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5화. 제왕들의 눈 (7)
훅!
무성전의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던 연호정은, 적당한 압력을 동반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무겁다.’
전신에 압력을 가해 오는 기운이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기파를 발산하여 압력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존재의 뛰어난 무위를 읽은 연호정이 환상처럼 느끼는 기압이었다.
‘천년 거암과도 같은 힘이다. 흔들림 없는 불상과 같다.’
연호정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공공대사의 등 뒤로 거대한 좌불상이 있기라도 한 양, 편안하고도 강렬한 존재감이 연호정의 오감을 자극했다.
우우우우웅.
흉부 깊숙한 곳에 똬리를 튼 채 잠자고 있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눈을 떴다.
화아아아악!
일순간 방출되는 연호정의 황룡기(黃龍氣).
공공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실로 대단하구먼.”
“…….”
“이 영역에 오르기 전에는 대자연의 힘에 가장 가까운 힘이라고 생각했네. 너무나도 맑고 깊어서, 나도 모르게 다가가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였지.”
“…….”
“하지만 그게 아니었군. 소부주, 자네의 기운은 명백한 의지를 지닌 강력하기 그지없는 신공(神功)일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등 뒤에 후광처럼 드리워진 항마불기가 공공대사를 비범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반면 연호정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위로 올라가 아가리를 쩍 벌린 황금빛 용형(龍形)을 이루었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자와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썼을 뿐 이미 용이 된 자가 서로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화르르르.
불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연호정의 황룡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공공대사는 감히 연호정의 인사를 가벼이 받지 못했다.
반장례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은 실로 일대 종사에 어울리는 기품으로 가득했다.
“아직 정식으로 맹주가 된 것은 아닐세.”
“정말 대단하십니다.”
“음?”
뜬금없는 말에 두 눈에 의아함을 담는 공공대사.
그 눈빛조차도 연호정에게는 신선한 경이였다.
“드높은 깨달음을 지키기 위해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버리셨군요.”
공공대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것이 보이는가?”
“너무나도 선명히 보입니다.”
“허허, 확실히 자네는 대단하이. 이미 시간이 흘러 내 힘을 완전히 다스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티가 났구먼.”
연호정이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반야대능력입니까?”
“그렇다네.”
“범오 스님의 반야대능력과는 사뭇 다르군요.”
공공대사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흘러넘치려는 홍수를 막으려고 익힌 것일 뿐, 정통으로 익힌 것은 범오 그 녀석일세. 힘의 크기는 내게 뒤지겠지만, 그 녀석도 훗날 이 영역에 오른다면 정말 볼만할 걸세.”
“그렇겠습니다.”
“자네가 날 보며 놀라워하듯, 나 역시 이 영역에 들어와 자네를 보니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네. 금강의 부동심도 헛것이 따로 없구먼.”
“하하.”
“마음 같아선 이 대화를 더 나누고 싶네만…….”
공공대사가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공공대사를 보던 모용우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의정군의 대수가 맹주님을 뵙습니다.”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맹주는 아니라니까.”
“아, 죄송합니다.”
“허허허.”
공공대사가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모용 대수 때문에 오셨는가?”
“그렇습니다.”
“어찌?”
연호정이 제갈문호를 힐끔거렸다.
제갈문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연호정이 왜 모용우를 데리고 왔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용 대수를 차기 맹주 후보 자리에 앉히고 싶습니다.”
“……!”
공공대사가 경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모용 대수를 말인가?”
“그렇습니다.”
놀라기는 모용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맹주로 만들겠다고, 맹주가 될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연호정은 언제나 말해 왔다. 다만 이런 건 예상치 못했다.
“여, 연제!”
공석임에도 불구하고 연제라고 부르고야 말았다. 공사 구분에 확실한 모용우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해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맹주로 확정 짓자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처음 대사님을 설득할 때 말씀드렸지요. 초대 맹주로서, 다음 대 맹주를 위한 초석이 되어 달라고요.”
“그랬지. 기억하네.”
“대사님이라면 그 역할을 능히 잘 해내실 것입니다.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잘 이끌어 주실 테지요.”
“과찬일세.”
연호정이 모용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애초에 대사님께서 초대 맹주가 되신 것 자체가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무림맹의 기능적 한계를 깨고 차기 맹주를 위한 뒷받침이 되어 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사실일세.”
“그리고 차기 맹주는.”
연호정이 제갈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젊고 진취적이며 강단 넘치면서도, 누구 못지않은 협의와 지혜를 지닌 자가 되어야 한다.”
“…….”
“맞습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우리는 그런 맹주를 원했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맹주를 원하는 이유는 우리 개인의 보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일세.”
제갈문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일세. 설령 차기 맹주를 전후에 임명하더라도, 그 인물은 조금 전 자네가 말했던 그런 사람이어야만 하네. 마냥 자비롭고 부드럽기만 한 맹주는 전쟁 전후에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군사님은 대사님께서 맹주가 되시는 걸 바라지 않으셨을 겁니다.”
민감하기 그지없는 얘기에 모용우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제갈문호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네.”
“대사님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대사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자애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온 천하에 누가 있어 대사님의 능력을 불신하겠는가. 자네 말마따나 나는 대사님과 소림이 차기 맹주의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랐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대사님은 초대 맹주로서 사람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도 해 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다음 대의 맹주를 향한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젊기 때문이다.
무림, 그중 백도 무림은 보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참 보수적이어서, 젊은이는 나이 든 이보다 모든 면에서 뒤처진다고 보는 풍조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백도 무림만의 편견은 아닐 것이다. 세상 어떤 영역에서건 그와 같은 풍조는 존재한다.
연호정의 명성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가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무림 출도 일 년 안에 누구도 당해 낼 수 없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렸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무극을 돌파하고 비왕을 죽였을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투명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명백한 증거와 명성 높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는데도, 여태 그것을 두고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고 일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모용우의 나이는 서른이 넘었다. 그 정도면 결코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나 경륜 있는 나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맹주가 되어도 불편해할 사람들이 많을 텐데, 모용우 정도의 연배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불만을 불식시킬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인망 깊은 고수들과 집단의 전폭적인 지지, 실질적인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 모두가 믿을 만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 등 세간의 불만을 잠재울 방법은 많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하나같이 확실하지 않다. 성과 대부분이 주변의 도움 덕분이지, 맹주 개인의 능력이 좋아서 이룬 것이 아니라고 여길 위험이 다분한 것이다.
“바로 후계자 수업입니다.”
“후계자 수업이라.”
“모용 대수 하나가 아니라 능력 있는 후계자들을 여럿 두어, 맹주인 대사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공정한 경쟁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반짝였다.
제갈문호 역시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두 눈 가득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은 여러 명문과 헤아릴 수 없는 정파 무문들의 연맹이라, 맹주에게 절대 권력이 가기 힘든 구조다.
당연히 후계자도 없다. 이 세대의 맹주가 퇴임하면 그다음 맹주를 최대한 공정하게 선출하는 것이 백도 무림의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물론 너무 많아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후계자끼리의 경쟁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맹주가 되지 않더라도 많은 걸 얻을 수 있겠지요.”
“위험해.”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자칫 지독한 권력 싸움의 시발(始發)이 될 수도 있네.”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제갈문호가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파격적이라서가 아닌, 지금의 상황과 효율을 생각하자면 매혹적인 방법이긴 합니다.”
공공대사가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모용우의 눈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공대사의 눈빛에 부담을 느끼진 않는 것 같았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연 소부주도 그러했고, 강서 연합의 중추가 되러 간 모용가주도 그러했지.”
“……?”
“그들은 모용 대수를 높이 평가했네. 실제로 나 역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인재라고는 생각하나, 두 사람은 자네에게서 이 땡중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던 모양일세.”
“저는…….”
“설렘이 보이지 않는구먼.”
“예?”
“자네 얼굴에, 설렘은 보이지 않아. 그저 놀라움과 걱정만이 가득할 뿐이라네.”
모용우의 얼굴에 난처함이 어렸다.
공공대사가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왠지 자네가 모용 대수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좋아하다니, 소름 돋는 말씀을 잘도 하십니다.”
“의제가 좋아하지도 않는 의형을 모시는가?”
“막무가내로 의형제를 제안한 건 이쪽이었습니다.”
말만 그렇게 할 뿐, 그 자신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면 절대 의형제를 맺지 않았을 것이다.
모용우의 시선이 연호정에게 향했다.
“연제.”
“예.”
“내 자리를 만든다는 뜻이……?”
“곧바로 맹주가 될 순 없습니다.”
“다, 당연하지! 그리고 나는 맹주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네.”
당황한 모용우는 횡설수설했다.
연호정이 모용우의 양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자리는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명검을 쥐었다고 모두가 뛰어난 검객이 되는 건 아니지요.”
“……!”
“형님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간 바빠서 그것을 잊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연제.”
“천하를 위해 ‘기능’해 주십시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물론…….”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포기하셔도 됩니다.”
도발이 아니었다. 장난도 아니었다.
포기해도 된다는 말은 연호정의 진심이었다. 자리는 만들어 주었으되, 여기서부터는 당신 몫이라는 것이었다.
포기하고 대수의 자리에 머무른다 해도 우리의 관계가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연호정의 말뜻은 그러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연호정을 보는 모용우.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던 공공대사가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다 불러들여 볼까?”
“예?”
“하나같이 괴짜 기질이 있지만, 극에 이른 깨달음 덕에 성천의 고수들은 놀라운 안목을 지니고 있다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이곳에 묶어 둬 볼 겸, 모용 대수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들어 볼 겸 불러 보자는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