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화. 제왕들의 눈 (3)
연위는 물론 묵비와 강량, 진양과 연지평을 불러 모은 연호정은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또 떠나시는 겁니까?”
연지평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오랜만에 본 형이다. 그 형이 또 무림맹을 나간다고 한다.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을 것 같았다.
“별수 없지.”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신마림의 주인은 천하제일을 논하는 강자다. 최소한 성천의 강자 한 명은 가야,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겁니다.”
“다만…….”
연위가 저도 모르게 막원을 바라보았다.
막원이 씨익 웃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설마하니 아우 혼자 가도록 정 없이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허허,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이 동생이지, 저는 이 친구에게 남은 일생을 걸었습니다.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진 그렇지요.”
막원이 연호정의 어깨를 두들겼다.
“동생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목숨을 내놔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주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형님이 함께 가 주신다면 일이 더 쉬워지긴 할 겁니다.”
“별놈들이 아니라면 훨씬 쉬워질 것이요, 생각보다 강한 놈들이 우글거린다면 나보단 전투 부대를 끌고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게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아직 천 공자에게 그쪽 상황을 듣지 못했지만, 어떤 싸움이든 저격(狙擊)에 특화된 사람이 있으면 좋을 거다.”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너무 먼 길이지만, 뭐 괜찮겠지요.”
강량이 손을 들었다.
“저도…….”
“너와 진양은 여기에 남는다.”
“예?!”
강량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왜요!”
진양이 팔꿈치로 강량을 쳤다.
“뭘 그렇게 발끈하는 거야? 무림맹 밥 맛있더만. 괜히 귀찮게 먼 길…….”
“아오, 형님은 좀 닥치고 계셔!”
“이놈 자식이? 야, 인마! 암만 그래도 닥치라니!”
연호정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막 나가는 대화를 멈추었다.
“아버지.”
“오냐.”
“두 사람을 잘 부탁드립니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안 그래도 두 사람의 무공을 확인해 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몹시 크더라.”
강량과 진양이 움찔했다.
“그리고.”
연위는 솔직하게 말했다.
“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묵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죄, 죄송해요.”
“음? 하하, 어찌 죄송하다는 것이냐? 모자람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미안하거나 죄송할 일이더냐?”
“하지만…….”
“스스로 그 방면의 일가를 이루고 싶다면, 모자람을 인정하고 정진하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모자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더냐? 이 나도 모자라고, 우리보다 강한 호정도, 막 선배도 제각기 모자란 부분이 있다.”
연위가 막원을 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막원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아직도 모자란 게 많습니다. 솔직히 조금 전 도제 선배를 보고 찔끔했지요. 막 싸움으로 끌고 가면 어떻게든 싸움이 될 것 같긴 한데, 넋 놓고 붙는다 하면 팔십 합을 넘기기 힘들 듯싶었습니다.”
“상당한 차이로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보다 강할 거라고는 예상하였습니다만, 정말이지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특히 상성이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연위가 묵비를 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성천에 이른 고수에게도 부족함은 있느니라.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너의 무공이 강량과 진양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나 아직 단련의 여지가 분명하다는 것인데.”
연위가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비아는 그냥 둘 생각이냐? 내가 보기에, 비아 역시 집중만 잘한다면 짧은 순간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할 것 같다만.”
“그래서 이 녀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과 함께 가 보고자 합니다.”
“으음?”
모두의 시선이 연호정에게로 쏠렸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궁술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마음먹고 익히면 순식간에 달인이 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무림에서, 사출병기(射出兵器)에 한해서만큼은 당당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의 주인이 있잖습니까?”
“……호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맹주 선출 건으로 온 사람이다. 같이 손발을 맞출 수 있겠느냐?”
“전에 한 번 맞춰 봤습니다. 게다가 대량 살상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누구 못지않으니,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 사람과 함께 간다면, 굳이 전투 부대를 끌고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연호정이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의정군 소속 무당의 옥청과 지평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연지평은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연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표정은 담담했다.
“지평을 데려가겠다?”
“예.”
“달리 생각이 있느냐?”
“지평의 재능은 대단합니다. 그간 저와 함께 무림을 쏘다니며 전투를 치렀다면, 지금쯤 무종을 넘었을 겁니다.”
“대신 지금과 같은 안목을 얻을 순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그 살벌한 경험이 없어도 지평은 잘 컸습니다. 안목과 깨달음만큼은 일파의 주인 못지않지요.”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지평의 놀라운 재능은 굳이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의 가르침이 필요치는 않을 거라고 보았습니다.”
“한데?”
“지금은 다릅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 경지에 오르고 나니, 지평에게도 전해 줄 만한 것이 생긴 듯합니다. 하여 함께하고 싶습니다.”
연지평이 감격한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놈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라. 말이 좋아 건네줄 게 있다는 것이지, 결국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사지(死地)로 가는 것이다. 긴장하는 것이 좋아.”
“예, 긴장하겠습니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얼굴이구만.”
피식 웃은 연호정이 연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내가 잘 지키고 있으마. 동생 잘 챙기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 외에 또 함께할 사람이 있느냐?”
“부선이 있습니다.”
“부선이라면, 너의 사매를 말함이더냐?”
“그렇습니다. 아마 사흘 안으로 곡경 선배와 함께 맹에 당도할 것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군 선배라…… 혹, 맹주 건으로 부른 것이냐?”
“그렇습니다. 바로 묵룡부로 갈 생각이었던 듯한데, 그래서야 안 되지요. 어딜 먼저 들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겁니다.”
“그래, 잘했다. 만약 귀군 선배가 곧장 묵룡부로 향했다면, 맹주 선출 기간과 어우러져 무림맹과 묵룡부 사이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생겼을 것이다.”
“나아가 한번 생긴 긴장감과 의심은 어지간해선 사라지지 않지요. 무림맹부터 축하하러 온 연후에, 무림맹 측 인사와 함께 묵룡부로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 사소한 갈등을 만드는 주체가 황제이고 귀군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소한 문제가 될 수 없다. 초대 무림맹주 임명식을 앞둔 시기에 황궁 측에서 묵룡부로 혼사를 위해 사람을 파견하면 그림이 영 애매해지는 것이다.
서로에게는 괜찮을지언정 어정쩡하게 중간에 낀 이들이 눈치를 보게 된다. 별문제 안 생길 수도 있지만, 굳이 여지를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럼, 어디 보자.”
연위가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너와 막원 선배, 그리고 비아와 지평이 간다. 의정군의 옥청 도사가 함께할 것이며 ‘그’와 네 사매 되는 사람도 함께 가겠구나.”
“그렇습니다.”
“흐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서로 손발을 맞춰 본 사람들이 많지 않을 텐데, 괜찮겠느냐?”
물론 기우라면 기우일 것이다.
막원의 능력은 연호정에 필적한다.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어도 알아서 잘할 것이며, 그걸 떠나서 존재 자체가 엄청난 도움이다.
묵비와 ‘그’는 연호정과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있지만, 연지평과 옥청을 함께 데리고 간다고 하였다. 두 사람의 재능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뛰어난 재능이라도 실전에서는 허무하게 스러질 수 있다.
게다가 연호정의 사매인 부선은 집단전에 대한 경험 자체가 없었다.
“잘될 겁니다. 안 되도 되도록 해야지요. 차후 전쟁이 터지면, 손발 맞춰 본 적 없다고 칼 맞아 죽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네 말이 맞긴 하다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면, 이따 다시 오도록 하지요.”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이냐?”
“예. 먼저 안 오면 또 된통 성질을 부릴 겁니다.”
“옷이나 갈아입고 가거라. 온몸이 피투성이다.”
막원이 헛기침을 했다. 연호정을 피투성이로 만든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막원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천무신병기, 극치에 이른 신공 덕분에 별다른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만큼은 상당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온 연호정이 연위에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그리고 아버지.”
“음?”
“아버지께서도 이제 슬슬 마음을 정하시지요.”
순간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가지고 계신 것조차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요.”
“……그래.”
“굳이 오르지 않는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짐작은 하지만, 오래 끌어서는 역시 좋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명심하마.”
“예.”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파군각을 나섰다.
* * *
쉬이이이익! 쿵!
연호정이 ‘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선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피이이이잉! 팅!
공기를 찢는 소리, 철 조각을 튕겨 내는 소리.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다. 눈에 띄는 충격파나 무시무시한 살기 따위는 없었지만,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확실히.”
연호정이 대놓고 담벼락 위에 올라선 걸 알고 있음에도, 당관의 시선은 상대에게 꽂혀 있었다.
“관일공이라…… 대단하군. 예전보다 훨씬 더 막강해. 그때도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더 오를 곳이 없는 수준처럼 보이네.”
단창을 회수한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암기술이었소. 손톱만 한 암기 하나를 튕겨 내는 것만으로도 상반신 전체가 흔들리는군.”
“세상이 급변하고 있지 않은가. 독경은 아버지 덕분에 끝을 보았지만, 암기술은 아니야.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네.”
“더 성장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소. 그래서 더 섬뜩하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는…….”
“도달치 못한 영역을 유추해 보고 싶진 않네. 여하간, 잘 봤네.”
패율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비무를 받아 주셔서 감사하오.”
“나도 많이 배웠네.”
관일창과 관일검은 빛살과도 같은 자격(刺擊)으로 일격필살의 결과를 낸다.
강하고 놀라운 무공이지만, 희한하게 그 기반은 여느 창술과 검법보다는 궁술이나 암기술 같은 사출기(射出技)에 더 가까웠다.
패율이 며칠 동안 당관에게 비무를 부탁한 이유였다. 덕분에 패율의 무공 역시 고작 며칠 만에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관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연호정을 보았다.
“뭐냐, 싸가지? 기별도 없이?”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일이냐, 너는?”
왜일까.
두 사람의 성격과 말투가 너무나도 닮았다고 생각하며, 연호정이 바닥에 내려섰다.
“패율 선배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차라리 잘됐습니다. 두 분 모두 닷새 안쪽으로 출맹 준비 좀 해 주십시오.”
“뭔 소리야, 갑자기?”
“뭔 소리겠습니까. 제 팔자 빤히 아시면서.”
“허이구, 또 피 보러 가는 거냐?”
“그렇게 됐습니다.”
“전생에 뭔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냐, 너는? 이번엔 어딘데?”
“청해성이요.”
“팔자 한번 진짜 사납구먼.”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연호정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의외인 것은 당관이었다. 집안일이 남았을 텐데, 용케도 선뜻 함께해 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관은 대신할 만한 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호정은 하루도 안 되어 함께 갈 고수들을 몽땅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