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화. 마도의 고향 (2)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소매로 살짝 온도를 낮춘 연위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향이 좋구나.”
“다행입니다.”
“따로 차 우리는 법을 배운 적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맛이 무척이나 좋다.”
“어깨너머로 본 걸 따라 한 것뿐입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찻잎의 향과 맛을 잘 끌어올렸으니, 작정하고 배우면 찻집을 내도 괜찮겠다.”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무림세가에서 나고 자라 무림인이 되었지만, 자식이 언제까지나 칼을 휘두르기를 원하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찻집이든 술집이든, 포목점이든 대장간이든 원하는 직종이 있다면 그러한 직업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연위의 마음은 그러했다.
다만 연지평에게는, 미안하게도 그리 말할 수 없다. 가문을 이어야 하니까.
그러나 연호정에겐 그럴 수 있다.
연위는 이것을 두고 결코 차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가문을 이끌면서도 겪기 힘들 고난을, 고작 몇 년 동안 다 극복하며 살아온 장남이었다. 장남이 아니었다면 연가는 물론 무림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다.
구국의 영웅이요, 강호의 구원자와도 같다. 앞으로 또 전쟁이 남아 있지만, 그 전쟁이라도 가능케 만든 것이 장남의 능력이었다.
모두가 아들을 칭송했다. 그러나 연위는 아들이 이룬 업적보다 아들이 얻은 피로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잘 컸고, 잘살고 있다.
지금도 또 위험천만한 일을 맡았지만, 아들의 실력이 아니라 운명을 믿기에 마음이 담담했다.
“그곳은 또 이곳과 날씨가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건조한 만큼 춥기도 춥겠지.”
“예.”
“무극에 이르렀다고 하여 네 몸을 과신치 말아라. 잘 때는 자고, 먹을 때는 먹고, 쉴 때는 쉬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한서불침의 영역에 오른 지 오래였다. 게다가 만물의 기를 받아들이는 경지라 수면도 크게 필요치 않은 몸이다.
하지만 다 알아도 걱정하는 것이 부모였다. 그리고 부모의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 자식은 어른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총 몇 명이서 가느냐?”
연호정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했다.
“저와 지평, 그리고 묵비가 함께합니다. 점창의 패율 선배에게도 허락을 받았고, 당가주님도 함께하지요.”
“옥청 도사를 데리고 갈 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 싸움에서 크게 성장할 겁니다. 실제로 녀석의 힘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네 사매도 함께 간다고 하였지.”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막원 선배까지요.”
총 여덟 명의 고수 집단.
그중 성천의 고수가 둘이요, 대문파 장문인급 무력의 소유자가 셋에, 그보다 한 수 처지지만 능히 초절정의 무력을 보유한 자도 하나 있다.
남은 둘은 아직 무종을 깨지 못했지만, 무종을 코앞에 둔 천재들이다.
이렇게 보면 수가 적다고 무시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당장 성천의 고수 하나가 대문파에 비할 만한 전력으로 계산되니, 총 대문파급 전력 셋에 육박하는 전력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지 않겠느냐?”
침투, 국지전, 암살 등의 특수전으로 가면 강력한 소수의 전력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마림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그 안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른다. 충분한 전력이라고는 하나, 만족스러운 힘이라고 확언하긴 어려웠다.
만에 하나 집단전이 벌어질 경우, 제아무리 성천의 고수가 끼어 있다 한들 불리한 건 어쩔 수 없을 터.
“그래서 뒤를 받쳐 줄 부대 하나를 부탁해 볼 생각입니다.”
“부대라? 의정군을 말하는 것이냐?”
“의정군이 함께해 준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워낙 강한 전력이라 지금 빼기에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화룡단급의 전력 하나를 부탁해 보려 합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어쨌거나 먼 변방에서의 싸움이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차 한 모금으로 다시 목을 축인 연위가 연호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연위는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다르구나.’
심검을 깨닫고 난 연후에 본 아들에게서는 막강한 힘만을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힘. 사색의 진기를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거대한 장수를 보는 듯했다. 넘치는 패기가 인상적이었고, 불같은 투기가 압권이었다.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날아오른 아들을 보았을 때는 그 패기와 투기가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거대한 용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전설 속의 신수(神獸)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달랐다.
‘그저 한없이 강하구나.’
찬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신수의 힘을 품에 안은 인간만이 보였다.
너무나도 강한 인간. 부러지지 않는 강함이라거나 딱딱한 강철을 연상케 하는, 그런 종류의 강함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 어떤 상대를 맞이하더라도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강함이다. 때로는 유연해질 것이고, 때로는 성벽처럼 굳건할 것이다.
모든 개념의 강함이 집약된 무신(武神). 지금의 연위가 보는 연호정은 그러했다.
‘도달하지 못한 자는 볼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지.’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그렇게나 강했구나.’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답습니다.”
“음?”
“무극이요.”
“무엇이?”
“저도 그랬고, 공공대사님도 그랬지요.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를 거쳤고, 품은 기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그 힘의 크기가 너무나도 커서 멀리 떨어진 사람도 감각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허허.”
“하지만 아버지는 다릅니다.”
연호정의 눈이 묘해졌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한없이 깊어지는 무극도 있는 것이로군요.”
서로가 서로를 더 높은 영역으로 이끌어 주는 깨달음의 비무.
그 비무로 연위는 나아가지 않으려 했던 길을 뚫고 하늘에 올랐다. 무극을 돌파했다는 것이다.
한데도 고요하다.
극단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다른 무극수(無極手)들과 달리, 눈에 띄게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같은 무극에 이른 고수가 집중해서 보면 연위가 품은 힘이 얼마나 깊은지가 보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군자(君子)와 같다. 군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 연위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든 깨달음은 요만큼의 요란함도 없이 그저 스스로가 깊어지는 것으로 끝나 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두드러지는 변화가 없다 하여 변변찮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연호정의 눈에는 보였다. 아버지가, 판관검이 검을 내치는 순간 하늘마저 갈라 버릴 듯한 막강한 검력(劍力)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
이제는 순수한 실력만으로도 감히 방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아버지의 검이 빈틈을 쑤시고 들어와 직격을 가하면, 자신이라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요란하지 않은, 고요한.
그러나 그 힘을 드러낼 때는 무극에 이른 고수에게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무공을 구현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기분이?”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복잡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이 깃들어 있는 미소였다.
“네 어머니가 있었다.”
“예?”
“모든 깨달음을 안고 나 자신을 보려 한 순간, 그곳에 네 어머니가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어머니. 지평을 낳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신 분이다.
어릴 때 돌아가셨지만, 연호정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기(氣)가 극치에 이르러 두뇌를 극한까지 활성화시켰기 때문이다.
“많은 번뇌가 있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정 올라도 되는가 하는 마음도 있었느니라.”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武)에 심취하게 될까 봐. 무에 심취하여 네 어미를 잊을까 봐.”
“…….”
“애비는 지금껏 단 하루도 네 어미를 잊어 본 적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기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잠시지만 놓아주려 한다.”
연위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내 삶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네 어미가 바라 마지않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내게 무공의 깨달음은 없었다. 그저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달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무극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연위의 변화는 극단적으로 고요했다. 선선한 바람과 같았고, 맑고 깊은 공기와 같았다.
가만히 연위를 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심검의 힘이 많이 줄었지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였다. 제대로 된 고삐도 쥐지 않고 휘두르려 하였으니, 성난 망아지처럼 멋대로 날뛰었던 것이다. 제멋대로 강해지고, 제멋대로 뻗어 나갔지.”
“제 눈에는 아버지의 심검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게 보입니다.”
“무극에 도달치 않고 심검을 얻은 것 자체가 사도(邪道)였다. 자격 없는 이가 휘두를 만한 힘이 아니었어. 그러니 마검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나아가, 심검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줄었다 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심하고 있지.”
바로 이것이다.
연위가 남들보다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검을, 무를 사랑하지만, 그는 언제든 자신이 가진 힘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랑의 대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위가 위대한 것이다. 힘을 목표로 하지 않음에도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역시 아버지는 대단하십니다.”
“내 눈에는 네가 훨씬 더 대단해 보인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무극에 오르신 만큼 더 깊고 올바른 단련이 필요하실 겁니다. 어쨌거나 초입에 불과하니까요.”
“안다. 이미 체감하고 있지.”
“다시 뵐 때 얼마나 지고(至高)한 경지를 보여 주실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냐. 네 기대에 부응하는 힘을 보여 주도록 하마.”
연위의 눈이 휘어졌다.
“그러니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돌아오거라.”
“물론입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연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인사가 아닌 일대 종사(一代宗師)끼리의 인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었으니 위아래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일 층에 내려와 문을 여니,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연지평과 묵비, 강량과 진양, 막원과 패율이 있었다.
부선이 있었고 옥청도 있었다. 당관은 없었지만, 곧 도착할 것이다.
연호정이 연지평에게 물었다.
“천 공자는 어디에 있다더냐?”
“지금 출맹 준비를 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구만.”
“저희도 맹주님께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래야지.”
연호정이 강량과 진양을 보며 말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크게 성장하길 바란다. 지금의 묵비 수준으로 올라오지 못하면 곤란해.”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목숨 걸고 싸우는 게 낫지, 참 곤란한 말을 하시네.”
진양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슈. 금방이지 뭐.”
“말은 청산유수네.”
“시끄럽다, 이놈아!”
낄낄거리던 강량이 이내 표정을 굳혔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마도 무림, 보통 살벌한 곳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다치지 않고 잘 다녀오마.”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 슬슬 나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