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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83화 (883/963)

883화. 창조의 순간은 짧고도 영원하다 (2)

밀려 나간 연호정이 핏물 섞인 침을 뱉으며 주먹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주춤한 종리백이 머리 위로 참악도를 들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번쩍!

곧게 내리치는 일도(一刀).

정직하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번의 칼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호정은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쩌어어어엉!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측면으로 주먹을 때려 박았다. 벼락처럼 날아든 강철의 도기(刀氣)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부스러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기를 친 연호정의 주먹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종리백이 내친 도기는 그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황룡신왕공에 이른 후 신공 자체의 성장은 없었다지만, 이전보다 더 막강해진 진기 밀도를 머금고 있는데도 주먹과 손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힘 대 힘으로는 의미가 없어. 누가 더 강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추구하는 힘의 개념이 달라.’

연호정의 힘은 모두가 생각하는 순수한 힘 그 자체였다.

더 빠르고, 더 격렬한 무공이다. 더 빠른 속도는 더 강한 파괴력을 자아내는 법, 지금껏 연호정이 보여 주던 무공은 단순하면서도 확고한 힘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종리백이 추구하는 힘은 달랐다.

그가 보는 힘이란 맞상대하면서도 때로는 피할지언정 최선의 순간, 최고의 힘으로 상대를 날려 버리는 것이다.

연호정 역시 그와 같은 방식에 능했다. 오히려 빈틈을 만들고 어떻게든 상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먹이는 것은 연호정의 최대 장기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 깨달음은 안고 간다. 그러나 내 무공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야.’

황룡신왕공은 사신기와 다르다.

정확히는, 사신기의 특성을 아우르는 고도의 깨달음이 곧 황룡신왕공이다.

사신기로 할 수 있는 것은 황룡신왕공으로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주작공의 속도와 백호공의 힘, 청룡공의 반격 능력을 되살려 종리백을 상대했다.

그러나, 과연 거기서 끝인가?

이 육신이 너무나도 익숙한 사신무(四神武)를 본능적으로 구사했지만, 그가 얻은 황룡신왕공의 진짜 힘은 그런 게 아니었다.

우웅.

가슴 속에서 황룡이 울었다.

광명신단처럼 운용했던 그 기운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연호정은,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자신이 황룡무(黃龍武)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황룡은 무엇인가.’

금룡진악권과 금룡번천장은 어떻게 만들었는가.

용형칠기보법(龍形七技步法)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

황룡기는 내 몸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훅!

연호정이 종리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종리백의 눈이 번뜩였다.

‘느려졌다?’

절대적인 속도는 빠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보여 주던 그 무섭도록 빠른 신법은 없었다. 전설상의 축지성촌(縮地成寸)의 경지를 구현하듯, 공간을 접는 것처럼 온갖 방위에서 나타나 쾌속하기 그지없는 공격을 선보이던 연호정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질이 달라졌다.’

이전의 신법이 무게 없는 불처럼 빠르고 화려했다면, 지금 연호정이 보여 주는 신법은 그보다 훨씬 더 묵직했다.

마치 고대 신선들이 날뛰며 살았다던 이야기 속 신수(神獸)가 그 거대한 네 발로 쿵쿵거리며 달려드는 듯하다.

그리고 그 신수의 정체는?

‘용?!’

연호정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황금빛 기운.

신기(神氣)로 번뜩이는 종리백의 눈에, 더 이상 연호정의 외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풍기는 기운, 그 본질인 거대한 황금빛 용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달려드는 듯했다.

연호정이 주먹을 휘둘렀다.

쿠우우웅!

이전보다 훨씬 더 느리지만 무서운 중량감을 지닌 일권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종리백은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일권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카아아아아앙!

수십 근은 족히 나갈 듯한 참악도와 연호정의 주먹이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종리백의 눈이 커졌다.

‘없다.’

연호정의 주먹에 상처가 없다.

서로 화려한 공격을 주고받았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직격타는 피했더라도 상처는 남았다. 서로의 공격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의 주먹과 정면으로 마주한 참악도는 그의 주먹에 칼자국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압축된 금빛 진기로 넘실거리는 주먹의 압력에 칼날이 뒤로 밀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훅!

또 한 번, 연호정이 움직였다.

여전히 빠르지만, 초장보다는 확실하게 느렸다. 감각으로 알아챌 필요도 없이 육안으로 훤히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종리백의 보법으로 위치를 선점하여 순식간에 공격선을 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종리백은 그리하려 하였다.

한데.

‘뭐야?!’

종리백은 당황했다.

분명 연호정은 느렸다. 그래서 먼저 위치를 선점해 묵직한 도풍으로 날려 버리려 했다.

한데 이미 그 위치에는 연호정이 도달해 있었다.

이건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도객의 눈과 기감은 모든 것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 정도 감지력 없이는 초반 연호정의 기습적인 연환오권에서 이미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주먹이 아닌 장(掌)이었다. 하단에서 중단으로 올라오는 부드러운 투로만 보면 도무지 위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종리백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쾅!

짧고 강렬한 폭음이 터졌다.

연호정의 장력을 참악도의 도신(刀身)으로 막은 종리백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 나갔다.

‘무겁구나.’

수만 근짜리 바위가 날아와 꽂힌 것 같다.

속도로 힘을 살린 무공이 아니다. 그냥 무공 자체가 무겁고 강했다.

하지만 빠르진 않은데, 이상하게 피할 수가 없었다.

종리백이 힘차게 진각을 내질렀다.

쿵!

발밑에서 퍼져 나온 막강한 기운이 무섭게 꿈틀대던 연호정의 기파를 밀어 냈다.

번쩍!

종리백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어느새 두 주먹을 쥐고 돌진하는 연호정의 모습이 그의 두 눈에 하얗게 비쳐 들었다.

‘용…….’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대가 사람인지 용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극도로 활성화된 상단전 덕분에 그의 눈은 신기 들린 술사의 그것과 비슷한 것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오히려 그 신에 이른 안목이 무공 구현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살아생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저것은 사람이다. 다만 저 청년의 기파가, 존재감이 너무나도 크고 뚜렷하기에 이러한 환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뿐.’

밀리는 와중에도 종리백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일체화가 되었구나. 익히고 있는 신공과 하나가 되었어. 저만한 경지에 올랐으니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알게 된 것이겠지.’

종리백이 눈을 감았다.

‘나는 칼잡이다. 외양에 현혹되어선 안 돼.’

두 손으로 참악도를 쥔 종리백이 냉정하게 칼을 올려 쳤다.

까아아앙!

막혔다.

막힐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으되 상대의 진기는 자신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밀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군.’

종리백이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연호정이 코앞까지 다가와 그 바위와도 같은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허공으로 핏물이 튀었다.

연호정을 지나쳐 칼을 쳐올리고 있는 종리백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멋들어졌다.

주르륵.

연호정의 가슴에 사선의 도상이 새겨졌다. 참악도가 황룡신왕공을 뚫고 들어와 상처를 남긴 것이다.

상처를 매만지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십니다.”

웃을 때가 아니었다. 상처에 남은 종리백의 진기는 끊임없이 체내로 파고들어 내상을 유발하려 했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웃었다.

우둑.

종리백이 왼손 새끼손가락을 잡아 비틀었다.

연호정의 몸을 베고 지나간 그때, 연호정의 손이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아 꺾어 버린 것이다.

섬세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파괴력 넘치는 권장을 구사하는 자가, 이토록 미세한 빈틈을 읽고 손가락을 부러트렸다.

하지만 종리백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연호정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본신 무공을 꺼낼 필요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한 칼질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네.”

“그러셨습니까.”

“내 착각이었어. 틈과 틈을 읽고 휘두르는 단타 일격의 싸움으로 끌어들인 건 내가 아니라 자네였구만.”

후우우우우웅.

양손으로 참악도를 쥔 종리백의 몸에서 이전보다 배는 더 날카로운 기파가 흘러나왔다.

부러진 손가락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이미 무신의 진기가 부러진 뼈를 맞추고 완벽하게 경화시킨 것이다.

화아아아악!

양손으로 칼을 세워 쥔 종리백의 모습은 오직 한 길만을 걷는 구도자를 연상케 했다.

“더는 그럴 수 없을 게야. 자네가 만든 싸움판에서는 싸우지 않겠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역시나 정면 승부밖에 없구만. 미리 말하네만, 더 이상 같은 수는 통하지 않아.”

“좋지요.”

종리백이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런데도 빈틈은 전혀 없었다. 연호정의 어깨가 움찔한 이유였다.

“자, 가 보겠네.”

훅!

어깨 위까지 칼을 올린 종리백이 연호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병 하단을 쥐고 있던 종리백의 왼손이 살짝 풀렸다.

‘일도(一刀), 단악(斷岳).’

종리백이 연성한 무공, 참혼교도(斬魂交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도 단순한 초식명, 일도와 단악이다. 한 번의 칼질이라는 초식과 산악을 쪼갠다는 초식의 연환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극에 이른 고수의 무공은 곧 그 자신이 목표로 하고 상상하는 깨달음을 그대로 실어 내치는 것이다.

종리백의 무공도 그와 같았다.

‘크다!’

일도, 한 번의 칼질.

산봉우리처럼 거대한 칼 하나가 폭풍우를 부르며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그 칼질 한 번으로 산악도 무너트릴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도제 종리백의 진짜 무공이었다. 극대화된 참격, 일격 필살의 위력을 자랑하는 거도술(巨刀術)의 실체였다.

하지만 연호정도 뒤지지 않았다.

쿵!

서방금신, 백호의 일보가 아니다.

용형칠기의 한 걸음에 대지가 뒤흔들렸다. 그 모든 지력(地力)을 끌어올린 연호정의 주먹은 황금의 태양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도권이 부딪쳤다. 순수한 힘의 충돌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폭음에 구경하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콰드드득! 콰드득!

무자비한 충격파에 비무대가 반으로 쪼개졌다. 천만다행으로 주변 건물들에까지 영향을 끼치진 않았지만, 불어닥치는 바람이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주르륵.

어딜 어떻게 당한 건지, 머리에서 난 피가 연호정의 눈과 볼을 지나 턱으로 이어졌다.

종리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멋대로 난 허연 수염이 붉게 물들었다. 강한 압력이 자아낸 내상으로 피를 토한 것이다.

“으아아압!!”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고 종리백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전신을 밀어 내는 충격파를 기어이 이겨 내고 들어간다. 종리백의 참악도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퍼어억!

연호정의 좌장(左掌)이 종리백의 가슴을 때렸다.

피를 뿜는 종리백, 하지만 무서운 정열로 상체를 세운 그가 칼자루를 휘둘렀다.

퍼어억!

칼자루에 얼굴을 맞은 연호정이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번쩍!

나이는 들었어도 정열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연호정처럼 기압을 무시하고 한 발 내디딘 그가 쓰러진 연호정의 상반신을 향해 참혼교도, 파도(破刀)를 구사했다.

콰르르릉!

비무대 끄트머리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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