한 부대가 철기단이었다.

연호정이 진각을 밟았다.

콰앙!

금룡번천장의 장력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나찰군 한가운데서 폭발했다.

폭발에 휩쓸린 나찰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확실하게 죽음에 이른 나찰은 다섯에 불과했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똑같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때의 기세와 반절이 조금 넘게 남은 지금의 기세가 똑같아.’

기질도 그렇고 양도 그렇다.

군기의 밀도는 오히려 더 올라갔다. 죽은 나찰들이 혼과 내공이라도 남기고 스러진 건지, 남은 나찰들의 공력과 살기가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일단 다 죽이는 것이…….’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뇌전과도 같은 섬광이 연호정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드드득.

대지를 태우며 나아간 뇌광(雷光)이 눈 깜짝할 새에 초원의 잡초들을 불사르고 저 멀리 산맥까지 나아갔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혈승이 피범벅이 된 왼손으로 그를 겨누고 있었다.

피로 물들었지만, 벌써 말라 버렸다. 강한 열기에 터진 손바닥 상처가 화상으로 얼룩진 듯했다.

혈승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떤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멋대로 싸움을 걸어와 놓고 마음대로 끝내자?”

“더 진행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 터인데.”

“모르겠는데?”

연호정이 좌측으로 손을 뻗었다.

훅!

엄청난 공력이 집약된 무형의 바람이 쓰러진 대금불을 데리고 왔다.

수십 장 밖의 사람을 압도적인 공력으로 끌어온다. 무시무시한 허공섭물이었다.

대금불의 목을 쥔 연호정이 그의 체내에 황룡기를 퍼부었다.

투둑! 투두두둑!

대금불이 연신 꿈틀거렸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상단전을 봉쇄하고 주요 혈도 중 삼 할을 파괴했다. 내공을 뽑아내진 않았지만, 재기하려면 최소 십 년 적공이 필요하겠지.”

그나마 무극에 도달해서 그 정도다. 초절정고수라도 이 정도 피해를 입었다면 모든 무공을 상실해 버렸을 것이다.

연호정이 후방으로 대금불을 던졌다.

황석태의 창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대금불을 받아 냈다. 한 자루 장창의 창대에 늘어진 대금불의 몸뚱이가 처량해 보였다.

퍽! 주르륵.

가만히 있던 혈승의 볼이 작게 폭발했다. 터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다가 금세 말라붙었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뇌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건가?”

“이 뇌기는.”

혈승이 왼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금강저에 잠자고 있던 제석천기(帝釋天氣)라네.”

“제석천이든 아수라든 내가 알 바 아니야.”

“이 금강저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는 강력한 힘을 얻는다네. 하나 금강저가 부러지면 그 안에 봉인된 뇌기가 주인의 몸으로 들어와 폭주를 일으키지.”

“재미있는 무공이군. 괜히 사공(邪功)이 아니야.”

“제석천기가 유지되는 시간은 한 시진에 불과해. 그 안에 기운을 다른 물건으로 전이시키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네.”

“환호성이라도 지를까?”

“다행히 제석천기를 지닌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네. 그래서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것이야.”

“한 시진 동안 괴롭혀 주면 되는 문제 아닌가?”

혈승이 미소를 지었다.

“날 놔주지 않으면 한 시진 동안 유지될 뇌기를 저 독 구름 안에 모조리 퍼부어 주겠네.”

“……오호?”

“그럼 나도 죽겠지. 그러나 버텨도 죽을 바에야 내 적을 조금이라도 괴롭혀 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황석태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저런 요사한 땡중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소부주님.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당장…….”

“가라.”

연호정의 깔끔한 대답에 황석태는 당황했다.

혈승조차도 상대가 이리 빨리 수긍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치켜떴다.

“보내 준다는 건가?”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목숨을 잃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죽이려 했겠지.”

“…….”

“다행히 우리 중 죽은 사람은 없어. 그렇다면 너 하나 잡자고 기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 우리도 시간이 급해.”

“……그렇군.”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너무 쉽게 포기하는군. 솔직히 말하면, 목숨을 걸고 천 공자를 납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보다는 본사의 일이 더 중요하네.”

“소뢰음사?”

“내가 죽든 죽지 않든, 이 뇌기는 본사로 전해져야만 해. 그 일에 비하면 신마림의 일 따위야 알 게 무언가.”

혈승은 따위라고 말했다.

연호정이 비릿하게 웃었다.

“삼교에 굴복한 놈들이 잘도 그런 말을.”

“누가 굴복했다고 하던가?”

“아니었나?”

“동맹이라고 해 두지.”

“얼씨구.”

“우리는 동대륙의 기름진 땅을 원해. 삼교의 힘이 우리를 압도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그러나 삼교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손을 내민 것은, 본사의 성질머리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지.”

혈승의 눈이 깊어졌다.

한쪽 눈이 점점 시뻘겋게 물들었다. 눈의 혈관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본사는 불법의 묘리까지도 힘으로 녹인 이들이라네. 우리와 싸운다면 삼교도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 역시 옥쇄의 각오를 한 사람들이야.”

“…….”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동맹을 맺어 광활한 대지를 나눠 얻을 수 있다면, 이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존심인가?”

“사실이라네. 그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주지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가만히 혈승을 보던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중원으로 네놈들 병력을 떼어 보냈지?”

혈승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도 알고 있나?”

“성동격서겠지. 네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한번 보낸 병력은 다 치워 버릴 거다.”

“…….”

“이만 꺼져. 시간 아깝다.”

혈승이 힐끔 대금불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전리품이다. 넘보지 마라.”

“…….”

어두운 눈으로 연호정을 보는 혈승.

그의 시선을 받아 주던 연호정이 일순 버럭 소리쳤다.

“얼른 꺼져! 정말 이 자리에서 다 죽고 싶은 거냐?!”

혈승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가자.”

살아남은 홍나한과 나찰군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중 나찰군의 움직임이 묘했다. 그들의 주인은 분명 대금불 같았는데, 용케도 혈승을 뒤따르고 있었다. 대금불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살벌한 싸움이 끝났다.

후우욱!

무섭게 확장되었던 독 구름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웨에엑!!”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당관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단숨에 당관에게로 다가간 연호정이 그의 명문에 손을 댔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기의 특성이 너무 다르다. 그러지 마라.”

“괜찮습니다. 집중하십시오.”

우우우우웅.

황룡기는 너무나도 쉽게 당관의 혈도로 파고들었다.

당관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토록 파괴적인 힘을 구사하던 연호정의 진기는, 독기마저 포용할 정도로 부드럽고 깊었던 것이다.

“운기하십시오.”

당관은 말없이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연호정이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는 괜찮냐?”

“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호정이 묵비에게로 다가갔다.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손.”

“네?”

“손 줘.”

묵비가 손을 내밀었다.

연호정이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후우우우우우웅!!

묵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마치 시원한 산바람을 맞은 듯,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혈색을 되찾았다.

눈을 뜬 연호정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가주님의 독공도 아우를 수는 있지만, 독기가 너무 성해서 일정 이상까지 봐 드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는 다르지.”

묵비가 신기한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정상은 아니었지만, 입은 내상 대부분이 순식간에 바로잡혔다. 소모한 내공까지는 어쩔 수 없어도 움직이는 데에 전혀 부담이 없는 수준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다.”

“나야 뭐 몇 발 쏘지도 않았는데요. 고생은 가주님께서 다 하셨죠.”

“어쨌든.”

묵비의 등을 두들겨 준 연호정은 문득 마차에서 나온 천효락을 바라보았다.

천효락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소부주.”

“별말씀을.”

일행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친 연호정이 황석태에게로 걸어갔다.

쿵!

대금불을 내려놓고 땅에 창을 찍은 황석태.

“소부주님을 뵙습니다.”

“소부주님을 뵙습니다!”

철기단 모두가 마상에서 고개를 숙였다. 전시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절대 말에서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사부님이?”

황석태가 마주 웃었다.

“그렇습니다.”

“사고뭉치 소부주 때문에 황 단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 여정에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배우기는 개뿔, 우릴 지켜 줘야지.”

“그건 기본이지요.”

예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 보이는 황석태였다. 종남 전쟁 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연호정이 한 차례 숨을 내쉬었다.

“반나절만 쉬다가 가자. 고생들 했어. 빌어먹을, 나도 대가리가 너무 아프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너무 의욕이 넘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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