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화. 혈승(血僧) (2)
일행은 섬서 무림을 무서운 속도로 가로질렀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서 가고 있지만, 지나치게 우회해야 할 경우에는 관도를 찾아 달리기도 했다.
“이봐, 아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적습을 대비해야 하는 건 맞지만, 연호정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막원의 물음에 답한 것은 천효락이었다.
마차 안에서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입니다.”
“그 마음은 알지만, 이렇게 빨리 달리는 것이 인명 피해와 무슨 연관이…….”
“만에 하나 놈들이 섬서로 진입하게 되면, 우리는 놈들과 싸우기 위해 멈춰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사건이 지속되면 섬서를 통과하는 시간이 길어질 테고, 그럴수록 적의 병력은 계속해서 섬서로 들어오게 됩니다.”
“……!”
“그러니 최대한 빨리 청해로 들어가야 합니다. 놈들에게는 무림이나 민간이나 똑같아요. 만약 놈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 기이한 술책이라도 부린다면, 그때는 청해로 가는 시간이 더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청해까지 최대한 빨리 도달해야 쓸데없는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것.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연 소부주?”
“맞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우리의 목표가 ‘신마림’에 고정되어 있는 이상, 피로 관리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력의 상승과 보존.”
“……?!”
“놈들의 정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우리의 이동 속도와 지나온 길을 생각하면 놈들 역시 우리의 전력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오.”
“그렇겠지요.”
“그거면 됐소.”
연호정의 생각을 뉘라서 알겠는가.
어지간하면 자신이 아는 것을 공유했을 것이다. 한데 말하지 않는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는 경우, 혹은 자신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달린 일행이 소화산(小華山) 인근을 지날 무렵.
“아우님!”
“저도 느꼈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꽤 많군.’
오십, 아니 육십이 넘어가는 병력.
“옥청, 지평.”
“예!”
“예, 형님.”
연호정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저곳을 숨도 쉬지 않고 돌파할 거다.”
“예!”
“당연히 놈들도 따라붙겠지. 피로 관리는 물론 가야 할 거리를 생각하면 이 말들이 꼭 필요해. 우리는 자신의 기마와 마차를 지키기만 할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전면의 날벌레들은 알아서 처리하겠다.”
연호정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전방 숲길을 벗어나는 곳. 기감으로 느끼기엔 널따란 평야였고, 평야 너머에 또 다른 길이 있었다.
“처리하고 따라붙어라.”
부탁도, 강권도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부하에게 임무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옥청은 즉각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그였다.
반면 연지평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전원 섬멸인가요?”
“그래.”
“……!”
“누구 하나 살아 있어선 안 된다.”
연지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해 보이겠습니다.”
“좋아.”
잠시 후, 일행은 숲길을 통과하여 평야에 들어섰다.
막원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무공 증진과 경험을 위해 굳이 남겨 둘 필요는 없겠지?”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연호정은 그의 말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앞에 있는 것들은요.”
“좋지.”
순식간에 평야 중앙을 가로질러 또 다른 산길로 접어드는 그들.
그때였다.
파아아악!
사방의 숲에서 숨어 있던 복면인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굉장한 신법이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십여 장을 이동하는데, 내공 수위보다는 연마한 신법 자체가 무척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날아오르자마자 각기 수십 개의 암기와 십여 개의 그물을 뿌려 댔다.
막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애송이들.”
손에 쥔 칠 척 길이의 철봉이 부르르 떨렸다.
“꺼져라.”
막원이 전방으로 철봉을 찔러 넣듯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무시무시한 발경이 회오리치며 숲길 앞, 허공에 있던 암기와 복면인들 십여 명을 통째로 분쇄해 날려 버렸다.
눈에 보이는 형형한 색의 진기나 공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기공의 흐름도 없었다. 그저 한 번 휘둘러 전방과 허공의 적들을 모조리 휩쓸어 버렸다.
‘강하다.’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이전에는 보여 주지 않았던 힘인데.’
무형의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가 돌풍을 일으키며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도 고요한 무공. 그러나 그 결과는 반경 오 장 이상을 뒤덮으며 적을 분쇄해 버린다.
따다다다다당!!
수백, 수천 개의 암기가 일행을 노리고 쏟아졌다.
그리고 많은 암기들을, 일행은 너무나도 손쉽게 쳐 내고 있었다.
전방 돌격조인 부선과 패율은 제각기 권장과 창검의 방벽으로 암기들을 튕겨 내고 그물을 찢었다.
연호정의 광룡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기마는 물론 마차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기의 방벽을 쌓아 모든 암기와 그물을 튕겨 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군 중 다친 사람은 물론 암기에 긁힌 사람 하나가 없었다.
쿠르르릉!
순식간에 숲길로 진입한 일행.
복면인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그들을 뒤쫓았다. 하나는 숲길, 나머지 둘은 좌우 숲을 타고 가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촤아아아악!
강한 폭음이나 사나운 쇳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좌측 숲에서 솟구친 옥청의 검이 유려한 움직임을 발했다.
퍽! 퍽!
강렬한 검풍이 휘몰아치며 복면인 넷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혼원기를 바탕으로 한 무당의 비기, 태극혜검(太極慧劍)이었다. 초식보다는 깨달음이 더 우선시되는 태극혜검은 옥청의 손에서 차분한 필살의 검공으로 재탄생되었다.
쩌저저저정! 서걱!
또 한차례 쏟아지는 암기와 화살들이 검풍의 흐름에 휩쓸려 원을 그리다가 땅에 떨어졌다.
작정하고 휘두른 태극혜검의 방어식이었다. 혼원기를 쏟아부어 거대한 검기원진(劍氣圓陣)을 발동, 자신은 물론 후미의 당관과 묵비까지 보호하는 기가 막힌 기예였다.
옥청은 내심 깜짝 놀랐다.
‘더 넓어졌다.’
기막의 범위가 넓어지고, 강도 역시 세졌다.
혼원기의 수준이 올라가니 검으로 풀어 낸 발경 자체의 위력도 올라간다. 지금껏 십(十)의 결과를 내려면 팔(八)의 내공을 쏟아부어야 했는데, 이 정도면 오(五)의 내공으로도 충분할 듯싶었다.
옥청의 공격과 방어가 인상적이었다면, 연지평의 검법 역시 굉장했다.
쩌저저저저정!
화려한 기공도, 깨달음이 엿보이는 검풍도 필요 없다.
연지평이 휘두르는 검은 빠르고 정교했으며, 예리하고 강했다. 검(劍)이 가지고 있는 모든 움직임과 기예, 속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데, 그의 검막을 뚫어 내는 암기가 하나도 없었다.
‘정통이구나.’
힐끔 연지평의 검법을 본 옥청은 내심 깜짝 놀랐다.
‘대수님과의 수련으로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건 알았지만.’
모용우와의 대련, 그리고 검을 향한 끊임없는 궁구.
연지평의 검은 정검(正劍)이었다. 올바르고 곧으며 기본기에 충실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정직한 검법이었다.
하지만.
서걱!
복면인 하나를 베어 넘긴 연지평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검법과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기(氣)가 흔들렸다. 기가 흔들렸다는 것은 곧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 명백한 적이라고는 하나 느닷없이 튀어나온 초면의 이들을 베어 넘기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도와줘야 하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옥청은 이내 자신이 맡은 영역에 집중했다.
‘도와줘선 안 돼.’
치리리링! 퍽!
복면인 하나의 목을 꿰뚫은 검이 순식간에 궤도를 틀어 자신을 지나친 적 둘의 허리를 갈라 버렸다.
옥청의 검은 단호했다. 부드럽고 끊김이 없는 검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적의 목숨을 취했다.
몸을 돌린 채 뒤로 뛰면서 이토록 효율적으로 적을 베어 넘기는 그의 검은 분명 전검(戰劍)이라 할 만했다. 숱한 싸움터에서 얻은 생사의 검, 무당의 검법이 이렇게나 효율적으로 적을 살상할 수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흔들리지 말자.’
옥청의 빼어난 검결을 보며, 연지평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머뭇거려선 안 돼. 이들은 적이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든 가리지 않았든, 이들을 놔두면 내 사람이 죽는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사람 목숨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하게 여기는 이들이라는 걸.
‘이건 싸움이야. 수련이나 대련이 아니다.’
연지평의 자세가 낮아졌다.
‘나는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했구나. 형님이 왜 이들을 처리하라 했는지 알 것 같아.’
앞으로의 길은 수라(修羅)의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형님은, 이런 길을 헤아릴 수 없이 돌파하며 지금의 위치에 도달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해야 하니까 하는 거다.’
우우우우우웅!!
서늘한 검극사기가 연지평의 온몸을 뒤덮었다.
말을 몰고 가던 연호정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거다.”
번쩍! 서걱!
거대한 반월을 그린 일참(一斬)의 검법.
그 일격에 복면인 여섯의 몸이 횡으로 갈라졌다.
벼락처럼 빨랐지만, 삿되거나 파괴력이 넘친다는 인상은 없었다. 그저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무공처럼 느껴졌다.
철검대연 삼십육식(鐵劍大衍三十六式) 중 하나인 참월정검(斬月貞劍)이었다.
빼어난 위력, 놀라운 검기였다.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관은 연지평의 검기를 느끼고는 꽤 놀랐다.
“저 애송이가 저런 비범한 검법도 알고 있었나?”
연호정이 말했다.
“철검대연입니다. 본가의 삼대검법 중 하나로, 위력은 가장 떨어지지요.”
“떨어진다고? 보통 강한 검법이 아닌데?”
“무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무공을 해석한 사람의 깨달음과 무위가 중요하다는 걸 지평이 깨우친 겁니다.”
발경을 쏟아 내는 구결을 얼마나 빠르고 위력적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상승 무공이 될 수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군자팔검세나 아수라팔검에 비하면 철검대연은 분명 파괴력이 떨어지는 검법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검의 묘리를 담은 철검대연의 초식 하나로, 연지평은 짓쳐들어오는 적 여섯을 일시에 죽일 수 있었다.
구결이고 발경이고를 떠나, 이미 자신만의 깨달음을 녹여 저만의 검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무공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내 손에서 펼쳐지는 철검대연은 군자팔검세 못지않은 무공이 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지평의 진짜 실력이며, 연호정을 따라다녔다면 얻지 못했을 안목의 실체였다.
연호정이 외쳤다.
“마무리하고 따라붙어! 최대한 체력을 온존해야 한다!”
퍼퍼퍼펑! 퍽!
무수한 폭음과 깔끔한 격타음.
옥청과 연지평은 점차 거리를 좁혀 가다가 절묘하게 위치를 맞바꾸며 마지막 적의 목숨을 날려 버렸다.
파아아악!
두 사람이 마차 옆을 달리는 말 위에 내려섰다.
“숨을 가다듬어라.”
칭찬 따위는 없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내야 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말했다.
“우리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함도 있겠지만, 놈들은 끝까지 따라붙었어. 죽음의 공포가 없는 놈들이다.”
“그 말은……?”
당관이 얼굴을 굳혔다.
“물량전이로군.”
“이쪽의 피로를 최대한 누적시킬 작정인 듯합니다.”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나온다고?”
“서장에 미친 놈들이 많다면서요?”
“그랬었지. 하지만 벌써부터 이렇게나 병력을 소모하다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시죠.”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싸우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