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화. 창조의 순간은 짧고도 영원하다 (6)
움찔!
광룡부를 휘두르던 연호정의 몸이 멈추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가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행입니다.’
가까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공공대사나 검제와 도제, 나아가 형님인 백병신군도 연위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연위의 변화는 마치 그의 성품과 같았다.
고고하고 조용하다. 굳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수련하는 무공이 아니라는 듯, 천기(天氣)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기운을 받아 내는 연위의 몸은 무척이나 고요하게 뒤바뀌고 있었다.
‘드디어 마음을 잡으셨군요.’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달으셨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연호정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하늘로 올라갔지만, 신선은 아니기에 타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나는 나, 아버지는 아버지다.’
아버지께선 왜 이곳에 오셨을까? 그런 의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
그리고 지금은 지금이다.
번쩍!
광룡부가 사선으로 허공을 갈랐다.
한 줄기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새겨지다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도제의 참혼교도, 일도(一刀)와 닮아 있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초식이지만, 기의 밀도와 운용이 상상을 초월하여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무적의 위용을 자랑했더랬다.
‘그래, 이것이다.’
연호정의 왼손은 광룡부의 창대를 쥐고 있지 않았다. 회전하는 몸을 따라 자연스레 휘날리는 옷깃처럼, 자유분방하게 허공을 매만지고 있었다.
창대를 쥔 오른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쾅!
한순간 하늘을 하얗게 물들인 번개가 갈지자로 휘어져 내려와 지상에 꽂힌다.
상단의 신기, 중하단의 내공을 대다수 소모했기에 원하는 만큼의 힘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참혼교도의 참백(斬魄)처럼, 미약한 곡선을 그리는데도 직선보다 빠른 벼락이 되어 땅에 고랑을 만들었다.
빠름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무엇보다 빠르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절단하고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참격(斬擊)이었다.
번쩍! 번쩍! 번쩍!
광룡부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연호정의 초식은 무섭도록 정교해져 갔다.
도끼의 투로(套路)가 아닌 기(氣)의 투로다. 이미 외형의 초식에 있어서는 정점에 이른 그였다. 그가 구사하는 모든 초식은 철저히 기(氣)의 움직임을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만류귀종(萬流歸宗). 시작은 만 갈래로 달라도 종국에는 하나로 귀결되기 마련이라, 만 가지 초식도 통달하면 결국 단순해지는 것이다.
다만, 거기서도 끝이 아니다.
그 단순해진 동작 속에 무엇을 담는가. 기를, 혼을, 의지를 어떤 식으로 담아내는가가 바로 연호정이 도달한 곳에 선 자들의 시련이다.
지금 연호정은 그 시련을 목도하고, 자신과 싸워 가며 스스로에게 진실한 무공을 창안하고 있는 것이다.
‘황룡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광룡부를 얼마나 실전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팔십 근이 넘는 거대 도끼를 수수깡처럼 휘두르는 것은, 제아무리 대단한 내공을 지닌 사람이라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연호정은 그것을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흑암제 시절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끝까지 파낸 결과이기도 했다.
‘틀렸어.’
그래선 안 되었다.
흑암제의 깨달음까지 녹인 지금의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그처럼 역동적이고 파괴적인 초식의 구현은 그때의 나에게 맞았던 것이지,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아.’
그렇다면 지금 연호정의 무공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함(强)이다.
단순히 단단하고 파괴력 넘치는 무공이란 의미가 아니라, 강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황룡은 부드러워질 수도 있고, 빨라질 수도 있으며, 느릿하고 온화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흑암제 시절의 무공은?
‘기술(技術).’
극한에 이른 기술, 그것은 가히 예술과도 같았다.
극점에 이른 흑암제의 기술은 깨달음마저 파괴할 정도로 다듬어져 있었기에, 얼핏 보면 초절정고수의 무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면 어떤 고수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섬세한 기교로 가득하여, 술(術)로만 따지면 명백한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황룡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래서다.’
스승은 말씀하셨다.
‘나아가 연무(鍊武)의 과정을 거치고 극치(極致)에 이르게 되면, 투로가 극단적으로 단순해진다. 기(氣)의 세밀함이 그것을 대신하겠지.’
흑암제 시절의 내공은, 깨달음은, 기술은 가히 극한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극치는 아니었다. 한 무인의 경지를 논했을 때 최고 수준은 맞지만, 자신이 연성한 무공의 극치에 도달하지는 못했단 것이다.
반대로 황룡을 얻은 연호정은 흑암제 때처럼 내공과 깨달음, 기술을 명검처럼 날카롭게 벼리지 못했다.
그러나 무공의 극치는 이루었다. 그래서 투로가 단순해지고, 자연스레 기의 운용에 눈이 간 것이다.
그리고 도제와의 싸움으로 흑암제 시절의 깨달음마저 포용한 지금.
‘극한의 기예는 결국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를 살리는 것.’
금룡진악권의 형태는 어떠한가.
투로가 결코 복잡하지 않다. 저잣거리 애들더러 따라 해 보라고 시연을 하면, 열에 아홉은 두세 번만 봐도 대충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
금룡번천장 역시 마찬가지다. 더 부드럽고 유연한 동작이 들어가 있지만, 그 또한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권과 장, 주먹과 손바닥의 형상에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형(形). 그것이 바로 금룡이무다.
그렇다면 광룡부는?
흑룡부와 백룡부는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가?
‘도끼는 도끼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번쩍!
양손으로 창대를 쥔 연호정이 횡소천군의 단순한 움직임을 구현했다.
순간 그의 눈에는 보였다. 수천의 대군이 도끼질 한 방으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환상이.
‘이것이다.’
광룡부는 무겁고 단순하게.
흑백쌍룡부는 빠르고 단순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베고 파괴할 수 있는 힘으로.
‘이것이 바로……!’
그때였다.
훅!
연호정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벼락과도 같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쩌어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이 터져 나왔다.
횡으로 휘둘러진 광룡부를 내리친 것은 한 자루의 보검이었다.
언뜻 보면 조금 넓고 두꺼운, 평범한 장검처럼 보이는 그 검 안에는 강렬한 신기(神氣)와 극한의 금기(金氣), 그리고 무서운 예술혼이 담겨 있었다.
천라제국검(天羅帝國劍)이었다. 이 나라, 이 땅의 주인이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한과 지혜로써 벼려 낸 국운(國運)이 담긴 신검이었다.
그리고 그 신검을 쥔 사람은 바로 연위였다.
‘아버지.’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위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그저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다만 그곳에 자신이 있었을 뿐.
이내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아버지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저 자신의 안에서, 너무나도 판관검스러운 깨달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상의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치링!
연호정이 광룡부를 떨쳐 냈다. 그러자 연위의 제국검도 뒤로 튕겨 나갔다.
한 발 뒤로 물러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치리링! 칭! 칭!
경쾌한 소리, 아름다운 울림이었다.
팔십 근이 넘는 중병과 부딪친 제국검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두꺼운 도끼날과 부딪치고 있음에도 맑은 검명(劍鳴)을 토해 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광룡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국검을 압도하는 크기임에도 너무나 산뜻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기(氣)가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기를 욱여넣어 그 위력을 육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연호정은 그것을 깨달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로 인하여.
치리리링!
경쾌한 소리를 내는 도끼와 검.
서로를 향해 병기를 휘두르고 있지만, 살기와 투기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 상대를 가상의 상대처럼 여기며 한 번, 한 번 휘둘러 부딪친다. 그 단순하고 평화로운 행위로 인해 연호정은 어느새 부법(斧法)의 네 가지 초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위는?
‘높구나.’
연위는 황금빛 거대한 검탑(劍塔)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검탑에 검을 후려치며 자신이 쌓아 두었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흡수하고 있었다.
‘내가 이리도 높은 것을 쌓았다.’
보물을 쌓아 두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평생토록 연마하고 깨달았던 모든 검의(劍意)가 황금빛 탑이 되어 제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금빛 탑이 외치고 있었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나를 안고 더 높이 날아갈 수 있는데, 나는 미지의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는데 왜 나를 외면했느냐며 서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연위는 깨달았다. 심검이 그토록 심통을 부렸던 이유를.
‘심검도 나다. 심검은 나에게 서운해하고 있었어.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연위가 탄식을 토해 냈다.
‘즉, 나는 나를 무시하고 미워했다.’
자식을 번듯하게 키웠다. 그것으로 인생의 최대 목표가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거기서 끝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재능은, 그의 노력은, 극한까지 연마된 그의 올곧은 마음은 거기서 끝을 낼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식을 남들 못지않게 잘 키워 내는 것이 부모의 숙명이라면, 무인이자 연씨 가문의 주인인 연위의 숙명은 따로 있었다.
‘무(武)의 완성을 위하여.’
태어나기를 무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검과 무를 사랑한 주체는 나 자신이었다.
단 한 번도 무공을 귀찮다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상의 경지를 꿈꿀 때면, 처음 아내와 손을 잡았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무(武)를 받아들였다.’
연위의 눈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나는 검(劍)을 사랑한다.’
쿠구구궁!
제국검이 수십, 수백 번 금빛 검탑을 때렸다.
그때마다 검탑은 무서운 속도로 가라앉았다. 연위가 지난날의 깨달음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터어어어엉!
담백한 일격으로 연호정이 마지막 칠 초식의 부법을 완성했을 때.
“……?!”
황금빛 검탑이 있던 자리에 한 명의 여성이 보였다.
호리호리한 몸에 고운 두 손. 하얀 피부와 기품 있는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여인의 이마와 눈가에는 호정이 있었다.
여인의 턱과 입매에는 지평이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눈 속에는 연위, 자신이 있었다.
‘여보.’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하루도 잊지 않았던 삼생의 반려다.
그리고 연위에게 있어 무(武)는, 저 반려처럼 한시도 자신의 곁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도 되겠소?’
먼저 간 아내에게 멋진 남편이 되고자 평생 나를 버리고 살았다. 부모의 미래가 있을 뿐, 연위의 미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먼저 간 아내는 마음에 묻고, 당당한 무인으로서 다시 나아가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아내가, 자식들 모두가 원하는 길이었다.
‘멋들어지게 살다가 그대 곁으로 갈 때까지, 잠시 잊어도 되겠소?’
여인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여인이 사라진 그 자리.
한 자루 심판(審判)의 검이 아로새겨진다.
당대 천하, 모든 삿되고 악한 것을 단호하게 베어 버릴 수 있는 천하제일의 명검.
연위가 눈을 떴다.
번쩍!
다시 뜬 그의 눈에 비로소 하늘이 담겼다.
번뇌 많은 인간의 탈을 벗어던진 한 검객이 무신(武神)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