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화. 속전속결 (1)
당관은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적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소수 정예일 거라고 봅니다. 많아야 백 명 언저리겠지요.’
‘소수가 아닌데.’
‘문제는 무극수가 얼마나 되는가입니다. 놈들도 머리가 있다면 무림맹의 지원을 받아 돌아가는데 무극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요.’
‘그렇겠지. 당장 신마림주나 그 대공자란 놈도 무극이니까.’
‘그렇다면 최소 하나입니다. 적어도 둘 이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데도 백병신군을 따로 보냈더냐?’
‘가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쪽팔린 얘긴데, 나 아직 무극 아니다. 뭔가 보일 듯하긴 하지만, 그 가능성 하나를 믿고 나한테 맡기는 건 아니겠지?’
‘절대로요. 싸운다고 다 무극에 오르면 세상천지에 무극수 아닌 사람이 없을 겁니다.’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라고.’
‘암왕 노선배님께 들었습니다. 제왕독경을 대성하면 무극수라도 중독시킬 수 있다고. 운이 좋으면 상대에 따라 죽음에 이를 정도의 독상을 입힐 수도 있다더군요.’
‘독과 암기의 힘이지. 그건 경지 차이가 나도 마찬가지야.’
‘가주님께서는 독경을 대성하셨지요.’
‘대성은 했지. 다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무극수에게 통할 만한 극독이라면, 적의 병력은 이쪽을 건드리지도 못하겠지요.’
‘네 말은……?’
‘공격이 아닙니다. 수성(守城)입니다. 힘이 다할 때까지 철저하게 아군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가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수동적으로 가자고?’
‘지형이 이 모양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주님의 보호를 받는 작은 성은, 경우에 따라 공격하는 성이 될 수도 있겠지요?’
‘……!’
‘우린 아직 청해에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조건 속전속결입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움직여 주십시오.’
‘하여간에…….’
당가의 주인을 이렇게 쥐어짜듯 부려 먹는 놈은 세상천지에 연호정 하나뿐일 것이다.
‘좋다. 이번에는 네 녀석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
당관의 두 눈에 녹색 안광이 번뜩였다.
화아아아악!
그의 몸에서 퍼져 나간 무형의 기운이 마차를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을 뒤덮었다.
주르륵.
당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형의 기운에 아직 독기를 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독기를 담으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녹아내릴 테니까.
후우우웅.
무형의 기운이 서서히 꿈틀거리며 막을 형성했다.
‘백독백출(百毒百出).’
우우웅!!
거대한 반구를 형성한 무형의 기막 중심에서 짙은 녹색 구름이 퍼져 나갔다.
당관의 입을 달싹였다.
‘천독귀진(千毒鬼陣).’
쿠르릉!!
독기 가득한 기막이 실제 무게를 가진 것처럼 땅에 지진을 일으켰다.
천독귀진은 본디 제왕독경상의 무공이 아니었다. 이것은 진법의 일종으로, 당형의 손에 무너져 버린 귀문 고수들의 공부를 독경에 맞게 개조하여 편입시킨 것이었다.
목숨이 달린 최후의 순간에나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귀한 공부를 지금 당장 드러내게 될 줄이야.
‘만독십방벽(萬毒十方壁).’
콰르르릉!!
거대한 녹색 구름으로 뒤덮인 반구형 기막 곳곳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왕독경의 비기 중 하나인 만독십방벽이었다.
천독살진이 적과 나를 둘러싼 독진을 형성하는 수법이라면, 만독십방벽은 당관의 독정(毒精)에 잠자고 있는 모든 종류의 독을 발산해 일거에 적을 살상하는 극독기공이었다.
본디 백여덟 가지의 극독으로 똘똘 뭉쳤던 당관의 독정은, 당가 사태와 아버지인 당형과의 수련 덕에 삼백육십 가지로 늘어난 상태였다.
‘이걸로는 안 되겠지.’
삼백육십 개의 독을 전부 풀어 내도 무극수를 중독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치이이이이이익!!
일렁이는 구름 속, 실타래처럼 퍼진 삼백육십 개의 극독도(劇毒道)가 순식간에 일흔두 개로 줄어들었다.
힘을 비축하는 것이 아니었다.
독은 다른 독과 만나 중화되기도 하고, 독력을 더 키우기도 한다.
당관의 머리에는 혼합독에 대한 수천 가지의 공식이 새겨져 있었다. 실전에서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지만, 그중 가장 강한 혼합독에 내공을 실어 독공(毒功)의 위력 자체를 증폭시키는 술수를 알고 있었다.
치이익! 치이익!
어느새 검게 변하기 시작한 구름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과 독이 만나 융합하여 특성이 바뀜과 동시에 독기의 농도까지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당관의 몸이 순식간에 땀으로 푹 젖었다. 만독십방벽을 유지한 채로 최고의 혼합독을 연성하는 것은 그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라 하여 속도까지 느리진 않았다.
‘열둘…… 일곱…… 넷…….’
우웅!
녹색 광망으로 가득했던 당관의 눈도 시커멓게 변했다.
‘하나.’
콰콰쾅!
천독귀진과 합쳐진 만독십방벽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융해삼생공(融解三生功).”
전생과 현생, 후생을 통틀어 삼생이라 한다.
한 인간의 삼생을 모조리 녹여 없애 버린다는 무시무시한 혼합독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허공을 둘러보던 패율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난 내공력이군. 무력의 격차가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내공만큼은 압도적이야.’
독공을 연마하기 위해 수백 가지의 영약을 먹고, 수천 가지의 독초를 씹었을 것이다. 그 모든 기운을 내공으로 돌렸으니, 단순 내공량만 따지면 연호정보다도 높은 것이 당관이었다.
‘이런.’
마차에서 나온 천효락의 얼굴에도 경악이 드리워졌다. 화향은 숫제 입을 헤 벌린 채 반투명한 독 구름의 구체를 보고 있었다.
‘엄청난 내공력이다. 내공의 흐름만 보면 거의 사부님에 비해도…….’
내공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양을 체내에 비축하려면 극한의 수련은 물론 최고급의 무공, 나아가 신체가 받는 부담을 안정적으로 풀어 내는 모종의 힘이나 강철처럼 단단한 내구성이 필요하다.
‘이 내공은 어떠한 한계를 초월한 것이다. 어떻게 성마에 이르지도 못한 사람이 이만한 힘을……?’
순간 천효락은 깜짝 놀랐다.
‘성마를 돌파하지 못했는데 이만한 내공을 가질 수 있는 건가?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그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이 거대한 힘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혼신의 힘을 다한 모양이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은 당관은 얼굴을 찌푸린 채 오른손을 들어 무언가를 조종하고 있었다.
천효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깨달음이 과해서, 육체와 진기의 변화를 뛰어넘어 정신력 자체가 무극에 달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은 반대란 말인가?’
특성도 다르고 밀도도 다른 수천 가지의 독을 흡수한 당관의 육신은 다른 의미로 금강불괴(金剛不壞)라 할 만하다.
그 금강불괴의 육신에 들어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시무시한 내공력.
‘몸은 이미…… 성마에……?’
순간 당관의 안광이 번뜩였다.
쿠르르릉.
어둡기 그지없던 만독십방벽의 반구형 구름이 점차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내부에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외부에선 이쪽에 누가 있는지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시커먼 구름으로 가득할 테니까.
“조심해라.”
조금은 힘이 빠졌지만, 그럼에도 당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전원 전투 준비를 해. 만에 하나 적장 하나가 이곳을 뚫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 * *
쩌어어어어엉!
사선으로 올려 치는 광룡부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역동적이었다. 광룡부를 따라 올라오는 모래바람이 회오리치며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그렸다.
파아아악!
기기묘묘한 보법으로 연호정의 도끼질을 피한 혈승이 부드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훅!
단 한 발에 불과한데도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축지(縮地).’
소위 축지법(縮地法)이라 함은 먼 거리를 엄청나게 빨리 이동하는 신인(神人)들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축지, 말 그대로 땅을 접고 이동하는 수법이란 뜻이다. 그래서 축지는 도술(道術)의 일종이라고 보며, 실제로 술사 중엔 그와 유사한 비술을 쓰는 자가 있다고 한다.
혈승의 축지는 달랐다. 보법에 대한 이해도가 극에 이르러 한 걸음으로 십 장 거리를 접어 돌파한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지고(至高)의 깨달음이었다.
쩌저저저정!
혈승의 금강저가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금강저란 본디 승려들의 수행을 돕는 법구(法具)로, 그 기원은 천축국의 뇌신(雷神)이 아수라를 물리칠 때 휘두른 벼락을 형상화한 것이다.
혈승의 금강저는 독고저로, 마치 단검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혈승은 금강저를 단검처럼 휘둘렀다. 한데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파바바박!
도끼날과 창봉을 돌려 금강저를 막는데 손바닥이 쩌릿쩌릿했다. 무게도 얼마 안 나가는 짧은 금강저에서 뿜어지는 힘은 거력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힘도 힘이지만.’
파직!
창봉 끝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뇌기(雷氣)인가.’
뇌신의 도구를 형상화한 주술적 도구라지만, 진짜로 벼락의 힘을 담았을 리는 없다.
이 힘은 전적으로 혈승의 내공에 기인한 것이다. 무게가 가벼워 빠르지만 내공력은 무겁다. 와중에 뇌기까지 살아 있으니, 매 일격이 필살의 위력을 자랑한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꽤 신명 나는 싸움을 벌였겠지만…….’
콰앙!
회전하는 돌풍이 혈승의 발밑에서 터졌다. 축지로 접근하던 혈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번쩍!
귀신처럼 혈승 앞에 나타난 연호정이 재차 광룡부를 들어 올렸다.
혈승의 눈이 흔들렸다.
태양을 등진 채 몸뚱이만 한 도끼를 들고 선 연호정의 모습은 신화 속 아수라(阿修羅)와 비슷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속전속결!’
번쩍!
벼락처럼 빠르게 휘둘러지는 광룡부에 황금빛 불꽃이 가득하다.
혈승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휘두르는 속도도 속도지만, 그 위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중병(重兵)은 기세라는 말이 있다. 파고들면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 같지만, 파고들기까지가 어려운 이유는 영역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호정의 도끼도 그와 같았다.
복잡한 움직임이나 신묘한 투로 같은 건 전혀 없다. 지극히 단출하고 정직한 공격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일격, 일격을 작정하고 때려 넣을 때는 정말 온몸의 뼈마디가 가루가 될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콰아아아앙!!
반경 오 장 너비의 땅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푹 꺼졌다.
훅!
연호정이 뒤로 물러났다.
효율적인 공격 거리를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혈승이 이를 악물며 그를 따라가 금강저를 휘둘렀다.
그때였다.
‘……?!’
혈승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언제?!’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
뇌기가 아니었다. 신경을 타고 오르는 이 음험한 기운은…….
‘독?!’
파아악!
뇌음천보경(雷音千步輕)으로 거리를 벌린 혈승이 혈음보리신공을 끌어 올렸다.
치이이이익!
손끝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말로 중독이 되었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
혈승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진 순간.
그의 눈에 연호정 뒤편, 거대한 흑색 구름이 보였다.
‘이 정도 거리가 떨어졌는데도 독기의 침습을 받았단 말인가?’
그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오는 거냐?”
“……!”
“그럼…….”
연호정이 웃으며 대금불을 바라보았다.
표정, 눈빛, 자세만으로도 단박에 상대의 성격을 파악한 그였다.
“네가 놀아 줘라, 애송이.”
대금불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찢어 죽일 놈!”
파아아아악!
대금불이 연호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승이 외쳤다.
“물러나게!”
동시에, 연호정의 몸이 회전했다.
황룡기로 불타오르는 광룡부, 연위와의 대련 속에서 창안했던 광풍구룡살(狂風九龍殺)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