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4화. 제왕들의 눈 (6)
“저 자리구려.”
“예, 그렇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제갈문호.
공공대사는 심유한 눈으로 태사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가 보는 것은 바로 태사의였다.
그러나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그런 화려하고 멋스러운 태사의는 아니었다.
간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소박하다. 바닥은 평평했지만 단단해 보였다. 팔걸이와 등받이도 지나치게 딱딱해 보였다.
“틀만 만들어 둔 상태입니다. 원형은 저러하고, 장인들을 불러 고풍스럽게 완성해 볼 생각입니다.”
“왜 그런 수고를 하시오. 이대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예,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빈승을 설득할 만한 말도 다 준비해 두셨겠소.”
“물론입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무림맹주는 백도 무림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이나, 동시에 그만한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입니다.”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빛나야만 합니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일이나, 맹의 핵심 그 자체인 맹주께서 앉는 자리는 마땅한 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군사 말마따나 검소함은 미덕이오. 소박해서 나쁠 게 없소.”
“초대 맹주란 모든 것을 최초로 만들고 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무림맹에, 맹주로서 최초의 발자취를 남길 일이 너무나도 많으실 겁니다.”
“…….”
“부디 태사의를 편케 만들라 명해 주십시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천하를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긴장할 수 있도록 태사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공공대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제갈문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언제나 천하를 위해야 하기에, 태사의에 앉는 순간이라도 피로를 풀라는 의도인 듯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따르리다. 다만 호화롭고 고풍스러운 것은 지나치다 생각되니, 그저 차분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 주시오.”
의견은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는 선을 분명하게 정해 둔다.
아직 정식 맹주로서 제대로 된 일을 맡기 전이지만, 그 언행만으로도 제갈문호는 공공대사가 맹주감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깊은 지혜가 공존하는 맑은 두 눈에 묘한 감정이 어린다.
“불과 수일 전까지만 해도 빈승이 초대 맹주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소.”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저희를 원망하십니까?”
공공대사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백도 무림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 준 사람들을 원망해서야 쓰겠소.”
“하하.”
“다만, 내 능력이 미비하여 앞으로 무림맹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걱정이오. 능력이 없으니 맹의 권위라도 드높이기 위해 이 영역으로 진입했소만, 맹주 일이라는 게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공공대사가 반쯤 포기하고 있던 무극에 자진해서 진입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무극에 오르지 않고도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극지경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무력의 상승은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독에 가까웠다.
그러나 남들만큼 뛰어난 두뇌와 번뜩이는 지혜가 없다면, 남들이 무림맹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뭐 하나는 특출난 면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무극에 올랐다.
그리고 무극에 올라서야, 그리 걱정했던 번뇌와 마주할 방법을 알았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손발이 되어 드릴 사람들은 많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봉공과 장로들이 대사님의 뒤를 받칠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었다. 공공대사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는 발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공공대사는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말없이 높은 천장을 보던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이곳에 모인, 그리고 앞으로도 모일 성천의 고수들 말이오.”
앞으로도 모일 성천의 고수들이라는 말이 걸렸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맹의 이름으로 묶어 두고 싶으십니까?”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쓴웃음 같기도 하고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미소였다.
“무극에 오르고 나서야 알았소.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실감했다고나 할까.”
“예?”
“이 경지는 위험하오.”
“무슨 말씀이신지……?”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무극(無極)이라고 칭해지는 이 경지는, 기실 인간의 조막만 한 두뇌와 영혼이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경지외다.”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무극에 이른 고수가 무극에 관해 논하고 있었다.
저 경지에 이른 자들이 하나같이 성격적 결함을 품고 있다는 것은 제갈문호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성격적 결함을 품은 이들만이 크나큰 재능을 얻어 무극에 오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 경지에 오른 이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지금 공공대사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신기제갈이라 불리며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제갈세가의 주인이었지만, 그조차도 온전히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알 수는 없었다. 하물며 초월자의 경지라고 하는 무극에 대해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으리라.
“광증이나 주화입마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까?”
“광증에 걸릴 수는 있겠소. 다만, 주화입마에 걸릴 일은 없을 것이오. 군사께서 말씀하시는 주화입마가, 사람의 신체와 정신이 붕괴되어 죽음을 맞거나 폐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면 그럴 일은 드물 테지.”
순간 제갈문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입마에 빠질 확률은 없지만, 미쳐 버릴 확률은 있다는 말씀입니까?”
“스스로의 상태를 끊임없이 자각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광증에 빠질 수 있을 거요.”
“……!”
“그리고 그 광증이 나 자신을 파괴 욕구로 이끈다면…….”
제갈문호가 침을 삼켰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무신(武神)의 힘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광마(狂魔)가 강림하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본사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은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을 모두 다스리는 최상의 심법 공부외다. 특히 수많은 불경 법문을 따와 정신을 다스리는 데에 특화된 심공(心功)이기도 하오.”
“예, 전에 대사님께서 말씀하신 걸 기억합니다.”
“빈승은 지금 무상대능력의 힘을 상단전에서 철저하게 제외시켰소.”
“……예?”
“소림이능(少林二能), 본사는 두 가지의 대능력을 품고 있소. 하나가 무상(無上)이고, 다른 하나가 반야(般若)외다.”
“……!”
“반야대능력은 깨달음의 무공이오. 나는 그 능력을 깨우쳤음에도 일부러 버려두었소. 반야대능력을 연마하다가는 나도 모르게 무극에 이를 것 같아서.”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하나 무극에 도달한 그 순간, 나는 상단전을 반야대능력으로 완전하게 채워 놓았소.”
반야대능력은 곧 지혜의 힘이요, 깨달음의 무공이다. 무상대능력 역시 극에 이른 항마불기(降魔佛氣)지만, 반야대능력에 비하면 조금은 세속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들은 무상대능력을 익힌다. 반야대능력이야 익히고 싶다 하여 마음대로 익힐 수도 없는 무공이지만, 단순히 무력적인 면을 봤을 때 무상이 반야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야대능력의 지혜기(智慧氣) 없이는 온갖 미혹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무상은 반야를 따라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음에도 깨달음의 한 조각을 버린 이유외다. 더 막강한 무(武)를 버리고, 대신 상단전을 반야에게 맡겨 두었소.”
공공대사가 어느새 눈을 뜨고는 쓰게 웃었다.
“만에 하나, 천만 분의 하나라도 무림맹주가 광증에 걸려 사고를 치면 천하가 무림맹을 어찌 보겠소이까?”
“……그러셨군요.”
“내게는 더 강해지는 것보다, 내 정신과 혼(魂)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이 만 배는 더 중요하오.”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극에 도달한 공공대사는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더 강한 힘에 목숨을 건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욕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바, 무극에 도달한 이들의 욕구는 여느 사람들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한데 그 영역에서도, 공공대사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았다.
무력 이전에 정신력 자체가 차원을 달리한다. 세상에 무신이라 불리는 초월자가 많지만, 공공대사만큼 위대한 초월자도 달리 없을 것이다.
“빈승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소?”
“…….”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대사님께서는 반야대능력의 힘으로 정신적 파탄의 가능성을 줄이셨습니다.”
“그렇소.”
“그러나, 다른 성천의 고수들에게는 그러한 대비책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요.”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저마다 한 수는 있을 것이오. 세상 어느 누가 스스로를 잃은 광마가 되고 싶겠소? 성천에 이름을 올린 이들 중, 불안정한 정신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오.”
“……그렇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성천은 제각기 성격적 결함을 안고 있소.”
“무신(武神)으로 추앙받는 초월자들이, 여느 사람들보다도 못한 불안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러나 군사의 말씀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외다.”
제갈문호가 탄식을 토했다.
“그렇다면, 성천의 고수들은 머리에 화탄 하나를 심고 돌아다니는 셈이 아닙니까?”
“정확한 비유외다. 그렇소. 성천의 고수들은 언제라도 신기(神氣)에 정신이 침략당할 위험을 안고 사는 것이오. 그리고…….”
공공대사는 남궁승과 종리백을 떠올렸다.
“검제와 도제, 두 분 선배는 이미 어느 정도 신기의 침범을 받았소.”
“……!!”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공공대사가 말하는 신기란 무공에서 말하는 신기가 아닌, 말 그대로 귀신(鬼神)을 뜻하는 신기다. 신병(神病)을 앓는 술사들이 ‘신기가 들렸다.’라고 할 때 말하는 바로 그 신기였다.
“그래서 빈승은.”
공공대사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그들 모두를 무림맹의 이름 아래 품고 싶소. 정확히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싶소이다.”
“……과연 그분들이 그러마, 하고 수긍하겠습니까?”
“모르겠소. 거부한다면, 어떻게든 설득해서라도 맹에 앉혀야지 별수 있겠소이까.”
직책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고수들인 데다가 배분도 높고 나이도 많으니, 무상(武相)이나 호법(護法)의 지위를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나저나 태사의 하나로 시작된 얘기가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불안감에 입술을 매만지던 제갈문호는 문득 드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대사님.”
“말씀하시오.”
“도검의 무제(武帝) 분들께서는 이미 신기의 침범을 받았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조금이지만.”
“그렇다면…….”
제갈문호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어렸다.
“연 소부주는……?”
그때였다.
“안에 계십니까.”
한참 멀리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지만,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연호정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와 함께 오고 있는 듯했다.
“소부주입니다. 무성전에 들어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공대사가 무성전의 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