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69화 (869/963)

869화. 제왕들의 눈 (1)

“…….”

노승의 눈이 뜨였다.

허연 눈썹이 마치 수염처럼 길었다. 눈을 떴는데도 안구의 반을 가리는 그 눈썹은 마치 늙은 달마의 눈썹과 비슷했다.

“……거 녀석 참.”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갈라져 탁해진 목소리, 몸에 걸친 가사가 땅바닥 전체를 덮을 듯 펑퍼짐하다. 어딜 봐도 생기(生氣)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르고도 마른 몸. 나이를 짐작기 어려운 그 외양은 사람보다 귀신에 가까웠다.

“번뇌란 눈송이와 같은 것. 차다고 피하면 무서울 것이요, 아름답다고 여기면 설렐 것이거늘, 어여쁜 것을 알고도 고뿔에 걸릴까 무서워 피하더니만, 이제야 그 서늘한 불꽃에 손을 댔는가.”

당장이라도 껄껄껄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말투가 그러했다.

그토록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기묘한 승려였다.

“나아가거라, 이놈아. 이미 가르칠 건 삼십 년 전에 다 가르쳤느니, 그간 네가 빛에 이르지 않은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너의 의지 때문임을 안다.”

제자의 그러한 선택을, 스승인 노승은 나쁘지 않다고 보았다.

아니,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넘치는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연마 과정을 통해 궁극의 영역을 코앞에 두었거늘, 그 영역에 들어서면 번뇌에 사로잡힐까 두려워 손을 뻗지 못했다.

무공보다 번뇌와 불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젊은 날의 고뇌라면 모르되 십 년, 이십 년이 지나고도 고뇌를 떨치지 못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못난 짓이다.

다행히, 누구보다도 뛰어나지만 바보처럼 못나고 멍청했던 제자 놈이 이제야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주르륵.

노승의 눈가에 탁한 진물이 흘러내렸다.

진물인데, 그 색이 까맣다. 하지만 점도가 딱 진물이었다.

피눈물이라고 오해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흘러내리는 진물의 색과 점도는 그렇게나 진했다.

노승이 소매로 진물을 닦았다.

치이익!

미약한 연기와 함께 진물을 닦아 낸 소매가 살짝 타들어 갔다.

“더 심해지는구나.”

노승은 씁쓸함을 느꼈다.

세상에는 알아서 좋을 것이 있고, 알아서 안 될 것이 있는 법이다.

노승은 알아서 안 될 것을 알았다. 그러나 몰라서도 안 될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놀랍구나. 도대체 ‘그’는 어찌 이것을 삼 세기가 지나도록 버티고 있었을꼬.”

탄식하며 허공을 보는 노승.

탁한 진물이 흘러나왔던 왼쪽 눈의 동공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일순간 시야를 잃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우웅. 우웅.

노승의 몸에서 이는 황금빛 광채가 명멸을 반복했다.

순도 높은 기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몇 년 안에…….’

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은 없었다. 이왕이면 석가의 깨달음을 얻어 극락에 이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깨달음을 얻는 대신 천하를 위해 한 몸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한 줌 뼛가루가 되기 전에 한 번은 들렀으면 좋겠거늘.’

무림의 권신(拳神)이 아닌, 소림의 신권(神拳)으로서 제자에게 전해 주고 싶은 깨달음이 있었다.

물론 제자의 재능이라면 언제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스스로 깨칠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격변하고 있었다. 당금의 천하는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그리고 음침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 혼돈의 세상 속에서 제자가 큰일을 해낼 수 있도록, 차후 소림의 역사가 피에 물들고 반파될지언정 명맥만은 유지될 수 있도록 이 깨달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 또한 욕심일런가…… 하기야 세상사 파도와도 같은 법, 저 하늘이 보기에 우리의 대립은 얼마나 작고도 하찮게 보일는지.’

어쩔 수 없었다.

노승은 아직 승려였다. 죽을 날이 머지않았지만, 부처가 되는 길은 요원한 듯싶었다.

사람으로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니만큼 오욕 칠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제자와 산사(山寺)를 위해 뭐 하나라도 주고 갔으면 좋겠는데.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노승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또다시 발작이었다.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발작이 돌아오는가.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훅!

광대무변한 소림의 신공으로 치솟는 기운을 억누르는 노승.

소림의 전대 노승들이 아니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숭산의 암중 거처에서, 노승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 * *

“……!!”

격전지를 보는 제갈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효락이야 말할 것도 없으며, 평소 부동심으로 이름 높은 승현진인조차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어? 오셨습니까?”

피범벅이 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니 참으로 당황스럽다.

그사이에 호흡을 정리한 듯, 손을 흔드는 연호정의 모습은 일견 해맑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의는 그런대로 멀쩡했지만, 상의는 어디로 갔는지 굴강하게 단련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위로 온갖 찰과상과 베인 상처가 한가득한데도 별로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자네에게 볼일이 있으신 모양일세.”

“그렇겠지요.”

막원의 꼴도 정상은 아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연호정보다 더 험해 보였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시커먼 쇠봉을 어깨에 턱 하니 걸치고 있는데, 그 쇠봉 끝이 기이한 각도로 휘어져 있었다.

천무신병기, 백병신군 막원의 절대신공으로 보호받는 쇠봉이 휘어질 정도라면 그야말로 보통 대단한 격전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초고수가 벌인 격전의 공기는 무림맹 외성까지 흔들 정도였다. 절대고수의 의념이 실린 기운이 아닌 말 그대로 충격파였던지라, 외성에 거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두 사람이 비무를 벌인다고 말을 하고 갔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을 것이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 꼴이 뭔가?”

공적인 대우를 해 줘야 하는데, 너무 기가 막힌 광경이라 저도 모르게 그리 묻고야 말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다가왔다.

“형님과 비무 좀 했습니다. 새로운 무공을 창조했으니, 그 무공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알아봐야지요.”

“허어.”

승현진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해서, 만족은 했는가?”

“물론입니다.”

승현진인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반경 오십여 장이 넘는 대지가 온통 초토화되어 있었다.

얼마나 막강한 힘이 충돌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하지만 승현진인이 눈여겨보는 흔적은 따로 있었다.

“저것은……?”

“역시 보이셨군요.”

승현진인의 눈이 흔들렸다.

“태극권(太極拳)의 전사발경(轉絲發勁)……?!”

“예.”

파앙!

주먹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친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직선의 힘이 강하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부드러움의 극치라는 태극권의 전사발경을 가미하면 막강한 파괴력과 진압 능력을 얻을 수 있지요. 언제고 하나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비로소 제 무공과 융합시킬 수 있었습니다.”

“허어!”

“장문진인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절이 가능하겠는가?”

“예.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형님과 겨룬 것입니다.”

승현진인이 혀를 내둘렀다.

“나중에 꼭 무당에 들르게나.”

“예?”

“태극권의 깨달음 한 줄기만 전수했거늘, 그걸 기반으로 무당의 무(武)를 통째로 가져가 버렸군. 세상에 이런 도둑놈이 또 있겠는가.”

“그렇습니까.”

“다시 토하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자네의 그 깨달음 일부를 멍청한 도사 놈들에게 전해 주시게. 그 정도는 받아야겠어.”

“반드시 시간을 내겠습니다.”

“제발 그래 주게. 거참,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기로서니 태극권 하나로 무당 무공의 정수를 가져간 녀석도 있거늘, 어째 그놈들은 반의반도 못 가져가는 건지.”

혀를 차는 승현진인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어렸다.

괜히 멋쩍어진 연호정이 헛기침을 하곤 제갈문호를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제갈문호가 천효락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격전지를 둘러보던 천효락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곤 입을 열었다.

“소부…….”

“신마림의 일을 해결해 달라?”

순간 천효락이 움찔했다. 아름답기까지 한 그의 얼굴에 짙은 놀라움이 어렸다.

“그걸 어찌……?”

제갈문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일고여덟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신마림에 변고가 터졌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먼 길을 왔을 터인데, 현재 무림맹이 너무 어수선하지요.”

“……!”

“부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부담 없이 시켜 먹을 사람이 나 말고 또 있겠습니까?”

제갈문호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좀 마음이 아픈데.”

연호정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사실이잖습니까?”

“그렇긴 하네만.”

“그리고 그게 맞기도 합니다. 애당초 무림맹주 건 때문에 특사로 온 것인데, 막상 ‘그분’께서 마음을 제대로 드셨으니 딱히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커험!”

“게다가 신마림이라면 천하제일을 논하는 마선(魔仙)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최소한 성천급의 고수가 가야 수지가 맞지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성천이야 자네 말고도 있지만, 검제 노선배께 부탁드리기는 어려운 일일세. 그렇다고 백병신군 선배님께 도움을 청하기엔 인연이 없고, 나아가…….”

“도제 노선배님도 오셨군요.”

“음?”

“오셨습니다. 길이 엇갈린 모양이에요.”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놀란 표정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오셨구먼.”

연호정이 천효락을 보며 말했다.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떠나야 할 정도로 다급하지는 않을 거요. 그랬다면 서신을 보냈지, 그대가 직접 왔을 리는 없으니까. 내 말이 맞소?”

“……맞습니다.”

“그렇다면 무림맹주 임명식까지 보고 난 연후에 가도 괜찮겠소?”

“아쉬운 처지에 이 이상 또 무슨 부탁을 하겠습니까. 마음은 급하지만, 그저 도와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시군. 역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오.”

연호정이 제갈문호에게 물었다.

“무림맹주 임명식은 언제입니까?”

“선포는 사흘 뒤에 할 것이고, 최대한 단출하게 할 예정이라 얼추 닷새 정도로 보고 있네.”

“여론의 반발은 어찌하려 하십니까?”

소림 방장 공공대사가 초대 맹주가 된다. 그것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진행된 맹주 선출은 여러 사람에게 통보식으로 전해질 것이고, 그것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대놓고 반발은 못 할 것이다. 그래도 시간을 더 들인다면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걸, 다소 급하게 처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불만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네. 대사님의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어.”

“그렇군요.”

“어찌 되었든 자네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일세. 안 그래도 연가주나 묵룡부주를 볼 낯이 없거늘.”

“물론 저 혼자서는 안 되겠지요. 여러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음, 함께할 병력은…….”

“제가 추리겠습니다. 최소한으로요.”

“그러시겠는가?”

“예.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한지는 천 공자와도 얘기를 나눠 봐야 하니까요.”

“그래,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항상 궂은 일만 시켜서.”

“괜찮습니다. 아,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연호정이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옥청(玉淸)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으응? 오, 옥청을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 옥청이 도움이 되겠는가? 물론 크게 성장하긴 했네만…….”

“무당의 검선께서 자신보다도 뛰어난 인재라고 극찬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더군요.”

연호정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그 외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아버지, 모용 형님, 대사님 등등. 이거 또 무진장 바빠지겠습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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