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화. 속전속결 (4)
‘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파파팡! 퍼어엉!
연달아서 터지는 장력이 시야를 가리고 기감을 흔들었다. 타격을 받진 않았지만, 물러나지 않으면 내공이 흔들릴 정도는 되었다.
차분하게 용형칠기보를 이용, 후방으로 물러나 재차 광룡부를 준비하던 연호정이 혈승의 눈을 포착했다.
치이익!
혈승의 눈에서 불그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혈승의 기도가 이전보다 더 음험해졌다는 것이다.
물끄러미 혈승을 보던 연호정이 힘차게 광룡부를 휘둘렀다.
콰앙!
무참의 일격이 전방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충격파가 퍼지기도 전에 휘몰아친 참격이 혈승의 백팔적공주에 맞고 소멸했다.
파바바박!
혈승이 재차 뒤로 밀려 나갔다.
안색은 창백했고, 호흡은 더 무거워졌다.
연호정은 멈추지 않았다. 문답무용, 속전속결이다. 상대가 어떤 상태이든 간에, 그에게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만한 무공과 자신감이 있었다.
파아아아앙!
세 걸음 만에 최적의 빈틈을 찾아낸 연호정이 혈승의 측방에서 광룡부를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광풍구룡살은 아니지만, 마음먹고 내친 일격임은 분명했다.
한데도 혈승은 멀쩡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충격은 받았지만 광룡부 때문은 아니었다.
백팔적공주는 신물(神物)이라, 광룡부의 무게와 날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줄의 탄성을 이용해 충격을 흡수하고 받아 내는데, 그 오묘한 무리(武理)는 연호정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로 부드러웠다.
즉, 연호정의 공격이 아니라 본인 내부의 무언가 때문에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기회군.’
파파팡!
실로 오랜만에 혈익휘천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인 그가 혈승의 후방을 점했다.
쿵!
강하게 진각을 딛고 금룡진악권을 펼쳤다.
후우우우우웅!
묵직하게 회전하는 권력이 혈승의 몸에 닿았다.
그때였다.
쿠릉! 파지지직!
혈승의 등 뒤에서 일순 살벌한 뇌기(雷氣)가 새어 나왔다.
‘……?!’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치이이익!
혈승의 몸 곳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시퍼런 뇌기가 혈승의 몸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전 현상을 일으켰다.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투우웅!
강한 반탄력과 함께 연호정이 오 장 거리를 물러났다.
놀라운 힘이었다. 중독된 데다 내상까지 입었던 사람에게 이런 힘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파지지지지직!
곧장 치고 들어가려던 연호정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이이이이이잉!!
혈승의 몸에서 이는 방전 현상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갔다. 단순히 범위가 넓어지는 게 아니라, 뇌기(雷氣) 자체가 강해지고 있었다.
모용군이 흩뿌리는 뇌기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모용군이 무극에 오르고도 오랜 시간 연마한 후에야 저런 뇌기를 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커헉!”
천하의 연호정조차 쉽게 접근하지 못할 정도의 힘.
그러나 혈승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아졌다.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질린 안색, 피부와 피부를 잇는 푸른 뇌전이 찰나에도 수십 번이나 위치를 옮겨 가며 혈승을 괴롭혔다.
치이이이익!!
혈승의 몸에서 시커먼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해독.’
십방벽의 독력이 단숨에 해독되고 있었다.
해독제를 먹은 것도 아니고, 신공으로 독력을 몰아낸 것도 아니었다.
저것은 순수한 뇌기(雷氣)였다. 자연의 벼락과 유사할 정도의 농도를 지닌 뇌기가 독기를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있는 것이다.
‘멀쩡하지 못할 텐데.’
뇌기의 폭주.
갑작스레 왜 저런 일이 발생한 건지 의아했던 연호정은, 순간 쪼개진 독고저로 시선을 돌렸다.
땅바닥을 구르는 독고저가 조금씩 먼지로 흩어지고 있었다.
연호정은 사태를 알아챘다. 불가에 대한 지식 이전에, 힘의 흐름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저 금강저는 단순한 법구가 아니었어. 제석의 힘을 봉인한 봉인구(封印具)였던 것이다.’
금강저 자체가 제석의 벼락을 본떠 만든 주술의 도구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법구요, 수행의 도구일 뿐이다. 여느 승려들에게는 그러했다.
그러나 힘을 추구하는 소뢰음사에서 금강저는 제석의 힘, 실제 뇌기를 봉인한 법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법구와 하나가 된 혈승의 몸은, 금강저가 부서지며 폭주하는 뇌기를 그대로 안게 되었다.
파지지지지지직!
“크아아악!”
혈승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굳이 연호정이 건드리지 않아도 그 자신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조금은 허무해진 싸움, 그러나 연호정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일 리 없어.’
빈틈을 노리고 극한의 참격으로 금강저를 부쉈지만, 아무리 새외의 무공이 이질적이라도 한낱 신외지물에 자신의 생명을 쑤셔 넣었을 리가 없다.
‘단순한 폭주가 아니야.’
그때였다.
퍼퍼퍼퍼퍼퍼펑!
혈승과의 싸움에 집중한 연호정의 귀에, 저 멀리서 엄청난 폭음이 터지는 게 들렸다. 워낙 막강한 충격파를 동반한 싸움이다 보니 십방벽과 오십여 장이 넘도록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화탄?!’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두두두두두!
집중이 과했던 것일까?
대지를 울리는 이 소리, 진동.
그리고 너무나도 반가운 이 기세까지.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두두두두두!!
갈수록 빨라지는 기마의 주력이다.
무림 고수의 신법을 상회하는 천마(天馬)들을 이끌고 나타난 대(大)부대가 있었다.
결코 무겁지 않은 경갑 갑주. 대부분이 창을 들고 있으나 허리춤에는 도검을 찼고, 말의 옆구리에는 탄력 좋은 활이 걸려 있었다.
그 숫자가 삼백이었다. 본래는 일천 병력을 유지하는 부대였지만, 너무도 머나먼 여정인지라 보급 문제를 최소화하려면 숫자가 적은 게 좋다.
대신 최고 실력자들만 선별한 건지 휘몰아치는 군기(軍氣)가 무시무시했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따라붙을 줄은 몰랐군.”
공공대사도, 제갈문호도 일행에게 따로 부대를 붙여 주지 않았다.
일행이 걱정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미 일행과 합류해 함께 적진을 헤집을 부대가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삼백 기마대의 수장, 황석태가 적룡신창으로 대금불과 나찰들을 가리켰다.
“사살해라!”
피피피피피피핑!!
허공을 나는 화살의 숫자가 무려 이백이다.
강력한 내공으로 무장한 화살들. 비록 묵비의 궁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백 명이나 되는 궁술의 고수들이 쏘아 내는 화살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심지어 허공에서 폭발한 화탄의 압력 때문에 홍나한과 나찰군의 대열은 상당히 흐트러진 상황.
대금불이 움직였다.
쿵!
강한 진각과 함께 석장을 휘두르니, 어느새 반투명한 기막이 형성되어 널따란 방위를 아울렀다.
따다다다다다다당!
역시나 무극수의 힘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강력한 내공으로 무장한 기막은 백여 발의 화살을 그대로 튕겨 냈다.
하지만 남은 화살까지 쳐 낼 수는 없었다.
퍼버버벅! 티티팅!
“크아악!”
섬뜩한 비명과 함께 나찰 십여 명이 쓰러졌다.
제각기 병장기를 휘둘러 화살을 쳐 낸 이들도 많았다. 지금 죽은 나찰들은 폭발의 압력 때문에 쓰러진 전방의 나찰들이었다.
대금불의 눈에 불이 붙었다.
“네놈들은 또 뭐냐!”
파아아아앙!
홀로 용아철기단을 향해 뛰쳐나가던 대금불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치이이이이익!
전방으로 뻗어 나갔던 융해독의 촉수를 회수한 당관이 대금불의 전진 방향에 미리 독기를 뿌려 둔 것이다.
대금불은 열이 머리까지 뻗치는 것을 느꼈다.
저 무서운 독 구름은 혈불경에 오른 자신조차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서장에도 독을 다루는 이들이 있지만, 저 독공에 비할 만한 공부를 구사하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대금불의 몸이 회전했다.
쉬익! 퍼어어어엉!
엄청난 힘이었다. 만독십방벽의 반구형 독 구름이 통째로 밀려 나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작정하고 내친 장력, 대뢰금천장(大雷禁千掌)이었다. 대뢰음사 최고의 무공 중 하나로, 그 위력은 소림의 대력금강장과 비견할 만하다.
당관이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이번 장력은 그 위력이 너무 거셌다. 순간적으로 독기가 흩어질 뻔했다. 융해독으로 충격을 줄였음에도 깊은 내상을 입을 만큼 강했다.
이것이 진짜 무극수의 힘이었다. 성천에 도달치는 못했으나, 품고 있는 진기의 밀도부터가 다르다.
‘이런.’
십방벽이 흔들리며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렸다. 융해삼생공이 흩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애초에 당관의 절대적인 내공이 아니었다면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절기였다. 지금까지 이 방대한 독 구름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가히 천하 정점에 오른 내공력이라 할 만하다.
대금불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한계였군.”
느닷없이 들이닥친 의문의 부대보다 저 독 구름을 만든 놈에 대한 분노가 훨씬 더 컸다.
피슉!
십방벽을 뚫고 날아온 막강한 화살이 대금불의 가슴을 노렸다.
퍼억!
깃대를 쳐서 화살을 날려 버린 대금불이 양손에 거대한 기운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된 이상 홍나한과 나찰군을 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저 독 구름부터 박살 내 버리면 그 뒤는 일사천리일 것이다.
대금불이 대뢰금천장의 쌍장을 휘두르려는 순간.
‘……!’
그의 눈이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오십여 장 너머에서 쏘아진 한 줄기 광풍과도 같은 힘을 느꼈다.
무시하고 장력을 쏘아 내면 독 구름을 날려 버릴 수 있으나, 그리되면 자신의 목숨도 날아간다.
‘빌어먹을!’
대뢰금천장의 공력을 회수한 그가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후우우우웅!
땅을 스치고 휘어진 백룡부의 광풍섬이 뾰족하게 날 선 채로 대금불에게 쏘아졌다.
대금불은 기겁했다.
‘말도 안 돼!’
이토록 거대한 힘을 품은 이기어검이, 이렇게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인간의 힘이 어찌……!’
대금불이 재차 대뢰금천장을 펼쳤다.
콰아앙!
대금불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발출하려던 공력을 회수, 그리고 다시 발출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부를 보호하는 진기가 많이 흔들린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직격타를 맞았으니, 일전에 맞은 광풍섬 이격보다도 피해가 더 컸다.
콰드드득!
십여 장을 더 물러난 대금불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런……!”
그때였다.
파지지직!
그제야 대금불도 심상치 않은 뇌기의 흐름을 느꼈다.
대금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설마 금강저가 부러졌나?!
‘……!!’
믿을 수가 없었다. 혈승의 금강저는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구사한 대뢰금천장으로도 흠집을 낼 수 없는 신물이었다. 하물며 혈승의 내공까지 깃들어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도끼를 든 놈이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서, 다시 시커먼 도끼를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번쩍!
대금불은 앞뒤 가리지 않았다.
“홍나한과 나찰군은 물러나라! 다음 기회를 노린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달려 나간 대금불이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나와 싸우자!”
연호정이 귀찮다는 듯 광룡부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도제 종리백의 승천 일격을 머리에 담고 자신에게 맞게 창안한 광풍구룡살의 이초, 승공세(昇空勢)였다.
콰르르르릉!!
대지의 지력을 휘감고 승천하는 삼참(三斬)의 공력.
황금빛 용이 발톱을 휘두르며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다. 받아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대금불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좌측으로 물러났다.
콰드드드드드득!!
넘쳐흐르는 경파가 대지를 무너트리고 대금불의 오른팔을 날려 버렸다.
날아간 오른팔이 핏물이 되었다가 그대로 증발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위력이었다.
극도의 허전함을 동반한 찌릿한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대금불이 곧장 혈승에게로 날아갔다.
“혈승! 정신 차리시오! 퇴각을……!”
퍼어어어엉!
뇌기가 폭발하며 대금불이 다시 날아갔다. 날아간 대금불의 몸 여기저기에 시커먼 화상이 남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의식을 잃기에 충분한 폭발력이었다.
오늘 대금불은 무공을 익힌 이래 가장 많은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