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화. 혈승(血僧) (3)
“호오.”
풍성한 수염은 불에 타고 난 재의 색깔과 같았다.
그 잿빛 수염을 세 갈래로 땋았는데, 수염 끝에는 엄지 크기의 금빛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하나같이 야차처럼 무서운 표정의 부처 얼굴을 한, 정교하기 그지없는 장신구였다.
주름이 꽤 많은 얼굴. 그러나 두 눈은 맑고 깊었다. 못해도 육십에 가까운 나이로 보이는데도 눈만큼은 어린아이의 순수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대단한 병력을 붙여 줬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흑귀(黑鬼)들이 이리 빨리 스러졌을 줄이야.”
목에 두른 시커먼 백팔 염주가 핏빛 가사를 연신 희롱했다. 비단으로 만든 가사를 스치는 염주의 소리는 뱀의 혓소리와 비슷했다.
가사보다도 훨씬 더 어두운 승복. 행색은 부처를 모시는 승려임이 분명한데, 옷의 색깔이나 장신구가 주는 분위기는 결코 정(靜)하지 않았다.
순수한 눈빛과 그러지 못한 차림새가 주는 기묘한 부조화가 노승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노승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붉은 구슬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 봤자 말단이잖소.”
“물론 그렇지.”
노승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눈빛만큼이나 맑은,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말단이래도 위태(韋駄)의 공부를 익힌 놈들인데 이리 빨리 산화할 줄은 몰랐네.”
“그거 하나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암기를 뿌리거나 그물을 던지는 것밖에 없는 놈들이 아니오?”
“흑귀는 애초에 동쪽 대륙 놈들의 잡술을 끌어와 만든 집단이라네. 놈들의 공부를 더 이해해 보고자 했던 선사들께서 직접 잡아 와 가르친 것이지.”
“그 정도가 대륙 놈들의 한계라면 더 알아볼 것도 없겠소이다.”
“그건 또 다른 문제지.”
노승이 손에 든 물건으로 구슬을 툭툭 쳤다.
그 물건은 금강저(金剛杵)였다. 금강저 중에서도 독고저(獨股杵)의 형상인데, 마치 화려하게 치장된 단검을 보는 듯했다.
“저 잡술을 배운 놈들을 단숨에 격파한 것이 바로 대륙 놈들이라네.”
“그래도 무림맹이라고 나름 고수들을 보낸 것이겠지.”
“말단이라고는 해도 위태의 공부를 이었어. 육십을 헤아리는 흑귀를 이동 중에 저리 쉽게 잡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위태신(韋駄身)을 배웠다고는 해도 절반을 못 익힌 놈들이오. 저 정도는 내 휘하의 나찰들 열 명만 보내도 삽시간에 쓸어 버릴 수 있소.”
“결정적으로.”
순수하기 그지없었던 노승의 동공에 작고 붉은 점 하나가 떠올랐다. 그가 입고 있는 가사처럼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이었다.
“천효락인지 뭔지 하는 놈이 지원 요청을 했다면, 혈불경(血佛境)에 달한 절대고수도 끼어 있을 확률이 높아.”
노승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가 움찔했다.
혈불경이란 곧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서장 무림에도 혈불경에 달한 고수가 꽤 있다. 당장 눈앞의 이 괴승(怪僧) 역시 이십 년 전에 혈불경에 달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괴물들이 서장 무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신장이나 끝없는 평원과 사막, 황야로 가득한 몽골 땅에도 소수나마 존재한다. 나아가 이쪽 세상을 완벽하게 장악한 혈신교에는 혈불경에 달한 괴물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른다.
물론 그 자신 역시 삼 년 전에 혈불의 은총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저 불학무식한 놈들의 땅에 혈불경에 달한 고수가 많다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겠소.”
“그런가?”
“놈들은 성천십삼좌라고 부른다지? 말하자면 혈불경에 달한 놈들이 열셋이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말이나 되오? 변방의 잡술이나 익히는 놈들이거늘.”
“당연히 열셋은 아니지.”
“역시 그렇겠지.”
“그보다 더 많은 걸세. 혈불지경에 달한 자들은.”
“……?!”
“그중에서도 유독 특출난 자들, 혈불경에 도달하고도 더 오랜 수련을 쌓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자들을 놈들은 성천이라 부르고 있다네.”
남자의 눈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혈불경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미물이 이승에서 자신만의 열반을 여는 경지였다. 두 발로 밟고 선 이 땅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몸으로, 기(氣)로 체감하는 깨달음의 경지란 말이다.
그런 지고(至高)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그리 많다는 것을, 그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대뢰(大雷) 역사상 손에 꼽히는 천재라고 칭송을 받으며 마흔 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곳에 닿지 않았던가.
“광혈 쪽에서 들었는데, 성천에 속한 인물 중 하나가 사음을 찾고 있다가 싸움을 벌였다더군.”
“그랬소?”
“혈불경에 달한 고수 둘과도 동수(同手)를 이루길래 사음교주가 직접 나섰다고 들었네.”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결과는 어찌 되었소?”
“당연히 사음교주의 압승이었지. 이미 그 고수는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으니까. 물론 만전의 상태로 붙었다 해도 사음교주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물론 그렇지.”
“다만 그 고수의 무공이 대륙의 무공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것이라 사음교주가 탐을 내더라, 이런 말을 들었다네.”
남자는 대놓고 불쾌한 빛을 내비쳤다.
“그래 봤자 무지렁이들의 잡술에 불과하오.”
노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디 직접 부딪쳐 볼 텐가? 그 무지렁이의 잡술을 쓰는 놈들과?”
“내가 말이오?”
“말했잖나. 천효락을 수행하는 이들 중에 혈불경에 달하는 고수가 포함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정말이오?”
“천효락이 무림맹에 지원 요청을 하러 갔고, 이 길을 다시 돌아오고 있다네. 그 속도도 몹시 빠르지. 이유가 무엇이겠나?”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있다?”
“신마림주의 무공은 삼교주들에 필적한다고 알려져 있네. 광혈은 몰라도, 신화나 사음에 비하면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고 하더군. 물론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
“그런 신마림주가 뇌옥에 갇혀 있으니, 그를 해할 만한 고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니,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신마림주는 대륙 놈들이 마선이라 부르는 존재로, 성천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고수다. 당연히 혈불경에 달한 고수를 보냈을 것이다.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지.’
남자, 대금불(大金佛)이 말했다.
“이곳의 좌장은 혈적신승(血寂神僧)이시오. 신승께서 그리 판단을 내리셨다면, 그저 명령을 내려 주시면 되오.”
혈적신승이라 불린 노승, 사람들이 흔히 혈승이라 부르는 그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자네는 우리 쪽으로 왔어야 했네. 대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마치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처럼 말하는구먼.”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시오.”
대금불은 또 한 번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혈승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 되었든.”
그가 다시 구슬로 눈을 돌렸다.
혈승이 눈을 감고 뭐라 중얼거렸다. 도저히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천축국(天竺國)의 언어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말이었다.
우우웅.
혈승의 몸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치 주술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기운이 검붉은 아지랑이와 뒤섞이며 구슬을 에워쌌다.
대금불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적응 안 되는 기운이야.’
소뢰음사의 무공은 자체적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발전한 것은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소뢰음사는 피에 젖은 부처를 등에 업고 세상을 정화하겠다는 정신 나간 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상대를 짓누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이라도 쓴다. 전략 전술에 능하지는 않지만, 무공 외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기이한 주술도 쓸 줄 알았다.
‘마치 막 죽은 시체가 풍기는 사기(死氣)와 비슷해.’
잠시 후.
우우우웅!
구슬이 붉은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호오.”
눈을 뜬 혈승이 미소를 지었다.
대금불의 눈에는 그저 붉은빛을 토해 내는 기괴한 구슬일 뿐이었지만, 혈승은 그 구슬 안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을 보고 있었다.
세인들이 흔히 얘기하는 신통력(神通力)에 가까운 술수였다. 부처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후대가 만들었다던 육통(六通)의 술수를 실제로 구현한 곳이 바로 소뢰음사였다.
당연히 그 육통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도 천리안(千里眼)과 천이통(天耳通)을 제외하고는 이론상의 주술에 불과했으며, 천안과 천이의 두 주술 역시 어느 정도 조건이 맞아야만 펼칠 수 있었다.
그중 구슬을 통해 천리안의 술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혈승이었다.
“대단하군. 벌써 섬서 땅을 거의 다 통과했어.”
대금불은 깜짝 놀랐다.
“벌써 말이오? 흑귀들이 전멸당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실제로 흑귀가 전멸한 것은 이틀 전이라네. 떠도는 흑귀의 혼(魂)이 윤회전에 도달치 못하고 이곳까지 오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야.”
대금불은 혈승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놈들이 보였소?”
“절반만.”
“음? 그게 무슨 말이오?”
혈승이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성천을 파견하긴 한 모양일세. 놈들의 얼굴 몇몇과 섬서 땅의 끝에 도달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나머지 것은 볼 수 없었어.”
“그게 성천의 존재와 무슨 상관이 있소?”
“혈불경에 도달해 천기(天氣)를 몸에 두르고 있는 자들은 볼 수 없네. 정확히 말하자면 천리안이나 천이통의 주술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게지.”
혈승의 눈이 깊어졌다.
“이것 하나는 알겠네. 한 명이 아니라는 것.”
“……한 명이 아니라고?”
“둘 이상일세. 하나였다면 이렇게까지 캄캄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터.”
대금불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는 도대체가, 혈승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알 것 없네. 깊이 생각할 것도 없고. 중요한 것은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지.”
“정말 혈불경에 달한 고수가 있다면, 흑귀들을 보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소? 정예 흑귀들이라도 제대로 손을 못 써 보고 죽을 텐데.”
“음.”
“와중에 천효락인지 뭔지 하는 놈도 살려서 데리고 가야 하지 않소?”
“그렇지.”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혈승이 툭 던지듯 물었다.
“나찰을 얼마나 데리고 왔나?”
“일백(一百)이오.”
대금불의 목소리엔 떨떠름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백이나 되는 나찰을 데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혈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데리고 온 홍나한(紅羅漢)들은 열여덟이라네. 사질들 불러내느라 고생 좀 했지.”
대금불의 눈이 흔들렸다.
소뢰음사의 홍나한은 대륙 놈들이 소림의 나한들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유명한 이들이었다.
심지어 혈승은 사질이라고 했다. 혈승이 소뢰음사의 전대 장로였음을 생각하면, 그가 부른 홍나한은 당대 방장급 배분의 나한들이란 뜻이었다.
홍나한 열여덟이라면 나찰 일백과 싸워도 승패를 장담키 힘들 터.
“전쟁이라도 하러 오셨소?”
“이 일, 제대로 처리 못 하면 삼교가 대륙을 먹어도 우리가 떼어 먹을 땅이 줄어들 수 있다네.”
“…….”
혈승이 구슬을 큼직한 주머니에 넣었다.
“미리 파견한 흑귀들을 제외하고는 다 불러들여야겠네. 놈들의 체력이라도 깎아 놓으려 했거늘, 별 의미가 없겠어.”
“하면?”
“천천히 즐길 때가 아니야. 이러다가 적의 사기만 높여 주겠구먼.”
순수하기 그지없던 혈승의 눈빛이 점점 포악한 광기로 물들었다.
“다 부르시게. 속전속결로 쳐서 없애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