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화. 혈승(血僧) (4)
“허억! 허억!”
격한 싸움이 끝난 후, 이십 리를 빠르게 돌파한 일행은 섬서와 감숙의 경계에 있는 어느 언덕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말에서 내린 연지평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옥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지평에게 다가왔다.
“괜찮나?”
“허억! 헉! 괘, 괜찮습니다.”
“많이 힘들면…….”
“우웨엑!!”
연지평이 그 자리에 엎어져 토악질을 했다.
피가 조금 섞여 있는 물 토였다. 내상의 징후가 보였다.
하지만 연지평이 입은 내상은 결코 심한 게 아니었다. 가벼운 내상, 내가고수인 연지평이라면 사흘 안에 저절로 나을 만한 상처였다.
그럼에도 연지평이 토악질을 하는 것은 내상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옥청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묵비, 당관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경지라면 연지평이 토악질하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의도는 알겠지만…….’
옥청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과연 이 친구가 이겨 낼 수 있을까.’
연지평의 무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차라리 이 나이에 무종을 뚫고 훨씬 더 강력한 검격을 구사했다면 이보다 놀랍진 않았을 것이다.
연지평은 무종을 뚫지 않고도, 무종을 뚫은 고수들도 엄두를 못 낼 기가 막힌 검법들을 구사했다. 그것도 몇 번 치러 보지도 않은 실전에서.
다소의 어설픔은 있었지만, 습격자들과 싸우며 연지평의 검법은 무서운 속도로 정교해져 갔다.
첫 전투에서 이 할의 힘으로 하나를 죽였던 연지평은, 지금에 와선 반 푼도 안 되는 힘으로 너무도 쉽게 적을 격살해 냈다. 상대의 수준이 갈수록 올라갔음을 생각하면,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연지평의 마음이었다.
‘어려울 거다.’
옥청 역시 연지평과 친분이 깊었다. 의정군과 함께 광동성에서 있기도 했고, 같은 검사로서 몇 번이나 대무를 치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아는 것이다. 연지평의 검재(劍才)가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그간 못 본 새에 이 정도로 발전했을 줄은 몰랐지만, 이미 의정군 군병들은 연지평의 재능이 천하를 다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순하고 선한 천성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상케 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야. 하물며 천성이 선하고 곧은 마음을 가진 청년이 삽시간에 수십 명을 죽였으니.’
사람들은 말한다. 강호에 사는 무림인이라면 사람 죽이는 걸 무서워해선 안 된다고.
그것은 일견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녹이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인격이 있는, 당장 다른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사람의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미래까지도 증발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웃으며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 강호인 중에서도 실전에서 사람을 죽인 충격으로 은퇴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연지평은 익숙하지도 않은 살인을 사흘이 넘도록 수십 번이나 저질렀다.
명백한 적이지만, 연지평의 눈에는 그들도 웃고 떠드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툭! 투둑!
옥청의 눈이 흔들렸다.
연지평의 코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내상은 심하지 않지만, 마음이 너무 흔들린 탓에 기(氣)가 역류해 상단까지 침범한 것이다.
‘이런!’
홀로 이겨 내야 한다지만 이것까지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옥청은 서둘러 연지평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혼원기를 끌어 올렸다.
잠시 후.
“후우.”
연지평의 호흡이 단숨에 안정되었다.
옥청이 물었다.
“괜찮은가?”
“예.”
연지평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사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리 말하지 말게. 내 도움은 큰 게 아니야. 자네가 너무 무리한 것이지.”
“무리하지 않았다면 우리 일행이 피해를 보았을 겁니다.”
“…….”
“모두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옥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나와 함께 모두를 지켜 주었어. 그렇게 생각하게.”
“슬픕니다.”
“…….”
“이렇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
옥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안정된 것이 슬프다고?”
“예.”
“그게 무슨 말인가?”
연지평이 힘없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묵비와 당관과의 대화를 끝낸 연호정은 막원에게로 가서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혼원기는 굉장한 무공이로군요.”
“음? 아, 사부님께서 창안하신 거니까.”
“진기 도인 없이도 단숨에 날뛰는 기운을 붙잡았어요. 대단합니다.”
“도가의 신공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역행한다네. 진기 자체가 부동심을 이끌어 내는 데에 특화되어 있거든.”
“그래서 싫습니다.”
옥청은 순간 당황했다.
연지평이 씁쓸하게 말했다.
“제가 역겨웠어요.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보게.”
“기술이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사람 죽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
“그건 결코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한데 저는 더 이상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베었어요. 너무도 쉽더군요.”
“…….”
“그런 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 죽이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 어느새 사람 죽이는 걸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자신에 대한 혐오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랬군.”
옥청이 한숨을 쉬었다.
연지평의 말이 옳다. 사람이 사람 죽이는 걸 이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필두로 한 대다수의 무림인은 살인의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상대가 칼을 들고 날 죽이려 하는데 가만히 맞아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대항해야 하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문득, 옥청은 고민했다. 자신은 살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나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순간에는 칼을 뽑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살검(殺劍).
사람을 살생하는 검. 무당 무공이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옥청이 눈을 감았다.
‘내 검은 더 이상 도검(道劍)이 아니야.’
의정군에 들어간 이후, 천하를 방랑하며 많은 악인을 베었다.
그것은 협(俠)이었다. 정의를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협과 정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도검에서 멀어졌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형님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응?”
연지평은 여전히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형님은 구주명가를 공격했습니다. 만약 그들을 섬멸하지 않았다면 본가는 패가망신했겠지요.”
“……그래, 들어서 알고는 있네.”
“무림맹에 들어와서는 삼교의 세작들을 색출해 냈고, 잔혹한 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적이 죽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형님이 불철주야 적을 찾고, 베고, 승리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의 터전은 불바다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옥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지만, 적도 사람입니다. 저마다 사연 있는 삶을 살았을 겁니다. 형님은 그런 적들을 일고의 고민도 없이 쓸어 버립니다.”
“그것은 결코 소부주가 나쁜 것이…….”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
“저도 형님처럼 단호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지.”
옥청이 미소를 지었다.
“다만, 사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
“무림인은 저마다 자신만의 강호를 안고 살아간다고.”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연 소부주가 품고 있는 강호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또렷하겠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하고 단순해.”
“…….”
“하지만 그렇게 분명해질 때까지, 그 정도로 단순해질 때까지 얼마나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저 사람을 괴롭혔을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네.”
“선이로군요.”
연지평에 검지로 땅에 선을 그었다.
“형님에게는 분명한 선이 있는 것이로군요.”
“그렇다고 생각하네.”
옥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 소부주가 나와 자네에게 혈전을 맡긴 이유가 있네. 나는 그것을 어제 깨달았어.”
“…….”
“그리고 지금 자네를 보니, 연 소부주가 특히 자네에게 무엇을 원했는지도 깨달았네.”
“예?”
옥청이 몸을 돌렸다.
“스스로 생각해 보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자네만의 깨달음으로 드높은 검법을 완성했던 것처럼.”
“…….”
“무공이든 자아(自我)든, 내 힘으로 얻어야 가치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자리로 돌아간 옥청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전투에서 소모된 힘을 다시 비축하기 위해서였다.
한 점 망설임이 없는 행위, 싸움에 지극히 익숙해 보였다.
연지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도 저 하늘은 대책 없이 맑았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지평은 이내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적어도 그는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장 해결되지 않을 고민에 사로잡혀 시간을 소비할 때가 아니라는 것.
반 시진 후.
끼이익.
마차의 문이 열리고 천효락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일행들이 둘러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효락이 입맛을 다셨다.
“부담스럽군요.”
“때가 왔소.”
연호정이 턱으로 저 먼 땅을 가리켰다.
“저곳만 지나면 감숙이오.”
“…….”
“섬서를 지나기 전까지, 굳이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다 알려 달라고 했소.”
“예.”
천효락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사실 여기 계신 분들께 말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전부 말씀드렸지요. 물론 신마림의 전력이나 세부 정황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도착해서 말씀드리면 되는 문제고요.”
“하지만…….”
옥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뭔가가……?”
그때였다.
“조금만 더 쉬고 떠날 것이오. 정 말해 줄 게 없다면 입 다물고 있어도 괜찮소.”
천효락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됐고, 혹시 술법에 대해서 알고 있소?”
“예? 술법이요?”
“그렇소. 전에 말하기로 신마림의 초대 림주가 각종 마공은 물론 술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신마림에도 꽤 깜찍한 술법들이 비치되어 있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술가(術家)의 재목이 아닌지라 깊게 파진 않았습니다.”
“음.”
“한데 술법에 관해서는 어찌……?”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소.”
연호정이 막원을 바라보았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느꼈네. 인기척도 없고 따로 기(氣)의 뒤틀림 같은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 마치 저 하늘 위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살펴보는 것처럼.”
연호정이 천효락에게 물었다.
“술법을 모른다 해도 마공의 뿌리가 같다면 알아차릴 수 있소?”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음.”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까?”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딱 잘라서 그렇다고 하긴 뭐하지만…… 그런 느낌이오. 뭐, 계속 그런 건 아니고 한 번씩 그런 시선을 느꼈소. 느낌이 좀 사이(邪異)하던데.”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 림의 술법이 아닐 겁니다. 제가 알기로 본 림의 술법은 진법과 각종 환영, 혹은 대자연의 힘을 부풀리는 등의 공부가 주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연호정과 천효락이 동시에 말했다.
“소뢰음사로군.”
“소뢰음사일 겁니다.”
천효락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소뢰음사가 석가의 육통(六通)을 실제적인 능력으로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육신통 말이오?”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천리안이라도 쓰고 있다는 건가,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소부주와 백병신군께서 뭔가를 느끼셨다면 아마도…….”
“재미있군.”
“예?”
연호정이 막원을 보았다.
막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왜 날 그렇게 보나?”
“형님.”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 자네 얼굴, 나랑 한판 붙을 때의 표정하고 비슷한데?”
그때, 연호정이 입을 달싹였다. 전음이었다.
막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보게, 아우님?”
“말씀하십시오.”
“난 술법가들하고 싸워 본 적이 없는데?”
연호정이 사악하게 웃었다.
“형님께서 잘 이겨 내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