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6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6)
흐으읍.
가볍게 들이쉬는 숨.
아무것도 없는 허공,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흡입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천효락을 지켜보던 화향의 눈에는 공기 중에 퍼진 금빛 입자들이 주인의 코로 들어가는 것 같은 환상이 보였다.
“후우.”
묵직하게 뱉는다.
본디 내공심법의 호흡법이든 도문의 양생을 위한 단전 호흡이든, 가늘고 길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천효락의 호흡은 달랐다. 내공심법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지녔음에도 평범한 호흡법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경쾌한 들숨, 그리고 무거운 날숨이다.
느긋하거나 느리지는 않다. 오히려 무공을 연마한 적 없는 범부의 호흡보다도 빨라 보였다.
화향의 눈이 흔들렸다.
‘벌써 칠단공(七段功)에 이르셨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정말 대단한 재능이시다. 천형으로 인한 육체만 아니라면, 못해도 지금쯤 소림 방장과 겨루어도 부족하지 않을 무력을 손에 넣으셨을 텐데.’
화향은 안타까웠다.
천효락의 재능은 대단하면서도 독특한 것이었다. 그의 재능은 ‘분석’의 재능으로, 어떤 무공이든 한 번 본 것은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복잡한 무공 구결도 한 번 읽기만 하면 완전하게 분해하여 해석해 냈다. 어릴 적, 신마림주가 장난처럼 던져 준 초일류 마공 비급을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분석해 버린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강자존, 약육강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신마림에서 천효락이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천형 탓에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그 재능만큼은 신마림 제일을 논해도 무방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재능을 살릴 방법이 있었고,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막강한 내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내공을 제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아직은 그러했다.
‘불과 삼 년 전에 연마하기 시작한 중왕마공(重旺魔功)이 벌써 칠단공이다. 림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화향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훅!
강한 들숨과 함께 천효락이 눈을 떴다.
화향이 무릎을 꿇었다.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대공은 무슨.”
천효락이 씁쓸하게 웃었다.
“칠단공에 이르는 방법은 처음 비급을 읽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내 몸이 그에 어울리지 않아 연마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래도 삼 년 만에 중왕칠단(重旺七段)이라면 신마림 역사상 다시 없을 쾌거가 아닌지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무공이다. 쾌거가 아니야.”
화향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천효락이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래도 좋구나.”
예전에는 내공으로 오감을 증폭시키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내공을 품고 있기에 신체의 전반적인 기능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을 넘보지는 못했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원한다면 시력을 몇 배나 더 선명하게 만들 수 있었고, 어떤 고수 못지않은 청력과 기감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무공 구현은 불가능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디인가.’
처음 내공을 이용하여 신체 감각을 극대화했을 적.
그때의 쾌감과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각이 모조리 개방된 듯, 어떤 고수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손에 넣었다.
‘……음?’
그리고 오감을 넘어 기감까지 활발해진 지금, 천효락은 그 기감에 따라 자연스레 기지개를 켠 육감이 깜빡거리는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구지?”
“네?”
천효락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또 누군가가 오고 있다.”
“누군가 오다니요? 설마…… 봉공이?”
“아니, 이곳 객실 말고.”
번쩍!
천효락의 눈빛에 은은한 마기가 실렸다.
칠단공에 이르자 비로소 그럴듯한 안광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큼은 천효락 자신도 인지하질 못했다.
“성마(成魔)에 이른 고수인 것 같은데…… 좀 다르다.”
성마에 이른 고수.
화향은 더는 놀라기도 힘들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곳 무림맹에 얼마나 많은 초고수가 집결하고 있는 것일까.
“거리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다. 외성 어느 곳이 아니라 수백 리는 떨어져 있는 듯하다.”
수백 리 밖 고수의 접근을 알아챈다는 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능력이었다. 무극에 이르러서도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아 각자만의 무신지도(武神之道)를 깨우친 성천의 고수들 정도가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기(神技)다.
하물며 성천조차도 강하게 의식하고 있거나 본인의 진기와 상생 혹은 상극의 힘이 아니면, 이 정도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기운을 읽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
천효락의 또 다른 재능이었다.
내공으로 감각을 깨우는 순간, 극단적으로 발달한 두뇌와 육감이 가히 천리안(千里眼)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저 성천들처럼 언제나 발휘될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것은 처음이다. 아마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기운 때문인 듯하다.”
“기운이라니요?”
“우리와 비슷해. 같지는 않지만, 같은 근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진기다. 마공은 아니고, 사공이다.”
성천에 이름을 올린 고수 중 사공을 연마한 절대고수.
천효락의 눈이 번뜩였다.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로 흑도 사파의 절대고수가 무림맹으로 오고 있는 것이지? 설마하니 단독으로 싸우려 들지는 않을 테고.”
“…….”
“뭔가 볼일이 있는 것일까.”
어떤 목적이든, 천효락은 내심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곳 무림맹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집결하는 건지.’
남궁의 검제, 그리고 도제로 추측되는 고수.
삼군의 일좌인 백병신군 막원에, 새로이 성천에 이름을 올린 희대의 풍운아 패왕 연호정.
그것만도 무시무시한데 이제는 천하 사공의 달인이라는 귀군까지 오고 있다.
‘하지만 뭔가가 다르다.’
어느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적어도 천효락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그토록 놀라운 고수들이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데도 무림맹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무림맹의 위상이 엄청나다는 방증이었다.
‘역시나 복마전이다. 천하제일 무림맹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야. 알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감하게 된다.’
천효락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괜찮은 것일까.’
티를 내지 않을 뿐, 그는 신마림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물면서 조금씩 불안함을 느꼈다. 도움을 요청함과 동시에 손을 잡자고 왔지만, 어쩐지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신마림이 삼켜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을.
‘……아니, 그래도 강행해야 한다. 무림맹에 밀리지 않을 방도를 생각해야지, 불안한 미래 때문에 현실의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야.’
나아가, 그 잔혹한 반역도들에게 신마림이 분해되느니, 차라리 무림맹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침음하던 천효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향아, 장포를 주거라.”
“아, 네!”
화향이 건넨 장포를 입자, 문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빈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그렇소.”
“무성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봉공분들께서 지금 귀빈을 뵙고자 하십니다.”
천효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가겠소.”
“예.”
화향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부탁하는 처지라지만 너무하는군요. 시간을 정해 만나는 것도 아니고, 만나고 싶으니 오라는 건 대체 무슨…….”
“배려다.”
“네?”
천효락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배려다. 먼저 부탁을 한 건 나였고, 그들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보자는 것은 심란할 나의 마음을 빨리 진정시켜 주고자 함이다.”
“그, 그럼?”
“그래. 저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모양이다.”
화향이 방문을 열었다.
천효락이 싱긋 웃었다.
“웃으면서 가자.”
그때의 회의장에는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공공대사, 승현진인 그리고 군사인 제갈문호였다.
천효락이 고개를 숙였다.
“빨리 마음을 정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줄 알고 벌써 감사해한단 말이오?”
“어떤 결정을 내리셨든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요.”
“허허, 천 공자는 이미 우리의 결정을 짐작하고 계신 모양이오.”
“예,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대사님.”
공공대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인 일인지,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드리워져 있던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심란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깊고 기분 좋은 울림으로 가득하였다.
“천 공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오.”
“감사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현재 무림맹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한 것은, 천 공자 역시 보아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
“우리는 오래전부터 무림맹주 선출에 관해 고민해 왔소이다. 제대로 된 맹주가 없으니 중원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에 즉각적인 대처가 불가능하였지. 우리는 결정을 내림에 앞서 최소한의 피해를 상정해야 했기에 언제나 느렸소.”
“…….”
“하나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지금처럼 말이오.”
천효락은 살짝 고개를 숙였지만, 내심 당황했다.
‘왜 이런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림 방장이 마도 무림에서 파견한 자신에게 굳이 무림맹주 운운하며 다짐 비슷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천효락을 바라보던 공공대사가 말을 이었다.
“신마림의 상황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셔야 하오.”
“예?”
“림주의 상황과 상태, 반역의 주동자와 그 세력의 크기는 물론 그들의 최종 목표를 말해 주셔야 하오. 신마림 내 고수의 숫자, 운용 가능한 전력과 명확한 위치, 나아가 마공의 약점과 공략 부위 또한 상세히 말해 주셔야 할 것이오.”
천효락은 당황했다.
“대사님.”
“문제라도 있소이까?”
“신마림의 상황과 적의 전력을 상세히 말씀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마공의 약점과 공략법을 알려 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 그렇소?”
“예?”
“우리는 천 공자를 도와 신마림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생각이오. 그를 위해 본 맹의 소중한 무사들을 파견해야 할 터인데, 그들의 목숨을 천 공자가 보장해 줄 수 있겠소?”
“대, 대사님.”
“그럴 수 없을 것이오. 그럴 만한 힘이 있다면 굳이 예까지 오실 필요도 없었잖소?”
“하지만 마공은…….”
“우리 무사들이 한 명이라도 더 무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마림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천 공자도 그만한 정성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오.”
“그 부분, 모든 봉공분께서 동의하신 부분입니까?”
“그럴 필요 없었소. 그들은 그저 내 의견을 따를 뿐이오.”
“……예?”
공공대사의 지친 눈에 은은한 황금빛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빈승이 바로 초대 무림맹주(武林盟主)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