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6화. 권왕맹주(拳王盟主) (1)
“…….”
왠지 모를 적적함에 홀로 평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연위는 문득 느껴지는 기세에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거처에서 빈 잔과 제법 고풍스럽게 생긴 술병 하나를 더 가지고 나온 연위가 파군각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시구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당관이 들어섰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오셨소.”
“어째, 이제는 천리안(千里眼) 같은 것도 익히셨소?”
“음?”
“문짝 두들기려고 하는 순간 들어오라 하시는군. 귀신이 다 됐소이다.”
연위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신소리 그만하고 올라오시오. 한잔하십시다.”
당관이 투덜거렸다.
“안주가 너무 빈약해 보이는데…… 응?”
새 술병을 본 당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주가 아닌데?”
“나중에 또 한잔할 일이 있으면 무엇을 마셔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마침 마을에 괜찮은 물건이 들어왔다고 해서 사 두었소.”
연위가 손가락으로 술병을 튕겼다.
“검남춘이오.”
당관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사천 사람인 나에게 검남춘을 대접하겠다, 이거요?”
검남춘은 사천에서 나는 술이다. 고향에서 그렇게나 마셨던 술을 무림맹에서까지 마실 필요는 없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술이란 제조하는 법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라 하지 않소? 만든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하니, 가주께서 드셨던 것과 차이가 있을 것이오.”
“맛과 향이 미묘하게 다른 검남춘 수백 동이를 마셔 봤소만.”
“수백 동이에 한 동이 더 추가해서 드시겠군.”
당관이 웃으며 평상 위에 올랐다.
“못 본 새에 넉살깨나 좋아지셨소이다.”
“칭찬 감사하오.”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누었다.
연위가 물었다.
“어째, 괜찮으시겠소?”
“이미 마셨는데 괜찮겠냐고 물을 건 또 뭐요? 한데 이거, 좀 묘하긴 하군. 검남춘은 맞는데 향이 훨씬 더 진해. 이런 검남춘은 나도 몇 번 못 마셔 봤는데.”
“술 말고 말이오.”
당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야 연위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그게 안 괜찮았으면 애초에 맹으로 오지도 못했소이다.”
“그러기야 하셨겠지만.”
“그리고…….”
당관이 피식 웃었다.
“나와 내 동생이 없어도 워낙 잘 돌아가고 있소이다. 아버지께서 떡하니 버티고 계시니까.”
연위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당관이 아버지, 암왕 당형과 화해를 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관 성격에 암왕에게 가주 대리를 부탁하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모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워낙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미 은퇴한 아버지께 가문을 맡긴다는 것은, 연위가 아는 당관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연위는 굳이 당관 앞에서 속내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가주께서 암왕 어르신과 그렇게 격의가 없으신 줄 몰랐소이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색하오. 어색하기 짝이 없지, 정말로.”
한번 개선된 관계라지만 쌓인 애증의 기간만 수십 년이다. 화해 한 번으로 이상적인 부자지간이 될 리 없었다. 서로를 향하는 마음은 애틋할지라도, 그것을 겉으로 티 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행히 당관은 자신을 고치려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당형도 말년에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아 당관을 무척이나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 이 정도나마 사이가 회복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직도 서먹서먹하여 대화가 반 각도 지속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문은 다 회복되었소. 나아가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했던 실수를 내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셨소. 그러나 나는 반복하고야 말았지.”
“음.”
“나는 이전과 다르게 움직였소. 만약 옆에서 아버지가 봐주지 않으셨다면 감히 맹으로 오지도 못했을 거요. 그만큼 아버지는 본가의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오.”
변화의 필요성을 오래전부터 실감한 당형은 스스로를 유폐한 후 당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수천, 수만 번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해 낸 이상적인 방법들을 서슴없이 아들에게 알려 주었다. 다만 가주는 당관인지라, 그 방법대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아들이자 가주인 당관을 존중한 것이다. 당관이 바뀐 것처럼, 당형 역시 크게 바뀐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덕분에 당가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당관 역시 당형에게 가문을 맡기고 올 정도로 관계를 회복하였다. 아마 당형은 자신의 입맛이 아닌, 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문을 잘 이끌고 있을 것이다.
“가문으로는 동생 녀석을 보내면 될 것이오.”
“그것도 그렇겠지만.”
연위가 헛기침을 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임무의 좌장은 호정이 될 텐데, 그림이 썩 좋지 않을 수 있소.”
당관은 당씨 문중의 주인이며 연호정의 까마득한 선배다.
말하자면 일시적이나마 후배 밑으로 들어가 작전을 뛰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었다.
“그림이 안 좋을 게 뭐요?”
“그것이…….”
“아, 좀 이상할 수도 있겠군.”
당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묵룡부의 소부주를 좌장으로 둔다…… 확실히 백도 측에서 보기에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소.”
“……?!”
“하지만 뭐, 흑도 연맹 총수의 제자가 아니오. 흑도 무림의 실질적인 이인자이니, 배분이나 나이는 크게 상관없겠지.”
연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당관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시오?”
“그런 셈법도 있었구려.”
“댁 입장에서는 그놈이 아들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카 비슷한 놈인 동시에 흑도 무림의 이인자외다.”
“그렇겠소. 아닌 게 아니라, 가주 말이 맞소이다.”
“오히려 자존심이 상할 게 있다면 신마림을 도와주는 것 자체에 있지.”
당관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천효락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범상치 않은 놈이긴 했소. 다만 천형인지 뭔지, 재주는 뛰어난 듯한데 무공을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어 보이더군.”
“천형이 맞을 것이오. 온몸의 내공은 충만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무공 구현이 힘들다…… 술법에 당했거나 심리적인 요인 때문인가 싶어 살펴보았는데, 그런 기색은 없었소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소이다.”
“마도 무림 출신이라 그렇소?”
“그것도 열 받는 부분이지만.”
당형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왠지 숨기는 게 많아 보였소.”
“어쩔 수 없지 않소. 당장 나나 가주가 신마림에 간다면, 가문과 무림맹에 관한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했을 것이오.”
“그런 문제가 아니오.”
뭔가 말로 설명하기 애매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관의 모습에서 답답한 고뇌가 엿보였다.
“뭐, 어쨌든 나는 그놈을 믿지 않소. 그리고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면, 아마 호정도 눈치챘을 거요.”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어째 호칭이 바뀌었소.”
“음?”
“항상 싸가지라고 부르더니 말이오.”
“나랑 장난하자는 거요? 아무리 그래도 애비 되는 사람 앞에서 이름 놔두고 싸가지라 부를 만큼 막 나가는 위인은 아니오, 내가. 그 싸가지가 진짜 내 앞에 있다면 모를까.”
“허허허.”
당관의 말이 웃겼는지 연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관도 따라 웃으며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당관도 많이 바뀌긴 하였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실로 오랜만에 가진 벗끼리의 술자리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술잔을 든 당관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왜 안 오르시오?”
“…….”
잔을 든 연위가 움찔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당관이 보란 듯이 트림을 했다. 꽤 품위 없는 짓이지만, 스스로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 당관은 거침없이 물었다.
“내 보기에 이미 무극이 코앞인 것 같은데.”
연위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것이 보이시오?”
“보인다기보다는 그냥 느끼는 거요.”
“대단하시오. 가주의 무력이 모용가주와 차이가 없구려.”
당관이 대놓고 불쾌함을 토로했다.
“그런 망할 인간과 비교하지 마시오. 그때도 지금도 내가 더 낫소.”
“허허.”
“여하간, 왜 그러는 거요?”
아들인 연호정도, 군사인 제갈문호도, 심지어 공공대사도 연위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언제나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던 연위.
그러나 무림맹에 들어와 처음으로 사귄 진짜 친구 앞에서, 연위는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숨길 수 없었다.
“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과하다니? 무엇이?”
“…….”
“설마 한 가문에 무극을 돌파한 고수가 둘이나 된다는 게 과한 것이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할 셈이오?”
“말 같지도 않은 그 소리가 맞소.”
당관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눈가를 때리는 손바닥에서 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맙소사, 정말이오?”
“그렇소.”
“그럼 소림은? 천하제일에 가장 근접했다는 권신 무허대사에, 이제는 초대 무림맹주인 공공대사도 무극에 올랐지 않소. 소림은 도를 넘은 것이오?”
“아니오.”
“그런데 왜?!”
연위가 쓰게 웃었다.
“호정은 소가주가 되지 않을 것이오.”
“……!”
“나는 차기 가주위를 지평에게 넘겨줘야 하오. 내가 직접 그러겠다 말했소.”
“……부모 자식 간에 충분한 얘기를 했을 테니 더는 궁금해하지 않겠소. 한데 그것이 왜 무극에 오르려는 가주의 욕심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오?”
욕심.
당관은 욕심이라 하였다. 그리고 연위는, 그 욕심이라는 말이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연가는 연가요.”
“선문답은 사절이오.”
“내 대(代)에도, 지평의 대(代)에도 그 크기를 불리지는 않을 것이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보고 자란 게 있는데, 느닷없이 야망을 불태워 본가를 천하제일로 만들겠다며 날뛸 아이는 아니외다.”
“그렇겠지.”
“지평이 가주위에 오르면 여러 방면에서 압력이 들어올 것이오.”
“세대가 교체되었는데 당연하오. 구파일방은 물론 우리 당문도 그랬소. 그러니 더더욱 당신도 무극에 이르러야 하지 않소?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도록.”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본가의 명성은 지나치게 과하오.”
“과하다고 표현할 정도인가?”
“주위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소.”
“그 정도 압박에 굴복한단 말이오?”
“과유불급이라 하였소. 본가의 힘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은퇴한 연후에 검(劍)의 극치를 보고자 한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 무극에 오를 생각은 없소이다.”
“답답하구먼. 나는 당최 이해가 가질 않소이다.”
“허허, 타인의 이해를 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그저…….”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그저, 호정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오.”
“…….”
“호정은 무림의 영웅에서 백도의 변절자가 되었소.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이 호정을 배신자 취급하고 있소이다.”
“…….”
“더 압도적인 힘으로 여론을 짓누르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오.”
당관이 한숨을 쉬었다.
“이보시오, 연…….”
그때였다.
“……!!”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오셨구려.”
연위의 눈이 빛났다.
“광혼의 귀군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