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7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7)
초대 무림맹주.
소림 방장이라면 무림맹의 수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와중에 공공대사는 영향력 이전에 뛰어난 인품과 강력한 무공, 끊임없는 자기 수양으로 이름 높은 무림의 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람이 맹주가 되었다고 하니,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일이다.
다만, 아직 정식으로 맹주위에 올랐음을 선포하지 않은 그가 마도 무림의 기재 앞에서 당당하게 맹주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림맹주……!”
“그렇다네.”
멍하니 공공대사를 보던 천효락이 제갈문호와 승현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두 사람의 얼굴은 지극히 담담했다.
제갈문호야 군사이니 표정 관리에 일가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현진인까지도 한 줄기 미소를 머금은 채 공공대사를 보고 있었다.
‘진짜다!’
자신을 놀라게 하려고 농담을 던지거나 괜한 술책으로 자신을 떠보려는 게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은 정말로 공공대사를 무림맹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공대사 역시 두 사람의 신뢰 가득한 눈빛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천효락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무림맹의 초대 맹주께 다시 인사를 드립니다.”
공공대사가 손을 들었다.
“정식으로 공표된 것이 아니니 새삼 예를 취할 필요는 없네. 중요한 것은 신마림에 관한 정보지.”
“예.”
다시 자리에 앉은 천효락이 담담하게 말했다.
“뭐라 하셔도 마공의 약점과 공략법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십시오. 도움을 요청하러 온 처지에 주신 반찬을 가리는 것만큼 뻔뻔한 짓은 없을 테지만, 지금 맹주님께서는 밥 한 끼로 저희 다리를 잘라 가려고 하시는 겁니다.”
대사님이 아니라 맹주님이다.
오히려 상대가 맹주라서 더더욱 강경하게 나가는 그였다. 봉공이었다면 여러 사람의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맹주라면 어느 정도 결단력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시종일관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물어뜯으라고 목을 대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맹우가 되기로 하지 않았던가.”
“아시겠지만, 무림맹과 신마림이 동맹을 맺고 나아간다 하더라도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 마음 같지 않은 법입니다. 이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정녕 그런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신마림 마공의 약점을 알고 있는 무림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가.”
천효락의 눈이 깊어졌다.
“이 부분, 맹주님께서도 분명히 이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달리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글쎄.”
공공대사가 천효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천효락은 순간 심장이 두 배로 빨리 뛰는 걸 느꼈다.
그저 눈에 힘을 주고 보는 것에 불과한데도 심박수가 알아서 올라간다. 내공을 끌어 올리거나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닌데, 공공대사의 저 깊은 눈빛 앞에서 한없이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참이나 천효락을 보던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천 공자는 빈승에게 빚 하나를 졌네만.”
“빚이라니요?”
“마공에 성취가 있지 않았던가?”
“……?!”
천효락의 눈이 흔들렸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지친 얼굴에 드리워진 한 줄기 미소, 평소의 그다운 얼굴이었다.
“상생과 상극이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네. 불가의 내가기공과 사마외도의 기공도 그러하지.”
“……그 말씀은?”
“빈승이 연마한 소림신공 앞에 천 공자는 억눌러졌네. 처음 이곳에서 만났을 때, 천 공자는 나를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들어했지.”
강인한 정신력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공공대사는 이미 천효락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항마(降魔)의 불가기공(佛家氣功)이 극에 이르면, 그 앞에서는 어떠한 사마외도의 마공도 기를 펼 수가 없다.
반대로 역천(逆天)의 마도지학(魔道之學)이 궁극에 이르면, 그 앞에서는 어떠한 도불(道佛)의 신공도 파탄 나 버리고야 만다.
그래서 상극이다. 어느 한쪽이 정도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가면, 상대는 철저하게 분해되고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저급한 마공이었다면, 지금쯤 천 공자는 내공이 흩어지고 고열에 시달리는 등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을 걸세.”
“……?!”
“하나 천 공자가 연성한 마공의 수준이 실로 대단하다는 걸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네. 소림의 무상대능력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을 만큼 훌륭한 마공인 듯했네.”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신공과 마공을 떠나, 훌륭한 무공은 주인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
“즉, 대사님께서는 저의 마공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부러 저를 압박하셨단 말입니까?”
“자네의 의지를 보고 싶었네. 자네의 진심도 보고 싶었어. 만약 빈승이 뿜는 무상대능력의 힘 앞에 무너져 가당치도 않은 본색을 드러냈다면, 그 길로 자네의 거처는 객당이 아닌 지하 오 층짜리 뇌옥이 되었을 걸세.”
천효락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자네는 우리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네. 진심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어. 역사의 난적인 마도 무림의 마인이 찾아왔으니, 나 역시 자네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네.”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당당하게 널 시험했노라 말하고 있었다.
천효락이 떠듬떠듬 말했다.
“저의 중왕마공이, 맹주님의 무상대능력 앞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알아서 성취를 올렸다는 말씀이로군요.”
“아무 언질 없이 자네를 시험하였네. 거짓이라면 죽음이요, 진심이라면 성장을 유도할 수 있다네.”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몸으로 세속적인 셈법을 들이대며 사람을 시험했으니, 이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답답할지언정 후회는 없다. ‘무언가’를 넘어서기 시작한 공공대사의 눈빛은, 아직 완전하게 걷어 내지 못한 혼란 속 찬란한 의지로 가득했다.
“재능은 뛰어나 보이는데 실력은 그에 이르지 못함이라, 무공 구현이 안 되는 천형을 타고났음을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네.”
“…….”
“우리 모두 앞에서 솔직하였으니, 그에 대한 나름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물끄러미 공공대사를 보던 천효락이 한숨을 쉬었다.
“빚을 졌다는 게 그 말씀이로군요.”
“그렇다네.”
“어쩐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진기가 왕성해졌다 싶었습니다.”
“상극의 힘이 약해지는 신공과 마공도 있네. 자네가 연성한 마공은 그렇지 않았어. 무상대능력의 빛을 쬐면서도 기어이 성장한 것을 보면, 신마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공임이 분명한 듯싶네.”
말하자면 그토록 대단한 마공의 성장을 유도했으니 큰 빚을 졌다는 것이다. 솔직하지 않았다면 뇌옥행이었겠지만,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으니 이는 분명 빚이라 할 수 있겠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
“신마림 마공의 약점과 공략법을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천효락의 모습은 마인답지 않게 무척이나 정중했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러한가.”
“…….”
“그럼 어쩔 수 없지.”
천효락이 고개를 들어 공공대사를 보았다.
지쳐 보이는 얼굴, 그러나 미련은 없다.
천효락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거절할 것을 알고 계셨지요?”
“그럴 거라고 짐작했네.”
“한데 어찌 무리한 부탁을 하신 겁니까?”
“무리한 부탁이지만, 만에 하나 천 공자가 알려 주겠다 하면 그토록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
“무림맹주로서, 상대에게 얻어 낼 만한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 내겠다는 마음일세. 다소 치졸하고, 바보 같아 보이더라도.”
“……그렇군요.”
“그렇다고 타 문파의 대표로 온 사자(使者)를 고문하거나 매질하여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도움을 요청하러 온 사람을 그리 만들면, 천하가 무림맹을 어찌 보겠는가.”
“무도하기 짝이 없는 집단으로 보겠지요.”
“그렇지. 그래서 여기까지만 한 걸세. 여기까지가 내 한계지.”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공공대사는 한계를 돌파했다.
세속적인 셈법에 익숙해지다 보면 불법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속세의 망나니들도 삶 속에서 지극한 깨달음을 얻어 불법을 얻을 수 있는바.
공공대사는 더 이상 고고해지지 않으려 했다. 난폭해지고 치사해질지언정 속세에 몸을 담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했다.
“결정은 했네. 자네에게 그 나름의 대답도 받았으니, 앞으로의 일은 군사와 상의하면 될 터.”
공공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일까?
그저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 뵙겠다, 고마웠다 한마디만 하면 될 걸, 천효락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더 나아가시려 하십니까?”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보이는가?”
“……모르겠습니다.”
“초대 무림맹주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자격을 손에 넣으려 하네.”
“……!”
“천지에 번뇌가 그득하니, 눈을 감고 나아간다고 번뇌의 찌꺼기가 들러붙지 않는 것은 아니지. 그저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야.”
“…….”
“이제, 두 눈을 당당하게 뜨고 세상 번뇌와 마주하려 하네.”
번쩍!
공공대사의 황금빛 안광이 천효락의 어깨를 짓눌렀다.
천효락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것은……!’
공공대사의 안광, 그의 기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기질은 비슷하지만, 기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것이다.
더 높은 곳, 더 아득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진기.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으나 그래도 명백한 인간이었던 자가, 이제는 사람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신(神)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그 경지로.
“부디…… 대공이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대공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있네.”
공공대사가 몸을 돌렸다.
“그 마음속에 내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네.”
천효락은 가슴 한구석이 찡!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공공대사의 마지막 말이 어쩐지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공대사가 사라지자 제갈문호가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선포된 사항이 아니니, 소문은 내지 말아 주시오.”
“미숙하고 어설픈 손님이지만, 입이 무거워야 할 때와 아닐 때의 구분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행이오.”
천효락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지원은 어떻게……?”
“일단은 맹주 임명식이 끝난 후 보낼 예정이오. 너무 지체될까 걱정할 필요는 없소. 사흘 뒤 선포할 것이고, 임명식은 단출하게 끝날 것이오.”
“감사합니다.”
“다만 그 지원 병력에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해 봐야 할 터인데…….”
천효락은 긴장했다.
제갈문호가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탁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안한 사람이지만, 또한 누구보다도 잘 처리할 수 있는 이가 한 명 있소.”
“그것이 누구입니까?”
“문제는 그가…… 더는 무림맹 소속이 아니라는 것인데.”
순간 천효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같이 부탁하러 가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