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5)
쩌어어어엉!
강력한 힘에 연호정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 나갔다.
훅!
바닥에 깔린 눈이 흩어진다. 얼음들은 하나같이 부서지고 흩날리며 시야 안의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 준다.
막원의 목봉이 냉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터어어엉!
막원처럼 굵고 길쭉한 나뭇가지를 다듬어 여섯 자가 넘는 목봉을 만든 연호정이었다.
재질은 같고, 길이와 두께도 유사하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막원의 봉술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만 있었다.
“뭐 하는 거냐! 하단이 비었다!”
번쩍!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목봉의 탄력이 실로 엄청났다.
철제가 아닌데도 강철 이상의 강도를 자랑하는 와중에 목재 특유의 탄력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 막원의 비전 신공, 극에 이른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는 평범한 목봉을 천하제일의 보병으로 탈바꿈시켰다.
우우우웅.
연호정의 목봉에 은은한 진기가 담겼다.
뭐라 탁 집어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색이었다. 금빛에 가깝지만, 가만히 보면 빨갛게도 보이고 푸르게도 보였다.
막원의 눈이 빛났다.
번쩍! 쿵!
하단을 휩쓸던 목봉이 어느새 또 한 번 휘어져 연호정의 가슴을 찔렀다.
다행히 목봉으로 막았지만, 그 충격은 상체에 고스란히 남았다. 십여 걸음 물러나 자세를 잡는 연호정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내상도, 외상도 없었다. 진심으로 발경을 쳐서 날리는 승부가 아닌 만큼 다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초식의 술식만큼은 진심이었다. 평소 생사결을 나눌 때 구현하는 무공 초식 그대로였다. 다만 신의 경지에 이른 기공술로 속도만 살린 채 힘과 발경은 줄였을 뿐이었다.
무극에 이른 자들, 거기서도 더 나아가 큰 깨달음을 얻고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한 자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놀라운 무공이었다.
“왜 그러는 거냐?”
뻗은 목봉을 수거하는 막원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왜 이전처럼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냐?”
연호정의 실력을 생각하면 방금까지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 내거나 피해 내는 게 정상이었다.
“대응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하면? 집중을 잃었느냐?”
“물론 그것도 아니지요.”
“그럼 왜 그러는 거냐? 권법과 장법, 보법까지 무려 세 가지 무공을 만드는 데에 반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데 병장기술은 어째 진도가 안 나가느냐?”
“나눠 봤거든요.”
“응?”
연호정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지금 제가 이룩한 무공의 특징을 분리해 봤습니다.”
천하의 막원도 그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연호정은 생각했다.
‘역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무공의 재능이라는 것이 근골이나 감각, 한 번 본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시각적 재능 등에 한정된 것이라면 자신은 범재에 가까웠다.
‘그러나 내게는 남들에게 없는 재능이 있다.’
과거 누군가에게도 말했었다. 당신만큼의 재능이 없다는 말에, 재능이라는 게 단순히 근골이나 감각 정도로 제한된 거라고 생각한다면 평생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황룡을 깨닫고 나자 새삼 알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완전하게 믿지 못했다.’
자신이 지닌 재능은 분명했다.
‘약점 간파.’
약점을 보는 재능이다.
상대의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약점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연호정만의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런 재능은 무공을 빨리 익히는 것과 상관이 없다. 겉으로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고 응용할 수 있다면, 연호정의 재능은 누구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다.
타인의 약점을 본다는 것은 곧 무공, 무학의 약점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이 익힌 무공이나 자신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에게서 약점이 보이면 공략하면 되고, 나에게서 약점이 보이면 보수하면 된다.
상대를 쉽게 무너트릴 수 있고, 나의 완성을 위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안다. 다만 한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지만, 적어도 아무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 쌓은 경지는 아니란 말이다.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야.’
내가 뭘 해야 성장할 수 있는지를 알아도 그것을 몸에 익히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뛰어난 근골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까지 타고났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빨리 황룡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또 그건 아닌가.’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재능을 안고 갔다면 타인과 싸울 필요도 없었을 테니, 오히려 자만심에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걸 떠나 무극과 황룡은 철저히 깨달음에 기인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의 재능을 완벽하게 이해한 연호정은, 자신이 훤히 볼 수 있는 약점을 철저히 배제한 채 막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권장보(拳掌步), 세 가지 무공과 병장기술은 다릅니다.”
“음?”
“권법과 장법, 보법은 내 몸에 딸린 살덩이로 구현하는 무공입니다. 반면 병장기술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을 휘두르는 공부이니만큼, 더 완벽을 기해야지요.”
“그것이 네 깨달음이냐?”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법이든 장법이든 병장기술이든, 무공은 결국 하나다. 그것이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하여 주먹질이라고 간단하지 않고, 병장기술이라고 더 어려울 게 없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연마해 왔습니다.”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군.”
“예. 정확히는…….”
뭐라 설명해야 할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하제일의 권법도 인간의 근육과 관절에 허용되는 투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
“그러나 천하제일의 검법은, 검의 재질에 따라 인간의 관절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휘어져 적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
“예, 그런 겁니다. 주먹은 주먹, 검은 검입니다. 병기란 그런 것이지요. 내 팔이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에 이르지 못한 자를 위한 풀이에 불과합니다.”
막원과는 다른 연호정만의 깨달음이다. 타고난 재능과 살아온 환경, 경험과 안목이 다르니 비슷한 경지라도 전혀 다른 깨달음을 보유한다.
“신공(神功)은 하나로 합쳐졌지만, 외가 무공까지 하나로 합쳐선 안 됩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요.”
“네가 보는 무공은 그렇구나.”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사람은 호흡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다. 재능이란 그와 같다.
연호정은 그 몸에 밴 재능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막원과 싸웠다. 당연히 이전과 달리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룡이수와 용형보는 그 자체로 타인에게 전수가 가능한 무공입니다. 모두에게 완벽한 무공이기 때문입니다.”
“음.”
“병장기술은 다릅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맞는 병장기술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에게 전수하지도 못할 겁니다.”
막원의 눈이 빛났다.
“네 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고 싶으냐?”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수를 하든 하지 않든, 완벽(完璧)한 병장기술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렇구먼.”
“지금은 이대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콱!
땅에 목봉을 박은 연호정의 모습은 꽤 후련해 보였다.
막힌 게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궁구하여 기어이 답을 찾아낸다. 지금까지의 연호정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노력하나, 흘려보내야 할 것이 있다면 주저 없이 놓아준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막원이 씨익 웃었다.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으이.”
“그렇습니까.”
“더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 세 가지 무공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형님 덕분입니다. 혼자서 했다면 얼마나 걸렸을지 모를 일입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막원은 모든 병장기술은 물론 육탄전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희대의 고수였다.
말하자면 모든 상황에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막원은 거의 모든 종류의 무공으로 연호정을 압박했고, 덕분에 연호정은 막연하기만 했던 투로를 완벽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의 새 무공과 진지하게 겨뤄 보고 싶긴 하네만.”
훅!
막원의 몸에서 강렬한 투지가 일어났다.
무극의 고수, 성천일좌의 진심 어린 투지는 그 자체로 막강한 압력을 자아냈다. 실제로 막원과 진지하게 겨뤄 본 적이 없는 연호정으로서는 그의 진지한 기파를 처음으로 받아 본 것이었다.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럼, 무공 만들기는 이만하고 순수한 겨룸으로 넘어가 볼 텐가?”
“그러고 싶습니다만…….”
연호정이 힐끔 동쪽을 바라보았다.
막원이 씨익 웃었다.
“나도 느꼈네.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칼질의 대가께서 거의 다 당도하신 모양일세.”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제왕은 제왕이고 군주는 군주일세. 왕은 왕이지.”
“그렇다면 가시지요.”
“으응?”
막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가자니? 어디로?
“이곳 공터는 꽤 넓고 괜찮은 장소지만, 작정하고 부딪치면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
“게다가 이곳은 내성입니다. 형님과 제가 진심으로 맞붙으면 또 모두가 놀라서 쫓아오겠지요. 업무가 마비되고 무림맹이 한차례 시끄러워질 겁니다.”
“허어.”
“가실까요?”
막원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지, 좋아.”
그들은 의형제를 맺었고 서로의 재능과 능력을 인정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의형제라 해도 두 사람 다 뼛속까지 무인이다. 막원은 본디 그러했고, 연호정은 황룡에 이르러 무를 향한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나아가는 두 사람.
아버지인 연위, 또 다른 의형제인 모용우와는 전혀 다른 자극제다. 친분을 나눈 시간은 적지만, 무(武)의 완성형에 이르러서는 누구보다도 큰 깨달음을 전해 주는 막원이었다.
훅!
두 사람이 공터에서 사라졌다.
제법 험해진 공터 중앙에는 연호정이 꽂은 목봉 한 자루만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 *
“너,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부선이라 하옵니다.”
함께 길을 나선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나흘 만에 부선의 이름을 묻는 사내의 무심함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기억이 난다.”
“영광입니다.”
부선은 전에 없이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사부인 투왕 양천을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보여 준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상대를 어려워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묵룡부로 가는 길을 막은 게 이해가 되질 않아. 그 망할 놈에게서 다른 말은 없었더냐?”
나흘간 한마디도 없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고수하며 따라온 사람이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는다.
부선 입장에서는 기가 찰 만도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몹시 공손하고 깍듯했다.
“저는 그저 사형에게 어르신을 맹으로 모시고 오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흐음, 어르신이라. 부주가 제대로 가르치긴 했군. 그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놈과는 차원이 달라.”
“감사합니다.”
“되었다. 어차피 연가주도 한번 보려고 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지. 얼마나 남았다고?”
“이 속도면 이틀 안에 대별산에 진입할 것입니다.”
“이틀이라…… 이왕 경로를 꺾은 거, 속도 좀 내 보자고.”
“알겠습니다.”
화아아악!
번쩍이는 사내의 안광은 숨도 못 쉴 정도의 사기(邪氣)로 그득하였다.
“왜일까? 묘하게 두근거리는데? 마치 복마전(伏魔殿)으로 쳐들어가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