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900화 (900/963)

900화. 혈승(血僧) (6)

연호정의 거침없는 발언에 혈승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특히나 일백의 나찰군(羅刹軍) 뒤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던 대금불의 얼굴은 나찰들이 쓴 가면보다도 더 무섭게 일그러졌다.

“저 천한 무지렁이 놈이!”

벌떡 일어나는 대금불.

그때, 혈승이 말했다.

“대륙에서 오신 손님께서는 입이 참 거치시구먼.”

어느새 혈승의 신색은 본래대로 돌아왔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나쁘지 않군.’

혈승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구 발바닥을 핥으면 또 어떤가? 그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길, 우리가 꿈꾸는 길을 걸어갈 뿐이라네.”

“변명치곤 치졸하군.”

“나아가, 빈승은 자네에게 변명이나 하자고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야.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이쯤 해 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내가 네놈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어. 사람 죽이겠다고 저 흉흉한 놈들을 끌고 온 적에게 쌍욕이나 안 박은 게 다행이지.”

혈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가?”

묘하군.

연호정은 생각했다. 참 묘한 고수라고.

혈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소림의 공공대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강하고 올곧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똑같이 무겁고 똑같이 올곧지만, 공공대사의 기운이 정대함으로 가득하다면 이 혈승의 기운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악기(惡氣)로 가득했다.

‘아무리 힘을 추구했다지만, 그래도 부처를 모시는 놈들 아니었나.’

연호정은 문득 혈승의 수염을 바라보았다.

풍성한 잿빛 수염을 세 갈래로 땋았다. 땋은 수염 끝에는 놀랍도록 정교한 악불의 머리를 장신구로 달아 놓았다.

참 별난 취미도 다 있구나 싶었지만, 결국 저 장신구의 형상이야말로 그들이 올바른 불도(佛道)에서 멀어졌음을 뜻했다.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군. 한없이 무겁긴 한데, 또 가만히 보다 보면 연기처럼 가볍기도 하고.’

확실한 것 하나는.

‘맹주님보다 강해. 확실히.’

공공대사는 무극에 오르자마자 쌓이고 쌓인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삼군급의 내력을 손에 넣었다.

이자는 더하다. 깨달음을 떠나, 아주 오랜 시간 무극을 연마한 진짜배기 강자의 자신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최소한 삼군 이상. 제왕급의 무공이다.’

혈승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 고수를 딸려 보냈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이토록 놀라운 고수를 붙일 줄은 몰랐네. 자네의 이름은?”

“연호정.”

연호정은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혈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 동대륙에서 고금을 뒤져도 찾기 힘든 불세출의 천재 무사가 났다고 들었네. 그 젊은 천재는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휘두르고, 파격적인 전술과 무자비한 손속으로 삼교인들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섰다고 하였지.”

“그 동네에도 이쪽 소문이 많이 흘러가는 모양이군.”

“세세한 건 모르지만, 그렇다네.”

혈승이 탄식을 토해 냈다.

“본사에 자네만 한 천재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시끄럽고.”

철컹.

연호정이 어깨에 광룡부를 얹었다.

“싸워야겠나?”

혈승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싸우고 싶진 않다네. 다만 조건이 있지.”

“저 마차에 있는 인간을 양도해라?”

“그렇다네. 역시 짐작하고 있었구먼.”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교 놈들과 손을 잡은 건가? 아니면 그 밑으로 들어간 건가?”

“거기까지는 자네가 알 필요 없지.”

“밑으로 들어갔군.”

“…….”

“무력만큼은 새외의 소림이라 불리는 뇌음사도 다 됐구만.”

혈승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렇게 싸우고 싶나?”

“아니,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나도 조건을 걸지.”

“……?”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다 죽는다.”

가만히 연호정의 눈을 바라보던 혈승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군.”

“하나만 알아 줬으면 좋겠다.”

우우웅.

연호정의 눈에 다시 황금빛 광채가 들어찼다.

“이 싸움은 너희가 건 것이니, 죽어도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죽어도 부처님 곁으로 돌아갈 걸세.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거든.”

“생전에 그런 개소리는 또 처음 듣는구먼.”

시종 여유롭게 말했지만, 연호정은 내심 입맛을 다셨다.

‘빈틈이 없다.’

이런 대화 따위 필요치 않다. 이놈들은 천효락을 납치하기 위해 온 놈들이다. 그리고 이쪽은 천효락과 함께 신마림으로 향해야 한다.

당연히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막원을 괜히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어.’

돌발 기습으로 상대의 힘을 대폭 깎아 낼 요량이었는데, 빈틈이 요만큼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란 말이지?’

저 귀신 가면을 쓴 놈들 뒤에 또 하나의 무극수가 있다.

이 괴상한 땡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판이다. 한데 무극에 오른 고수가 하나 더 있다.

정면 대결이라면 질 이유가 없지만, 자신과 엇비슷한 경지에 오른 자와 싸우면서 또 한 명의 무극수를 상대하긴 어렵다.

‘뭐, 나름의 방비책을 세워 두기는 했지만…… 괜히 쓸데없이 생각이 많았었군. 형님은 아직인가.’

물끄러미 혈승을 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시게.”

혈승은 꽤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연호정이 자신의 빈틈을 찾고 있다는 걸 이미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쉽사리 공격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사실 자체가 상당한 여유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적어도 이 비범한 강자와 싸워 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천리안 같은 주술을 썼나?”

혈승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걸 읽었나?”

“역시.”

연호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자주 쓰지는 못하는 모양이로군. 그래도 얼굴 모르는 누군가가 이쪽을 대놓고 들여다보고 있다는 거,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어.”

“……자넨 정말 대단하군. 위화감을 느낄지언정 술법임을 파악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내 동료 한 사람도 나와 똑같은 걸 느꼈어.”

“동료?”

혈승이 연호정 일행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비범한 고수들이긴 하다만, 술법을 알아챌 정도의 고수는 안 보이는데.”

“따로 보냈지.”

“……?”

“술법가들부터 박살을 내 놓으라고 보냈어.”

혈승이 피식 웃었다.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로다. 그 주술을 쓴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너잖아.”

“……?!”

“알아, 천리안 비슷한 술법으로 우릴 들여다본 게 너라는 것 정도는.”

“안다고?”

“그래.”

“아는데도 보냈단 말인가?”

“이리 마주하기 전까지는 몰랐지.”

혈승의 미소가 진해졌다.

“안타깝군. 그 고수를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훨씬 더 신중해졌을 텐데.”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전략 전술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나도 꽤 오만해진 모양이야. 이런 실수도 다 하고.”

“자네와의 대화가 재미는 있네만, 시간을 더 끌고 싶지는 않군. 하니 마지막으로 묻겠네.”

“싸우자.”

혈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호정이 자연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움찔!

혈승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했다. 기마에서 내리는 연호정에게 기습을 가할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대놓고 몸을 수그리고 내려오는데도 기습이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말을 뒤로 보낸 연호정이 광룡부로 땅을 찍었다.

쿵!

초원 땅에 깔린 먼지가 훅 하고 피어올랐다.

“서로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다면 결론은 싸움뿐이지. 빈틈을 노리고 싶어도 안 보이니, 남은 건 힘 대 힘 아니겠나.”

“결국 이렇게 되는…….”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콰앙!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인 좌수가 금룡번천장을 터트렸다.

혈승의 대응은 눈이 부셨다. 순식간에 같은 좌수를 들어 번천장력을 막는데, 한 줌의 경력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완벽하게 봉쇄한 것이다.

‘역시.’

느닷없이 벌어진 싸움.

빈틈을 노린 것이 아니라, 그저 싸움을 먼저 시작한 것뿐이었다.

‘초전부터 전력을 다한다.’

연호정의 발이 대지를 밟았다.

쾅!

엄청난 진동과 함께 황금빛 찬란한 진기가 불타올랐다.

혈승이 외쳤다.

“놈들을 쳐라!”

동시에 연호정이 움직였다.

단 한 순간에 모든 내공을 다 끌어 올린 연호정이 광룡부를 내리쳤다.

혈음보리신공(血飮菩提神功)을 개방한 혈승은,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

거대한 도끼가 태산이라도 부술 기세로 내리쳐진다.

그 거대함이, 정말이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났다. 정말 산봉우리만 한 양날 도끼가 공기를 불태우며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 압력이 너무 강해서 사지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런!’

너무나도 간단한 동작, 그러나 그 안에 실린 위력은 산이라도 부술 듯 엄청나다.

‘막을 수가……?!’

설마하니 첫 일격부터 혼신의 힘을 다한 비기를 꺼내 들 줄이야.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혈승은 본능적으로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상대의 내공에 대항할 만한 힘을 곧장 꺼내 들지 못했으니, 회피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혈승은 후회했다.

대기를 불태우며 내리꽂힌 광룡부가 자아낸 파괴력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앙!!

대지를 초토화시키는 참격이 혈승이 있던 자리를 넘어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홍나한과 나찰군에게까지 도달했다.

“헉!”

“피, 피해라!”

퍼버버버벅!

거인의 일격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홍나한 셋과 나찰 두 마리가 그 자리에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이놈!’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가한 이후에는 미세하게나마 빈틈이 드러나게 마련.

혈승은 화를 내기 전에 노련하게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순식간에 연호정의 품으로 파고든 혈승이 금강저로 연호정의 옆구리를 찔렀다.

카아아앙!

혈승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괴한 쇳소리와 함께 금강저가 살짝 튕겨 나간 것이다.

“역시.”

번쩍!

어느새 또 멀찍이 물러난 혈승, 그의 가슴에 한 줄기 붉은 선이 새겨졌다.

백룡부였다.

손도 대지 않고 어검의 비술을 활용, 등 뒤 허리춤에 걸어 놓은 백룡부로 혈승을 공격한 것이다.

“네놈 살기가 딱 옆구리더라고.”

우우우웅! 위이이이잉!

어느새 연호정의 머리 위로 떠오른 흑백쌍룡부가 위협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양손에는 광룡부, 머리 위에는 흑백의 쌍룡이다.

압도적인 내공력을 이용한 연호정의 완전 무장이었다.

파아아아아악!

회전하던 흑백쌍룡부가 홍나한과 나찰군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쿠르르릉!

혈승의 주먹에서 무시무시한 권풍이 쏘아졌다. 천하의 연호정도 쉽게 막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달싹였다.

“횡참(橫斬).”

광룡부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연호정과 혈승이 제각기 삼 장 거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폭발의 순간, 연호정은 물러나며 작은 알약을 꺼내 먹었다. 압력에 숨이 답답했지만, 기어이 꿀꺽 삼켜 냈다.

따다다다다당!!

날아간 흑백쌍룡부는 대금불의 권장에 막혀 하늘 높이 튕겨 날아갔다.

“이놈!!”

혈승이 연호정에게 달려들고.

“놈들을 죽여라! 천효락만 살려서 데려와!”

대금불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홍나한과 나찰군이 움직였다.

동시에, 연호정이 소리쳤다.

“가주님!”

쿠르르르릉!!

마차 주변으로 반투명한 흑색 구름이 피어올랐다.

드디어 시작되는 초원에서의 싸움.

흩어진 구름을 비켜 내며 내려다보는 하늘 아래, 악취 가득한 혈전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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