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화. 속전속결 (3)
‘무지막지하군.’
솔직함이 아름답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당관은 그것을 거부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솔직함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도 그러했다.
그런 당관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의 파동이 저렇게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다.
당관이 보는 것은 중독되었다가 멀찍이 떨어져 나간 적의 부대도, 더 멀리 튕겨 나가서 머리를 휘휘 젓고 있는 젊은 무극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혈승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는 것은 바로 연호정이었다.
기묘한 일이다.
저 둘은 절대고수라는 이명에 걸맞은 전투를 벌이는 와중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 하나를 보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싸움 자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관이 연호정만을 보는 것은, 그의 무공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규격 외로 강했으며 결정적으로…….
‘닮고 싶다.’
그렇다.
당관은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그는 연호정의 저 무공을 닮고 싶었다.
단순히 감탄스럽다거나 감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연호정의 무공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그의 무공이 자신이 추구하는 무도(武道)를 이상적으로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싸가지의 무공에는 제왕독경이 있어.’
제왕독경.
당가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무인, 암왕 당형이 창안해 낸 무적의 절기다. 천하 모든 독의 특성과 위력을 무공 하나로 집대성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렇기 때문에 제왕독경을 대성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 무공을 당형 이후 최초로 대성한 것이 바로 당관이었다.
그는 아버지, 당형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말한다. 만류귀종이라, 천하의 모든 무공이 종국에는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내 깨달음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나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비슷해질 수는 있지. 하지만 끝에 이르러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당연히 익힌 사람이 다르고, 저마다 정한 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도(武道)가 아니야.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신(神), 혹은 신선이 되는 것이겠지. 무인은 신도, 선도 될 수 없다. 무인은 무인이야.’
담백하기에 단정적일 수밖에 없는 그 말은 당관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서 놀라웠다.
수만, 수십만 갈래로 뻗어 나가는 무인들의 끝은 제각기 다를 텐데도, 연호정의 저 무공은 당관 자신이 정해 놓은 끝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저것은 상단전이다.’
연호정 스스로가 깨달은 것을, 당관은 삼자로서 보고 알 수 있었다.
당형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당관 역시 연호정의 무학 원리를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베고자 하는 의지, 그 의지를 극대화한 것이다. 아버지의 상단 운용과는 전혀 달라. 행위 그 자체의 깊이에 몰두하는 것,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현실로 구현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저놈이 얻은 깨달음이다.’
당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저놈과 내가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천화우를 완성하는 데에는 연위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연위는 내공의 흐름에 도움을 준 적은 있어도, 암기들의 흐름을 이용한 초식에 도움을 준 적은 없다.
연위는 그저 무학의 깨달음을 강조했다. 상상의 힘,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설파하며 종국에는 원하는 대로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당관은 그 깨달음을 받아들였다.
만천화우는 그렇게 나온 절기였다. 더 살벌한 초식, 더 첨예한 흐름, 더 강력한 내공이 없이도 천하무적의 절기로 탄생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 자신이 상상하던 것을 암기들로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당관의 깨달음 속에는 연위의 조언과 무리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연위는, 어떤 방식으로든 연호정에게도 그 자신의 깨달음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연위는 친구다. 그러나 스승이었다.
자신 역시 연위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세 사람은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한 스승이자 제자였고, 나아가 그런 자잘한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정신적 동문(同門)이었다.
‘나의 만천화우처럼 제왕독경도 저렇게 변할 수 있다.’
이미 변하고 있었다. 천살귀진과 만독십방벽을 합쳐 상상대로 구현한다는 것은 상단전의 힘 없이는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는 또 한 번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제왕독경을 대성하는 것은 어렵지. 그래서 네가 대단한 것이다. 재능 이전에 온갖 독에 당해 보고 그것을 이겨 낼 만한 생존력과 인내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그것을 해냈어.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그러나, 대성이 끝은 아니다. 특히 독공(毒功)에서의 대성은 여느 무공과 달라. 독공은 말 그대로 독을 쓰는 무공이다. 독공을 대성하여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곧 수천, 수만 가지의 새로운 독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대장장이로 비유하자면, 철을 다루는 모든 기술을 체화하는 것이 제왕독경의 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성 이후에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답은 명확했다. 체화한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병기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파다한 장인들과 겨루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천고의 신검(神劍)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검을 만들기 위해, 당관은 상단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의지대로, 내 마음대로 독을 생성하고 하독한다. 해독 역시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으며, 그 경지에 이르러선 자잘한 독병들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연호정이 보여 주는 경지였다.
퍼어엉!
순간 만독십방벽이 신음을 흘렸다. 혈승의 혈음지가 십방벽을 뚫고 들어와 소멸했다.
융해삼생공이 무서운 이유는 발경조차도 독력으로 녹여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직접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말하자면, 혈승의 혈음지는 십방벽의 독력으로 기세를 잃었음에도 벽을 뚫고 들어와 반대편까지 가서 소멸할 정도로 진기 밀도가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콰릉!
연호정의 파격적인 공격에 혈승의 몸에서 핏물이 터졌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일반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도 한 번의 실수로 승패가 갈린다. 저들만 한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그 여파가 더 클 것이다.
‘좋아.’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융해삼생공의 독력에 혈승이 당한 것은 분명했다. 연호정은 일찍이 제왕독기로 응축한 해독약을 먹었을 테니, 큰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롭게 연호정의 무공만 들여다볼 때가 아니었다.
당관의 눈이 대금불에게로 향했다.
‘저놈이다.’
한껏 살기를 피워 올린 채 연호정을 노려보던 대금불이 일순 고개를 돌려 십방벽을 보았다.
순간 당관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보이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정도 십방벽의 내부를 보는 것은 성천이라도 무리라고 하셨더랬다. 당연히 대금불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원의 무공과 새외의 무공은 전혀 다르게 발전했다고 들었다.
이곳에서의 상식이 저곳에서의 비상식일 수 있다는 것.
파아악!
물러난 채 이곳을 노려보고 있는 적의 부대 위로 날아오른 대금불이 어느새 십방벽 상부에서 나타났다.
대금불이 장력을 내쳤다.
콰앙!
십방벽의 독 구름이 거세게 출렁거렸다.
주르륵.
당관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작정하고 내친 것인지 장력의 폭발력이 엄청났다. 다행히 융해삼생공의 독력으로 일부가 상쇄되었지만, 남은 충격은 오롯이 당관이 받게 되었다.
촤르륵!
재차 날아올라 십방벽 오 장 너머에 선 대금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중독되었군.’
오른팔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지혈은 해 두었지만, 그곳으로 융해독이 침투하여 시커먼 연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대금불의 오른팔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점차 사라졌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해독했나?’
그럴 리는 없다.
해독이 아니라 잠시 잠재운 것뿐이리라. 융해독을 저리 빨리 해독할 수는 없다. 무극수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였다.
대금불이 손을 들자 가면을 쓴 놈들이 품에서 검고 동그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순간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화탄?’
모르겠다.
하지만 독은 물론 화약 병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당가의 주인이 보았을 때, 저것은 독탄 아니면 화탄이 분명했다.
독으로 두르고 있는 곳에 독탄을 던져 봐야 의미가 없는 짓. 그렇다면 저 시커먼 구슬은 화탄일 확률이 높았다.
‘빌어먹을.’
대체 저 망할 놈들이 어떻게 화탄을 손에 넣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십방벽이라도 화탄은…….’
무리다. 십방벽 자체는 몰라도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저만한 충격량을 버틸 수 있을까?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십방벽을 뚫고 날아간 철전 하나가 나찰 하나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당관은 물론 일행 전체가 깜짝 놀라 묵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묵비의 홍련궁에는 철전 세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수성이 우선, 그다음은 공격.”
“……!”
“맞죠?”
묵비는 대답도 듣지 않았다.
피피핑! 티티팅!
빛살처럼 날아간 세 발의 화살을 귀신처럼 인지한 대금불이 석장을 휘둘렀다.
놀라운 반응 속도였다. 십방벽의 독기가 그렇게 지독한데도 벽을 뚫고 나오는 화살의 살기를 잡아내고 대응하는 것이다.
당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대상은 대금불이 아니라 묵비였다.
“어떻게……?”
묵비의 안색은 극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급격한 내공 소모 때문이었다. 외부에서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내부에서 발하는 공격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막기 위해 화살촉 자체에 한계에 가까운 내공력을 집중시킨 것이다. 일시적으로 퍼부은 과다한 진기에 내상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묵비는 멈추지 않았다.
“대장전이 중요하긴 하죠. 나서야 할 곳에 나서는 것도 중요해요.”
끼기기긱!
묵비가 유독 강하게 시위를 당겼다. 두 개의 화살촉 끝에 우윳빛 진기가 무섭게 모여들어 있었다.
“그러나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어요.”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퍼펑!
십방벽을 뚫고 날아간 화살 중 하나가 대금불의 손에 잡혔다. 하지만 남은 하나는 그대로 홍나한 하나의 쇄골을 뚫어 버렸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십방벽의 독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관통력이었다.
‘점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군.’
혈음지는 관통했지만, 장력은 방벽을 뒤흔들었다.
진기의 집중도와 형태 때문이었다. 묵비의 내공 역시 초절정고수 중에서는 선두를 달리는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내공을 배제하고 모든 힘을 집중시킨 화살촉이 십방벽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때, 대금불이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나찰들이 일제히 손에 쥔 무언가를 날렸다. 모두가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날아오는 검은 구슬의 숫자만 거의 삼십여 개는 되는 듯했다.
당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빌어먹을.”
묵비가 재차 시위를 걸었다. 홍련궁에 다섯 발의 철전이 걸렸다.
우우우우웅!
십방벽이 형태를 바꾸며 이십 개의 촉수(觸手)가 뻗어 나갔다. 날아오는 화탄을 먼저 녹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머지는?
‘위험!’
그때였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엄청난 수의 화살이 날아오며 화탄들을 허공에서 터트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