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화. 제왕들의 눈 (4)
번쩍!
눈이 뜨였다.
천천히, 부드럽게 뜨였는데도 두 눈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주르륵.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상단전에 남은 탁기가 시신경을 타고 눈물과 함께 배출되는 것이다.
그 눈물은 번뇌를 씻어 낸 자의 상쾌함과, 또 다른 번뇌를 맞이할 사람의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푸스스스.
수염이 빠졌다.
정확히는, 철사처럼 뻣뻣했던 수염들이 바스러지듯 부서지며 떨어졌다. 눈썹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남은 수염과 눈썹은 시커멓고 굵으면서도 놀라우리만치 고와 보였다.
자글자글했던 주름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특유의 생김새와 깊은 눈빛 덕분에 중년 이상의 나이로는 보이지만, 피부만 보자면 이십 대 홍안의 청년이라 해도 믿을 만했다.
후우우우.
가볍게 부는 바람에 실린 말 못 할 감정들.
공공대사의 뒤편, 정자에서 고즈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남은 한 줄기 미련과 탁기마저 바람에 실어 보냈거늘, 돌아보니 그 얼굴에는 또 한 줄기 번뇌가 벼락과도 같은 모양으로 새겨져 있구나.”
가부좌를 푼 공공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한나절은 지났을 것이다. 한데도 방금 앉았다가 바로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유연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돌렸다.
정자 위에는 두 명의 노인이 차인지 술인지 모를 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선이 굵어 보이는 오관의 소유자, 남궁승이 웃으며 물었다.
“도달한 곳은 어떠시오?”
공공대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그렇겠지.”
“극락이 제아무리 아리따워 보여도, 그곳에 발을 들인 부처가 아니고서야 윤회를 벗어난 각자(覺者)의 즐거움을 어찌 실감하겠습니까?”
“호오.”
“제 비록 극락은커녕 불법의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나, 보고 듣고 맡는 것이 직접 딛고 만지고 스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남궁승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유구한 무림사에서 이와 같은 영역에 오른 자는 한 시대에 셋을 넘지 않았소. 지금과 삼백 년 전을 제하고 말이오.”
“예.”
“그처럼 경이로운 영역을 짐작만으로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남궁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셨소. 이 영역에.”
공공대사가 반장례를 취했다.
“돼먹지 못한 땡중의 말 없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 없는 부탁이란 다름 아닌 호법을 말함이었다.
지금 맹 내에서 공공대사의 힘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중 두 사람이 바로 남궁승과 연위였다. 그 두 사람이라면 범부의 윤회와도 같은 무한의 경지에 든 육신에서 터져 나오는 강력한 힘을 제어해 줄 수 있다.
공공대사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그러나 공공대사는 두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부탁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남궁승이 웃으며 말했다.
“고요히 이르실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실 필요가 없었소. 대별산 어느 산봉우리로 가서 홀로 드높이 오르셨으면 그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가 달리 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삼가 들려주시겠소?”
공공대사의 눈이 남궁승에게 닿았다.
순간 남궁승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참으로 묘한 눈빛이다.’
맑고 깊다. 그윽하면서도 샛별처럼 반짝인다.
깨달음을 얻은 고승의 눈빛이라기보다는 속세의 난잡함을 모르고 자란 순수한 아이의 눈빛에 가깝다.
살벌한 무림의 일에 적극적으로 끼어든 소림 방장의 눈빛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차라리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진기(眞氣)를 두 눈 가득 박아 넣었다면, 이보다는 덜 놀랐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다.’
남궁승은 감탄했다. 아니, 감동했다.
‘역근과 세수 이전에, 출중한 깨달음이 아니라면 환골과 탈태는 불가능에 가깝다. 거기에 소림의 무상신공을 연마했으니, 단 한 번의 비상(飛上)으로 삼군(三君)에 가까운 무(武)를 거머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어. 한데…….’
육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기운.
그 기운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저 눈빛이었다.
‘일부러 자신의 깨달음 한 조각을 버렸다.’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공공대사 역시 무극을 돌파하였기에, 남궁승 역시도 더는 그를 훤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큰 깨달음을 본인의 의지로 포기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셨소?”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공공대사는 남궁승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만해졌을 것입니다.”
“오만이라니?”
“이 땡중은 이제야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번뇌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하여 불법을 멀리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부처가 될 수 없다면 더더욱 노력하여 불법의 끝자락이나마 잡아 봐야지요.”
남궁승이 탄식을 토했다.
감탄과 감동, 그리고 안타까움이 섞인 미묘한 탄식이었다.
“역시나, 무인이기 전에 승려란 것이오?”
“그렇습니다.”
“내, 그대가 초대 무림맹주가 되었음을 들었소.”
맞은편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종리백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림맹주란 백도 무림을 총괄하는 자리요. 총괄하는 자리는 곧 누구보다 많은 책임을 지는 자리외다. 때로는 냉혹하고 비정한 판단을 내릴 때도 있어야 하는데, 어찌 무인이 아닌 불자의 길을 택하셨소?”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더더욱 불자로서의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왜 그렇소?”
“균형이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묘한 말이었다.
남궁승은 공공대사의 말뜻을 알 것도 같았고, 도통 모를 것도 같았다.
스르륵.
남궁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초대 맹주께 인사드리오.”
“그런 인사는 감당키 어렵습니다.”
“주책없는 늙은이는 현역에서 물러났소. 다만 가문의 아해들을 걱정하여 예까지 왔으니, 맹 속이 아닌 손님일 뿐이오.”
“…….”
“손님으로 왔으니 주인 된 분께 마땅히 예를 취해야지.”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남궁승이 정자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뭐 하고 있소? 손님으로 온 것은 마찬가지이니 주인 된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지.”
종리백이 투덜거렸다.
“나는 그 양반 도와준 거 없소.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만들면, 그때 아양이나 떨어 보겠소.”
주인, 손님.
이전의 공공대사였다면 그 호칭에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봉공들을 뵈러 가야겠습니다. 앞으로 이틀은 이런저런 일로 바쁠 터이니, 사흘 뒤에 절 찾아오시면 됩니다.”
종리백이 피식 웃었다.
“뭐, 그럽시다.”
그 말을 끝으로 공공대사가 사라졌다.
남궁승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금강부동(金剛不動)이라.”
한 줄기 바람에 천 근의 내력이 실렸다. 하지만 공공의 움직임은 홀연하기 그지없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질 않았다.
세찬 비바람을 맞고도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버틴 거대한 바위처럼.
공공대사가 남기고 간 무겁고 안정적인 깨달음 한 줄기에 남궁승이 눈을 감았다.
“천하는 넓고도 넓어, 이토록 뛰어난 재인(才人)들이 많은 법이다. 내 핏줄들 역시 그 천재의 씨앗을 발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너무 욕심부리지 마시오.”
남궁승이 몸을 돌렸다.
정자에 앉아 술을 홀짝이던 종리백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십 년을 붙잡고 가르친 제자 놈도 이제야 뭘 깨쳐 가고 있소이다. 나보다 못하지 않은 재능을 일깨우는 데만 십 년이었소. 당신은 그것도 안 했잖소?”
“……그랬지.”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시오. 그저 틀린 길로 가는 것만 바로잡아 주시오. 그것이 당신 할 일이야.”
얼굴을 마주한 게 이번이 처음이지만, 왠지 종리백의 말은 오랜 친구의 격의 없는 조언처럼 편안하고 진중하게 들렸다.
남궁승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번뇌에 휩싸인 사람은 나일지도 모르겠소.”
물끄러미 남궁승을 보던 종리백이 응차,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남궁승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더 안 드시오?”
“적당히 한잔하다가 도검의 우위나 논해 보려고 했는데, 그 낯짝이 원체 어눌해서 그럴 기분이 사라졌소이다.”
“내 번뇌와 승부는 다른 영역에 있소만.”
“번뇌를 불살라야 승부도 재미있어지지. 게다가 지금은 당신보다 재미있는 상대가 둘이나 더 있소.”
“둘이라면……?”
종리백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이리 많은 성천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유례가 없는 일 아니오? 그렇다면 나 이외에 제(帝)와 왕(王)으로 불리는 이들의 깨달음을 골고루 탐닉해 봐야겠지.”
* * *
“후우.”
훈련이 끝난 의정군을 해산시키고 홀로 남아 검을 휘두르는 모용우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차가운 산의 공기도 모용우의 강렬한 열정과 불같은 욕구를 식혀 주진 못했다. 대검(大劍) 탕마신검을 쥔 그의 손에 희미한 떨림이 일었다.
‘더는 휘두르지 못하겠군.’
괜찮다.
남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지만, 모용우는 근력과 내력의 한계를 쏟아붓는 수련을 하루에 두세 번씩 반복했다.
그러고도 부대원들 앞에서 멀쩡할 수 있었던 건, 극단적인 수련 후의 빠른 회복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웅.
모용우의 온몸에서 푸르른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건곤팔극심법(乾坤八極心法)을 운용하자마자 짙푸른 기운이 사방의 자연기를 끌어당긴다.
무섭도록 연마된 심법이었다. 무공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 무공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개량한 모용우의 깨달음이 빛났다.
‘세상은 넓구나.’
고작 일각이었다.
일각 만에 소모한 내공의 삼 할을 채웠다. 누구도 쉬이 믿기 힘든 속도였다.
그러나 모용우는 부족함을 느꼈다.
‘천하에 재인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나는 언제부터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었는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맹으로 돌아온 연호정을 마주한 모용우는 말 못 할 충격을 느꼈다.
한데, 와중에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어 더 깊은 경지로 진입했다.
맹에 들어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기간이 사흘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성취였다.
‘무엇이 부족한가.’
의정군의 대수로서 휘하 군병들을 통제하고 연마시키는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군병들을 책임진다고 하여 무사 개인으로서의 연마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그 역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연제는 달랐다.’
연호정의 재능은 자신보다도 훨씬 우월하다. 모용우는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재능이 뛰어나서 자신보다 빨리 무극에 오른 것은 아니다. 모용우는 그것을 알았다.
‘연제는 무극에 오르기 전에도 휘하 군병들을 잘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빨리 성천에 도달했어. 오직 재능 하나로 오른 자리가 아니다.’
땀은 연호정과 비슷하게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
실전 경험의 차이일까? 물론 그 역시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달라.’
모용우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그 어떤 요인을 가져와도 연제의 성취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일까.’
홀로 번민에 휩싸인 모용우.
멍하니 연무장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시야가 어두워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들려오는 한 줄기 목소리.
“고민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고개를 들었다.
순간 모용우는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자신의 앞에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황금빛 무신(武神)이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만, 어째 분위기가 묘하십니다.”
“연제.”
“예.”
모용우의 눈이 떨렸다.
“나를 깨우쳐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