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화. 창조의 순간은 짧고도 영원하다 (1)
“시작됐구려.”
남궁인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뜨였다.
저 아래 비무대에서, 희대의 고수 둘이 서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각기 뒤로 튕겨 나갔다.
호쾌하기 그지없는 일격의 나눔이다. 서로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가를 한 수로 알아보려 한 것이다.
훅!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를 실은 바람이 수뇌부들의 의복과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거리가 얼마인데 이 정도 충격파를 날린다. 그 바람에 실린 기의 밀도가 대단했다. 주인의 손에서 떠난 발경은 내공으로 잡아 두지 않는 한 무서운 속도로 그 기세를 잃기 마련인데, 두 초고수의 충돌로 생겨난 발경은 그 먼 거리를 뚫고도 막강하기 그지없는 진기 밀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끝까지 내공을 잡아 둔 게 아니라, 충돌 지점에서 발생한 기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고수.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에 오른 무신(武神)들의 힘은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다.
“역시나 인상적이로군요.”
팽무강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검제 선배님과 겨뤘을 때는 이 정도 충돌을 보여 주지 않았는데.”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다르기 때문이오. 퍼져 나가는 기운을 최대한 조종하여 내 몸에 붙잡아 두고, 나아가 충격파마저 내 힘으로 삼아 상대를 공략하려 했던 그때와는 다르오.”
“그랬습니까?”
“검제 선배와의 싸움에서는 깨달음이 중요했소. 모두가 그 깨달음을 보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당시 소부주의 의도였소.”
“하면 지금은?”
“순수한 힘의 충돌이오. 검제 선배와의 싸움이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면, 도제 선배와의 싸움은 그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보여 주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것이오.”
공공대사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주변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성품이지만 어지간하면 자신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작정하고 붙을 모양이외다.”
모두의 얼굴에 충격이 일었다.
그렇다면 일전 검제 남궁승과의 싸움에선 실력을 온전히 보여 주지 않았었다는 것인가?
‘무시무시한!’
남궁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떠올랐다.
당연히 아버지도 당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진 않으셨다. 그렇게 보였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연호정도 그랬다고 하니, 질투심 이전에 놀란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궁인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아직 삼제(三帝)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모르겠다.
자신의 이 생각이 냉정한 눈으로 지켜본 무사의 분석인지, 아니면 단순한 바람인지.
‘어찌하여 세상은!’
세상은 어찌 한 사람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재능을 부여해 주었을까.
만약 저만한 재능이 자신에게도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미 천하는 남궁을 진정한 천하제일세가로 칭송하고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남궁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흐음.”
장인릉의 눈이 깊어졌다.
“첫 부딪침 이후, 더는 움직이지 않는군요.”
연호정과 종리백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장인릉이 답을 구하는 듯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빈승도 두 사람의 의도를 읽기는 힘드오. 부딪친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으음.”
모두가 침음하며 두 고수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을 때.
연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심검…….’
그는 어젯밤 아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축제에서, 이 멋들어진 장남이 보여 드리겠습니다. 강함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리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강함의 아름다움, 그리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힘이 자아내는 품격.
연위가 눈을 떴다.
눈으로 두 사람의 부딪침을 보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시 눈을 감고 두 사람의 기를 느끼려 하니,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확신했다. 선배님께서는 침착하고, 호정은…….’
적당히 흥분했다.
흥분하고 있음에도 상대의 빈틈을 살피는 눈에 어떠한 실수도 없다. 몸에 밸 대로 밴, 첨예한 생사의 외줄 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부동의 전투안(戰鬪眼)이다.
‘놀랍구나.’
흑암의 세월을 겪고 온 아들의 전투 능력은 이미 천하제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처럼 지고한 경지에 오르고도, 그간 쌓은 능력들을 어느 하나 잃지 않고 다 네 것으로 만들었구나. 기가 막힌 기량이다.’
문득 연위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다.
공공대사였다. 공공대사가 심유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위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공공대사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눈치챈 것이다. 연위가 심검으로 저들을 보고 있다는 걸.
그리고 연호정이 오늘 유독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이유를.
그렇게 수뇌부들이 각자의 생각으로 비무대를 보고 있을 때.
마침내 두 사람이 움직였다.
* * *
훅!
먼저 움직인 것은 연호정이었다.
파앙!
순식간에 삼 장 거리 안쪽으로 진입한 그가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종리백이 참악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퍼어어어엉!
한 줄기 권풍이 사선으로 찢겨 날아가며 강렬하기 그지없는 폭음을 울렸다.
재차 치고 들어가려던 연호정이 순간 벼락처럼 진기를 조절하며 멈춰 섰다.
쾅!
진입 속도가 얼마나 빨랐으면, 순간적으로 멈췄는데 허공에서 폭음이 터졌다.
연호정이 멈추고 나서야 울려 퍼지는 폭음, 그의 움직임이 소리보다도 빨랐다는 뜻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이건 뭐 무지막지하구만.’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살벌한 도풍(刀風).
그 무형의 칼바람이 종리백의 몸 주변을 휘감듯 몰아치며 섣부른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힘으로 육신을 보호하지 않는 이상, 전권 안으로 들어가면 그 순간 온몸에 칼자국이 새겨질 것이다.
‘저 정도 도풍을 몸에 두르고도 내공이 감소하는 기색이 없다.’
엄청난 내공량이었다. 단순 내공량만 따지면 공공대사는 물론 검제 남궁승보다도 더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는 듯했다.
나아가, 저 도풍은 단순히 내공을 잡아먹으며 발생한 무공이 아니었다.
저 또한 깨달음이다. 대기의 흐름과 극에 이른 도법(刀法)을 일치시켜 무형의 방어막을 만드니, 단순히 내공을 실어 내치는 도풍보다 한 차원 높은 깊이를 자랑한다.
훨씬 더 자유롭고, 훨씬 더 풍부하며, 훨씬 더 날카로울 것이다.
‘저런 성향이 아닐 텐데.’
첫수의 교환에서 느껴진 종리백의 성격은 무척이나 공격적이었다.
이전, 검제 남궁승과의 결투에서 그는 드높은 깨달음과 완벽에 이른 검리(劍理)를 느꼈다. 공방 일체, 만검을 손에 거머쥐었기에 어떤 검법을 구현해도 강유의 조화가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도제의 무공은 달랐다.
방어보다 공격이요, 공격 이상의 공격을 추구한다. 한없이 막강하고 직선적인 무공이야말로 도제 본연의 무공일 것이다.
그런데도 무형의 도풍을 몸에 두른 채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있다.
‘보고 싶은 것이다.’
연호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내 상대의 힘이 얼마나 날카롭고 막강한지, 진정 제대로 된 칼춤을 출 수 있는 상대인지 알아보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뚫어 드려야지.’
연호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일순 폭증했다.
콰콰콰쾅!!
뿜어져 나오는 황룡기(黃龍氣)가 무시무시한 중압감을 자아냈다.
연호정이 선 땅에 엄청난 수의 금이 갔다. 단단한 비무대 바닥이 메마른 땅처럼 갈라지고 부서지며 허연 돌가루를 피워 올렸다.
종리백의 눈이 번뜩였다.
‘오는가.’
참악도를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여 다오, 너의 무공을.’
비어 있던 왼손도 어느새 도병을 쥐었다.
두 손으로 쥔 희대의 거도(巨刀)가 은은한 광채를 뿜었다.
‘내 모든 것을 보여 줄 만한 기량이 되는지, 직접 증명해 보란 말이다!’
그때, 연호정이 움직였다.
훅!
요란한 폭음 따위는 없었다.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연호정, 종리백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머리 위에서 나타난 연호정이 두 주먹을 휘둘렀다.
콰콰쾅!
엄청난 압력이었다.
일권, 일권에 실린 힘도 대단하지만, 대기를 휘감아 내리치는 연환오권(連環五拳)은 그 자체로 중력을 몇 배나 더 무겁게 만드는 듯했다.
피슉! 피슉! 쾅!
금빛 찬란한 기운으로 휘몰아치는 쌍권에 무형의 도풍이 마구 일그러지다가, 이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곳곳에 구멍을 만들었다.
한번 뚫린 도풍의 방어막은 더 이상 유지가 되지 않았다. 종리백의 눈이 커졌다.
콰드드득!
연호정의 주먹이 비무대 바닥에 꽂혔다. 그 넓은 비무대 바닥 절반이 움푹 파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종리백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구나!”
쾅!
이제야 비로소.
짐작은 했지만 마음먹고 내치는 힘의 크기를 실감하고 싶었던 종리백의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준 연호정의 무공은, 중원 천하 최고의 도객(刀客)으로 추앙받는 도제의 진심에 불을 붙였다.
파바바박!
부서진 비무대 바닥을 마구 박차며 돌진한 종리백이 참악도를 휘둘렀다.
고개를 쳐들고 대항하려던 연호정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나다!’
탐색은 한 번으로 족하다. 종리백은 남궁승처럼 맞상대가 가능한 상대와 오래도록 깨달음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일격, 일격을 전력으로 간다. 그것이야말로 무인의 승부인 법, 힘을 아끼거나 체력을 온존하는 승부 따위는 종리백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찰나지간 그 마음을 읽은 연호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호승심 넘치는 투사(鬪士)의 그것으로 변했다.
연호정의 몸이 사선으로 움직였다.
콰아앙!
거대한 도풍과 충돌한 연호정의 몸 곳곳에 칼자국이 났다.
깊은 상처는 없었지만, 황룡기의 내공 방패를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초장부터 전력을 다하는 도제의 무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퍼어어어억!
연호정의 금룡진악권(金龍鎭嶽拳)이 종리백의 몸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금룡이무, 두 개의 육장 공부를 창안해 낸 이후 처음으로 구사하는 무공이었다. 삽시간에 만든 무공이지만, 그 안에는 연호정이 얻은 모든 깨달음이 녹아 있었다.
콰앙!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강철 구체가 날아든 것 같았다.
종리백의 왼손 소매가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직접 막으려 했지만, 막을 수 없는 힘임을 인지하고 흘려 낸 것이다.
그럼에도 다 흘려 내지 못한 권압이 소매를 가루로 만들었다. 성천에 이른 고수의 내공을 그대로 뚫어 버린 것이다.
종리백의 얼굴에 환희 넘치는 웃음이 깃들었다.
“멋지구나!”
번쩍! 쾅!
사선으로 올려 친 거대한 칼날에 연호정의 몸이 튕겨 나갔다.
교차한 양팔에 모든 기운을 실어 막았다. 그런데도 그의 팔뚝에 칼자국이 났다. 이번 역시 깊진 않았지만, 도압(刀壓)이 너무 강해서 십여 장이나 튕겨 나갔다.
파바바박!
튕겨 나간 연호정은 힘을 추스르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이미 상대가 달려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번쩍!
당장이라도 껄껄껄 웃음을 터트릴 듯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달려드는 종리백.
어느새 종리백과 똑같은 미소를 머금은 연호정의 두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한순간 승부에 몰입한 두 초고수가 도권(刀拳)을 부딪쳐 갔다.
퍼어어억!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