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화. 마도의 고향 (6)
잠시 정적이 일었다.
일행 모두가 충격을 받았지만, 그중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이라면 단연코 삼교를 무너트리는 걸 천명(天命)으로 삼은 연호정일 것이다.
일행들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는 연호정은 삼교의 인물이라면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잡아 죽이는, 말하자면 박멸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직 짤막한 정보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특히나 그의 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삼교와 싸워 왔던 묵비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호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놀랐지만, 천효락을 향한 증오나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신마림이 광혈교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라…….”
증오로 치자면 광혈교 놈들에게 사천을 유린당한 당관 역시 누구 못지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의 동생은 광혈교와 손을 잡고 사천을 유린한 걸 넘어 당가를 무너트릴 뻔했다.
사아아아악!
당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차앙!
살기에 반응한 화향이 본능적으로 칼을 뽑은 채 천효락 앞에 섰다.
“이건 또 퍽 흥미로운 얘기로구만.”
당관의 머리카락과 의복이 마치 물속에 있기라도 한 양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제왕독공이 풀려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주변에 일행이 없었다면, 당관은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로 인해 독공을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가 광혈교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라고?”
“그렇습니다.”
천효락의 표정은 연호정의 그것처럼 담담했다.
“……큭큭큭.”
고개를 숙이며 웃는 당관.
당관의 살기는 음험하고 악랄했다.
그간 숱한 사건을 겪으며 많이 달라진 그였다. 하지만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당씨의 피에는, 은혜는 갚지 않아도 원한만큼은 열 배로 갚는다는 지독한 배타주의의 힘이 녹아 있었다.
“광혈…… 광혈이라?”
부르르.
당관의 주먹이 희미하게 떨렸다.
위험을 감지한 묵비가 벌떡 일어났고, 패율이 눈을 빛내며 단창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재미있군.”
훅!
당장이라도 일대를 맹독의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당관이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여유 있게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네놈 낯짝이 영 마음에 안 들더라니, 역시 내 직감이 맞았구만.”
“…….”
“계속 읊어 보거라.”
천효락의 눈이 반짝였다.
당관이 작정하고 손을 썼다 해도 자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냉정을 고수하고 있는 연호정과 막원이 막아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당관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냉철하게 제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광혈교는 사천당가의 철천지원수다. 그 독한 흑도 무림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집단이 당가인데, 광혈교는 당가의 수뇌부를 회유하여 당가를 시작으로 사천 자체를 무너트리려 했다.
당가의 피를 이은 자라면, 당가의 옷을 입고 당가의 배움을 받은 자라면 광혈교의 멸망을 위해 목숨을 불태울 것이 자명할 터.
그중 정점이라는 당관이 이만한 냉정함을 보여 주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구나.’
처음 당관과 당관의 동생을 보았을 때만 해도, 동생보다 당관이 더 감정적으로 불안할 거라 유추했다.
틀렸다.
지금 무림맹에 남아 있는 당가의 이가주, 당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슬픔 속에서도 몇 년을 와신상담하여 당가 탈환의 마지막을 장식한 수완가였다.
그러나 당관 역시 그에 못지않다. 아니, 지독한 경험을 쌓고 올라온 지금의 당관은 천성마저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인물이 되어 있었다.
“향아.”
“……주인님?”
“걱정 마라. 뒤로 물러나.”
화향이 긴장한 눈으로 당관을 주시하며 물러났다. 뽑은 칼은 여전히 꼭 쥐고 있었다.
천효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 림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싶지만, 그걸 말하기 위해서는 광혈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껏 고민했던 이유입니다.”
“…….”
“솔직히,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주님과 군사님의 조언을 곱씹어 보니,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잡설이 길군.”
“알겠습니다. 이어서 말하도록 하지요.”
천효락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두 곳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광혈교는 대대로 자식이 귀했습니다.”
정확히는 광혈교주, 천씨의 혈육이 귀하다는 말이었다.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고대(古代)에서부터 내려와 극에 이르도록 발전한 마공의 폐해라고들 짐작하지만, 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중요한 건 한 대(代)에 자식이 귀했고, 하여 대대로 교주는 많은 마후(魔后)와 마비(魔妃)를 거느렸다는 것입니다.”
“…….”
“그러고도 넷 이상을 낳은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많으면 셋, 적으면 하나였지요.”
“그래서?”
“그 현상은 대를 이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특히 삼백 년 전부터는 꼭 아들 한 명만을 얻었지요.”
연호정은 마공의 부작용을 떠올렸다.
마공은 여러 부작용을 안고 있다. 그것은 저급한 마공일수록 심해지며, 최고급 마공이라고 부작용이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삼백 년 전 혈교(血敎)에 가장 가깝다는 광혈교라면, 더 심한 부작용을 안고 살아왔을 것이다.
“본디 삼교는 혈교를 이루는 세 개의 지파로, 하나의 종교 집단이 아닌 사제(司祭) 가문들이었습니다. 암암리에 분열된 종교임을 내세웠지만, 총교주(總敎主)인 혈교의 신(神) 앞에서는 감히 불만을 내세울 수 없었지요.”
“그랬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걸 보면 삼백 년 이전에도 광혈교는 존재했다는 건데, 삼교는 삼백 년 전 혈교지란으로 분열되었다고 들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지.”
“예. 삼백 년 전에 나뉜 게 아니라, 본래 그 세 가문이 혈교를 지탱하는 사제 가문이자 귀족 가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데 이백 년 전, 문제가 생겼습니다.”
“……?”
“아들 하나를 얻은 교주가, 이십 년 후 또 하나의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개 같은 놈들이 좋아서 축제라도 벌였겠군.”
“아니지요.”
“뭐?”
“축제는커녕 교단이 흔들릴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부선이 작게 중얼거렸다.
“후계자 싸움.”
천효락이 부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십 년 차이…… 첫째는 이미 다 성장한 건 물론 후계자 교육까지 철저히 받고 있었겠구만.”
“그렇습니다. 더 큰 문제는, 둘째로 태어난 아들의 재능이 첫째를 훌쩍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개중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라로 치면, 그럭저럭 괜찮은 황태자가 나타났는데 그 뒤로 태어난 아들이 성군이 될 재목으로 판명 난 것이다.
“교주는 고민했습니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요. 둘째가 이대로 성장하다가 내분이라도 터지면,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광혈의 역사가 끝장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정도로 끝장이 날 수가 있을까?
가능하다. 내분도 내분이지만, 옆에서 경쟁자인 사음과 신화가 호시탐탐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교주는 결국 둘째 아들을 쫓아내 버렸습니다. 차마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는지, 시종들과 약간의 병력을 붙여 외부로 보냈지요.”
당관이 피식 웃었다.
“마귀 놈이라도 제 새끼는 위할 줄 알았군.”
“물론 후계자는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인 교주 몰래 제 부하들을 풀어 어떻게든 제거하라고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패했군.”
“만약 그 둘째가 천재가 아니었다면 잡혀 죽겠지요.”
“…….”
“둘째의 재능은 상식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세 살 때 이미 마공서를 독파하고, 열 살이 되기도 전에 광혈의 마공 대다수를 외우고 해석할 정도로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열둘에 들어서는 무공을 넘어 술법까지 통달하게 되었지요.”
당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 둘째는 진정 하늘이 내린 인재였다.
“시종들과 어찌어찌 도피한 둘째는 청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광혈은 물론 사음과 신화 또한 절대 발견할 수 없도록 산에 들어가 거대한 진법을 구축, 자신만의 거처를 완성했지요.”
“그곳이 신마림(神魔林)의 시작이군.”
“그렇습니다. 그분이 바로 신마림의 시조, 천요명 림주님이십니다.”
신마림이 광혈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신마림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광혈이 얼마나 독하고 집요한 집단인지, 시조께서는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대(代)를 이어서도 신마림을 찾을 거라고 확신하셨지요.”
“음.”
“만약 신마림이 발견되어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 뒤라면 후손들의 살길은 마련될 것이다. 그것이 시조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천효락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다. 담담하고 깊었다.
“당대 림주이자 제 스승이며, 아버지라 불러 본 적 없는 아버지께서는 바로 신마림의 육대 림주(六代林主)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신마림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천효락이 진정 알려 주고자 했던 본론의 시작이었다.
“대사형은 천씨가 아닙니다. 제 스승님께서는 림의 선조들과 달리,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후계가 될 수 있다고 천명하셨지요. 그것이야말로 신마의 마도(魔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흐음.”
“대사형뿐이 아닙니다. 제 바로 윗줄인 사저와 다섯째 사제도 천씨가 아니지요. 천씨는 저와 넷째 사매 둘뿐입니다.”
남매인데도 사제지간으로 호칭하는 그들의 문화는 꽤 독특해 보였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서? 대사형이 신마림을 손에 넣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냐?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미친 척 그 대사형을 모함하고 무림맹 병력을 얻어 낸 건 아니겠지?”
천효락이 고개를 저었다.
“보시다시피 제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런 몸으로 림주 자리에 올라 봤자 제대로 이끌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사매라면 모를까요.”
“재미있군. 해서, 그 대사형이라는 놈이 반역을 일으키고 림주를 사로잡기라도 했단 말이냐?”
“차라리 자체적으로 힘을 모아 쳤다면 다행입니다. 물론 그랬다면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겠지요. 스승님의 무공은 절대적이니까요.”
“……그럼?”
“스승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잡혀 있을 뿐이지요.”
천효락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사형이 광혈을 끌어들였습니다.”
“……!!”
“광혈에서 먼저 접근한 건지, 대사형이 먼저 접근한 건지는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대사형이 자신을 따르는 마인들은 물론 광혈의 힘까지 안고 신마림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관의 몸에서 다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때만큼은 연호정 역시 담담함을 고수하지 못했다. 살기는 흘리지 않았지만, 두 눈 가득 무시무시한 한기를 담은 그의 모습은 흑암제와 닮아 있었다.
천효락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신마림을 이끌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스승님, 아니 제 아버지를 구해 주십시오.”
“…….”
“아버지께서 풀려나신다면…… 신마림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