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91화 (891/963)

891화. 마도의 고향 (4)

묘한 눈으로 모용군을 보던 양천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녀석을 도와 달라?”

“당연한 것 아니오?”

“당연하다…….”

“연호정의 능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소. 무공도, 지략도, 안목도 모두 무림 정상급이라 할 만하오.”

“실제로 그 멋들어진 능력으로 무수히 많은 사건을 해결했지.”

“그걸 믿고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오. 녀석이라면 해내겠지, 이번에도 성공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는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녀석과는 앙숙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그렇소.”

“한데도 내게 녀석을 도와 달라 말하는 것인가?”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람을 보내셨군.”

양천은 살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당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들을 줄 아는 사람.

듣기에 따라서 참 흡족할 수도, 조금은 떨떠름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굳이 말을 돌릴 필요가 없는 순간이었소. 한데도 너무 담담하더군.”

“허어.”

“고수진은 충분한 듯하니, 아마 부대 단위의 전력을 보냈을 것 같은데.”

또 한 번 묘한 눈으로 모용군을 보던 양천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녀석 말이 맞았군.”

“그 녀석이 누구요?”

“호정 말일세. 모용가주의 지혜와 안목이 실로 대단하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네. 사람을 보낸 것까지야 눈치챌 수 있다지만, 부대 단위 전력을 보낸 것까지 꿰뚫어 본 것은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야.”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보냈다면 되었소. 하기야, 그 정도 정치 관계도 모르실 정도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니까.”

꽤 건방진 말투였다. 백서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하지만 양천은 모용군의 건방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을 문제 삼고 싶었다면 진즉에 말투부터 고치라 했을 것이다.

오히려 양천은 모용군에게 흥미를 느꼈다.

단순한 흥미 이상의 흥미, 이 건방지고도 능력 좋은 작자와 뭔가 일을 벌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남에 모용세가가 있지.”

“그렇소.”

“모용세가를 위해서도 직접 찾아온 것 아닌가.”

“그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소.”

묵룡부의 전력을 생각하면, 모용군 입장에서 가문은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묻고 싶군.”

“말씀하시오.”

“모용세가는 무림맹 소속인가, 아니면 따로 떨어진 가문인가?”

“당연히 무림맹 소속이오.”

“그렇군.”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네. 자네 가문이 무림맹에서 떨어져 나왔다면, 서슴없이 우리 쪽으로 붙으라고 제안했을 터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리고 의미 없는 말이기도 하오.”

“의미가 없다?”

“무림맹과 묵룡부는 동맹을 맺었소. 그리고 부주께서는 황제 폐하의 부마도위가 되어 황궁과 무림이 손을 잡는 교각이 되려 하오.”

“…….”

“세상은 하나가 되어 가고 있소. 그런 마당에 또 다른 대문파를 흡수하겠다고 나서는 건 썩 좋지 못한 발상이외다.”

“자네도 알 텐데. 세상이 진정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당연하오.”

“훗날을 위해 가치 있는 자들과 손을 잡고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본능이 아닌가?”

모용군이 술이 찰랑이는 잔을 내려놓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

“설마 진심이셨소?”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양천이 피식 웃었다.

“반쯤은 그랬네. 자네가 이토록 멋들어지게 개화(開花)할 줄은 몰랐거든.”

“부주께서도 많은 걸 포기하고 하나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중이라 들었소.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사람 성격이 어디 가진 않는 모양이오.”

“평생을 그리 살았으니 별수 있나. 다만 별 미련을 갖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양천이 검지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래, 이런저런 일로 예까지 오시긴 했지만 진짜 본론은 따로 있겠지. 그게 무언가?”

“혹시 묵룡부에 세작을 전문적으로 잡아내는 부대가 있소?”

“음?”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부대가 따로 있지는 않네. 안목 좋은 무인들은 많지만.”

“본 연합에는 있소.”

“허?”

“나는 강서 연합을 내 지지 기반으로 삼을 생각이었소.”

“그랬군.”

“당연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 여론의 힘이든 자금력이든, 이들의 정체가 까발려지면 그간 쌓아 온 내 힘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랬겠어.”

고개를 주억거린 양천이 물었다.

“한데 그것이 왜?”

“짧은 시간 안에 전문적으로 세작을 잡아낼 안목을 키울 방법이 있소. 정확히는 내게 있는 게 아니라, 잘 가르치는 교관이 있지.”

“……?”

“그 부대와 교관을 이곳으로 파견할까 하오. 하니, 세작 색출 부대를 따로 만들어 주시오.”

“세작 색출 부대?”

“그렇소.”

양천이 말없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물론 교육 자금은 전부 우리가 대겠소. 사상자는 어쩔 수 없소만.”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세작 색출 부대는 왜 만들려고 하나? 아니, 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가?”

“강서 상무 연합의 전력은 대문파를 상회하오. 그러나 그것은 자금력과 영향력 등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의 평가일 뿐, 순수한 무력은 구파의 하나를 겨우 감당할 정도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

“아직 하나가 되지도 못했소. 결정적으로 중견 고수층이 부족한 실정이외다.”

“흐음.”

양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즉 자네 말은, 일정 이상의 무력을 보유한 고수급으로 구성된 색출 부대를 꾸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소.”

“이유가 뭔가? 너무 갑작스러운데.”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부주께 묻고 싶소. 지금 무림에, 삼교의 세작이 정말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소?”

“…….”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이 드넓은 천하에 삼교의 세작이 단 하나도 없을 거라 장담하냐고?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하네.”

개방과 흑도 정보단의 의견이 일치를 보았다. 당장 활동할 만한 삼교의 세작은 없을 거라고.

말하자면 눈에 띌 만한 세작 활동은 절대 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무림 최고의 정보단 두 곳에서 같은 의견을 냈다면, 필시 그렇게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작이 하나도 없느냐고 한다면,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못할 뿐이다. 전 무림이 삼교를 알게 되었고 그들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적이라는 걸 실감한 지금, 섣부르게 세작 활동을 하다가 걸리면 그야말로 치명적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삼교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연히 공략해야 할 곳의 민심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터.

그럼에도 세작을 풀어는 놓았을 것이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서.

“훗날을 대비해야겠지. 먼저 공략하는 저쪽 입장에서 세작이나 첨병을 침투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네.”

“당연히 그럴 것이오.”

“게다가 천하는 넓고도 넓지. 천하 모든 무림 문파를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내부 깊숙이 침투한 세작까지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야.”

“내 생각도 같소.”

“하면.”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세작들마저 싹 잡아내기 위해 색출 부대를 꾸리려는 건가?”

“세작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데 어떻게 세작인 줄 알겠소? 삼교로 정보를 보내지도 않고, 누군가와 접선하려 하지도 않는 세작은 완벽하게 중원인과 동화되어 살아갈 것이오.”

“그렇겠지. 하면 어찌 색출 부대를 꾸리려 하는가?”

“하나 물어봅시다.”

모용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만약 삼교가 활동을 재개하면, 그 세작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 같소?”

“뭘 어떻게 움직이나. 다시 중원 정보를 퍼 나르거나 이쪽 정보를 교란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겠지.”

“물론 그런 놈들도 있겠지. 그러나 삼교가 한 번 실패한 세작 운용을 또 그런 식으로 굴리겠소?”

“……하면?”

“교관에게 들었소. 세작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측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으로 세작을 파견한다고.”

“말해 보게.”

모용군이 주먹을 들고는 검지를 세웠다.

“첫째는 정보 탈취요.”

“그렇겠지.”

“세작이 물어 오는 정보는 등급별로 중요도가 나뉘게 되오. 하지만 사소한 정보라도 무시하지 않지. 그 이유는 직접 보고 느끼지 못한 집단을 훤히 들여다보고자 할 때는 오히려 사소한 정보를 토대로 그 집단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오.”

“즉, 세작이 물어 오는 모든 정보가 유용하다는 것이지.”

“그렇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둘째는 무엇이겠소?”

“글쎄…… 여러 가지가 있겠지.”

모용군이 중지도 펼치며 말했다.

“큰 틀에서 볼 때 세작을 파견하는 주요 이유는 바로 적군의 아군화요.”

“……!”

양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문 세작은 목표 환경에 녹아드는 데에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했소. 환경에 잘 녹아든다는 것은 누구와도 무리 없이 섞일 수 있다는 뜻임과 동시에, 때에 따라서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오.”

“물론…….”

“하지만 그 집단을 장악하여 손발을 맞추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소. 어렸을 때부터 들어와 수십 년 동안 환경에 녹아들지 않는 이상, 기생자(寄生者)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는 일은 거의 없소.”

“그 말은?”

“오히려 조직의 우두머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겠지.”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군이 잔을 매만졌다.

“결정적인 순간 세작은 움직일 거요. 정보? 물론 그쪽에도 힘을 쏟겠지. 하지만 정보 탈취는 전쟁이 시작되고 난 이후에나 본격화될 것이오.”

“자네 말은, 중원에 침투한 세작들이 여러 요인(要人)들을 꼬셔 삼교를 따르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건가?”

“그렇소.”

“그런 멍청한 놈들이 천하에 얼마나 되겠나?”

그리 말하면서도 양천은 자신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천하에 그런 멍청이가 얼마나 되겠냐고?

그 ‘천하’가 얼마나 넓은지 아는 사람이 그였다. 천하가 넓은 만큼이나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겉으로는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도, 실상은 귀가 얇아 남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세작들이 노리는 과녁이 된다.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소. 하지만 암중 전투(暗中戰鬪)도 끝나지 않았소.”

모용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우리는 그 세작들을 잡아내야 하오. 강서 연합은 아직 하나가 되지 못했고, 가진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있소. 그런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세작을 잡아내는 일이오.”

“하지만…… 자네 말마따나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세작을 무슨 수로 잡겠는가?”

“세작을 잡는 것이 아니오.”

“……?”

“세작에게 홀린 벽창호들을 잡아내는 것이지.”

“……!!”

양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용군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묵룡부에도 세작이 있을 수 있소. 하나, 부주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여 전쟁이 벌어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이오.”

“하면?”

“무림맹이오.”

“……!!”

“무림맹에는 거의 십 할의 확률로 세작이 존재할 것이오. 그리고…… 연합체이니만큼 경쟁 관계도 많고 서로를 질투하는 관계들도 많지.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를 아군화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소.”

모용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내가 세작이라면, 무림맹만 한 잔칫집이 또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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