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5화. 혈승(血僧) (1)
“괜찮으냐?”
“그럼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아. 애비 혼자서도 괜찮다니까.”
군사부 안이지만 지금은 둘밖에 없다. 딸을 대하는 제갈문호의 얼굴은 자애로 가득했다.
제갈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만큼 빠르진 않지만, 그래도 둘이 하는 게 더 낫잖아요.”
“빠르지 않기는. 엄청난 속독이구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조금 쉬다가 할까요? 제가 찻물을 끓일게요.”
“허허허, 그래. 그러도록 하자.”
잠시 후, 방 안에 향긋한 다향이 퍼졌다.
“후우.”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제갈문호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일었다.
“힘드시죠, 아버지?”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다더냐? 사람은 다 각자의 힘든 일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법이다. 유별나게 굴 것 없어.”
“그래도 좀 쉬엄쉬엄하세요.”
“허허, 알았다.”
“초대 맹주가 임명된 지 보름이 지났어요. 무림맹으로 수많은 무인이 몰려오고 있는데, 그중 머리 똑똑한 사람이 하나도 없겠어요?”
“응?”
“손과 발이 되어 줄 군사들을 더 뽑으시라는 얘기에요.”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착수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한계라서 말이야.”
“잘하셨어요.”
“왜? 너도 한자리해 볼 테냐?”
제갈아연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저는 아직 의정군의 군사거든요?”
“허허, 그렇지.”
제갈문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하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우리 소가주는 어디 있느냐?”
“거처에 있겠지요. 무공 수련하느라 바쁠 겁니다.”
“음? 새삼?”
“우글거리는 강자들을 봤잖아요? 자극이 될 만도 하죠.”
“하기야.”
“게다가 그 싸움.”
제갈아연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호정과 일호무상(一號武相)께서 벌인 비무가 녀석의 가슴에 불을 붙인 모양이에요.”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종이배를 만드는 녀석이 대함선(大艦船)을 꿈꾼단 말이냐.”
“다들 종이배도 못 만들던 때가 있었잖아요? 목표로 하는 산이 높을수록 더 열심히 하겠지요.”
“쯧, 그럴 녀석은 아니다만 괜한 호승심에 마음만 급하게 먹을까 두렵다.”
“이미 어른이 다 됐던데요, 뭘. 괜찮을 겁니다.”
“하하, 그렇지. 너희도 이제 어른이지.”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 보는지 모르겠다.
껄껄껄 웃음을 토해 내면서, 제갈문호는 생각했다. 역시 가족이 최고라고.
부모든 형제든, 처든 자식이든 가족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숨겨야 하는 제갈문호에게 있어 가족은 유일무이한 안식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찻잔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아연아.”
“네.”
“몇 년 있으면 너도 서른 줄이구나.”
“그렇지요?”
“혼인할 생각은 없느냐?”
찻잔을 들던 제갈아연의 손이 멈칫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지난날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매파 때문에 고생한 너에게 이런 말은 속만 시끄러워지는 얘기일 테지. 애비도 쉽게 꺼내기 힘든 주제다.”
“네, 알아요.”
“다만…… 애비는 그저 너와 준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공허한 미소였다.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애비는 세상 누구보다도 잘난 내 딸한테 어울리는 집안을 하나 찾았다.”
“…….”
“정중하게 매파를 보내고 싶은 곳이 있어.”
“아버지.”
“다만, 네가 싫다면 애비도 절대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세상이 거칠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 혼인하는 일이 흔하다지만, 그래도 난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살았으면 싶다.”
“…….”
“어떠냐? 혼인할 생각이 있느냐? 아니면…… 따로 마음에 둔 사내라도 있느냐?”
이런 순간에 할 말은 아니라고, 제갈문호는 생각했다.
동시에, 이런 순간이 아니면 말할 때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딸이 심란해할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갈문호는 그조차도 미안했다.
“…….”
제갈아연에게선 말이 없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마음에 둔 사내가 있더냐?”
“아니요. 없어요.”
“그러냐.”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모른다? 그 말은 진정 몰라서 뱉은 말이 아닐 것이다.
사내든 여인이든, 어지간히 직설적인 성격이 아니고서야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좋다고 말할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 젊을수록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일부러 아닌 척, 관심이 없는 척 과한 언행을 일삼기 마련이다.
제갈문호는 제갈아연이 유일하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 했다. 짐작, 아니 확신하고 있지만, 또 딸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나중에.”
제갈문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중에, 네 마음이 잘 정리되면 그때 말해 주거라. 애비는 언제라도 기다릴 수 있다.”
“…….”
“하지만 상대가 기다려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만 잊지 말거라.”
복잡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보던 제갈아연이 이내 히죽 웃었다.
“됐네요. 저는 그냥 아버지랑 같이 살래요.”
“일없다, 이놈아.”
“왜요? 이렇게 똑똑하고 예쁜 딸이 뒷바라지해 드린다니까요?”
“죽을 때까지 뒷바라지해 주는 딸보다 죽을 때까지 안 찾아와도 되니까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딸이 더 보고 싶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거든.”
“돌아가실 때까지 안 찾아오면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실 거면서.”
“이놈의 자식이? 야, 이놈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연히 한 번씩 찾아오고 그래야지! 애비 죽을 때까지 낯짝 한 번 안 보여 주는 자식이 정상이냐?!”
그때였다.
문밖,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군사님! 급보입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돌변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무사가 돌돌 말린 서신을 건넸다.
제갈문호가 곧바로 서신을 펼쳤다.
잠시 후, 그의 눈이 흔들렸다.
“이게 사실인가?”
“구 할 이상의 신뢰성을 보장한다고 합니다.”
“이런……!”
서신을 쥔 제갈문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당장 무성전에 연락하거라! 맹주님을 뵈어야겠다.”
“예!”
제갈아연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새외 무림이 움직였다. 현재 일부 병력이 중원으로 향하고 있어.”
제갈아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삼교가 벌써?!”
“아니, 삼교가 아니다.”
제갈문호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서장 무림(西藏武林)이다.”
“서장?!”
“빌어먹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대충 장포를 걸친 제갈문호가 외쳤다.
“아연이 너는 거처로 돌아가거라! 이후 따로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 * *
두두두두.
섬서의 산길을 내달리는 일행의 속도는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그 험한 산길을 달리는데도 말들은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신마림에서 영약을 먹여 키운 말들이었고, 일행이 탄 말들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명마들이었다.
평지는 물론 산악이라도 무리 없이 달린다. 놀라운 지구력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사삭!
당관이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가지!”
“예, 알고 있습니다.”
저 멀리 숲에서부터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내공에 비해 경신술의 경지가 무서울 정도로 깊은 자였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허리에 세 개의 매듭을 달고 있는 중년의 거지였다.
“당가주님을 뵙습니다!”
평범한 말보다 훨씬 빠르고, 체력도 몇 배는 더 좋은 말들과 나란히 달리면서도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두 개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는 무림맹에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숙 난주 지부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섬서의 분타주가 감숙에서 보낸 서신을 직접 가지고 왔다.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당관이 서신을 받았다.
거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훅!
재차 저 멀리 숲길로 사라지는 개방 분타주.
“받아.”
연호정은 더 이상 무림맹 소속이 아니었다. 그래서 분타주는 당관에게 서신을 건넨 것이다.
당관은 그중 난주 지부에서 온 서신을 연호정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빠르게 서신을 펼쳐 읽었다.
“이런……?!”
당관이 외쳤다.
“서장 무림이 움직인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사천 무림은 다른 지역보다 외세와의 싸움에 익숙했다.
사천 자체가 거대한 분지를 둘러싼 험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도 쉽게 넘어올 수가 없다.
즉, 사천을 노리고 넘어온 외세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사천 무림인들은 그런 작자들과 싸워서 이겨 온 것이다.
당연히 당가도 서장 무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개방에서는 무슨 연락이 왔느냐?”
사라락.
서신을 접은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수상한 무리가 감숙을 가로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대다수가 흑의를 입고 있지만, 그중 시커먼 묵주를 목에 두르고 피처럼 붉은 가사를 걸친 괴이한 승려들도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피처럼 붉은 가사.
당관의 눈이 흉흉해졌다.
“소뢰음사(小雷音寺).”
불법을 이은 뇌음사가 서역과 동방의 무공과 술법을 받아들인 후 변질되었으니, 그러고도 불법에 매진하는 이들이 속한 곳이 대뢰음사이고 힘에 취해 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이들이 소뢰음사이다.
소뢰음사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중원에 소림이 있다면 새외에는 소뢰음사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다만 서로가 사는 곳이 너무나 멀어서 실제로 부딪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럼 이건……?!”
“예.”
연호정의 동공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에 가까운 이중 침투입니다.”
“이중 침투라면, 설마 전에 네가 말했던 광혈교 아닌 놈들이……?”
“이쪽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천 공자를 생포하기 위해 고수들을 보낸 것이지요.”
“이것들이……!”
“저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전력도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닐 겁니다. 무림맹의 시선을 붙잡아 둬야 할 테니까요. 그 수가 무척 많겠지요.”
“하면?”
“우리 쪽으로 오는 무리 중 막강한 고수들이 있을 겁니다.”
이쪽을 노리고 온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연호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차디찬 미소였다.
‘역시 그랬군.’
신마림의 대공자가 광혈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는 천효락을 잡기 위해 고수를 파견했다.
한데 이 시점에 서장 무림이 움직이고 있단다.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삼교 놈들, 예상대로 서장 무림까지 장악하고 있었어.’
짐작은 했지만, 진짜라고 확인이 되니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삼교 대 중원이 아니다. 새외 무림 총 전력 대 중원 무림의 총 전력이다.’
회귀 전, 사음교의 난이 터졌을 때는 오직 삼교만을 주시했다. 그들만 물리치면 중원이 본래대로 회복될 거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이 싸움은 처음부터 중원과 새외의 목숨을 건 총력전이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외쳤다.
“더 빠르게 돌파합시다! 만에 하나 적의 습격이 있다면 확실하게 섬멸하고 갈 것이니,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콰르르릉!
일행이 지나간 대지에 희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마치 난전 중에 휘날리는 황야의 먼지바람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