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61화 (861/963)

861화. 개화(開花)하는 강자들 (1)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공공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반칙일세.”

“…….”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라네, 소부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천하를 위하는 일입니다. 반칙에 속임수는 물론, 필요하다면 뒤통수도 날려 버릴 수 있지요.”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네.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세.”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네.”

연호정이 승현진인에게 물었다.

“진인께서 보셨을 때, 대사님이 무림맹주로서 어울리지 않으십니까?”

승현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당대 천하에 소림 방장만큼이나 맹주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보시오, 진인.”

“허허, 소부주는 그저 내게 질문을 던졌을 뿐이오.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전달한 것이니, 대사께서도 뭐라 하실 수 없을 게요.”

공공대사가 또 한 차례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이 제갈문호에게 물었다.

“군사께선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제갈문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자네답군. 과감하고 위험해.”

“그렇지요.”

“하지만 자네 머리에서 나온 책략답게…….”

“하하, 책략이라니요?”

“매혹적이군.”

제갈문호가 웃으며 공공대사에게 말했다.

“스스로를 불태울 각오 정도는 진즉에 하셨을 분 아닙니까.”

“군사.”

“모두를 위해 불타올라 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당당하게 죽어라.

이런 무시무시한 말은 웃으면서 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죽고 불태워지라는 말이, 정말로 죽으라는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공공대사의 능력과 인품이 천하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 또한 알기 때문에 그렇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빈승은 이 자리에 올랐음에도 번뇌가 많은 사람이오. 떨쳐 내고 또 떨쳐 내도 어느새 돌아보면 따라붙어 있는 이 번뇌의 잔향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불경을 외운다오.”

어느새 진지해진 공공대사.

웃음 짓던 세 사람의 얼굴에도 진지함이 어렸다.

연호정이 물었다.

“무슨 번뇌가 그리 많으십니까?”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

공공대사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끔은 불법을 떨쳐 내고 멋대로 살고 싶단 생각도 든다네. 자네 말마따나, 한 번쯤은 마음껏 권력을 휘둘러 보고 싶단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도 있지.”

의외였다. 공공대사는 절대 저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타고난 천품에, 스스로를 불법의 강에 던져 얻은 불심과 자애로 자신을 가꾸어 왔지만, 채 씻어 내지 못한 때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직책에 올라설 때마다 그 크기를 키워 왔네.”

일개 무승에서 시작하여 최연소 나한(羅漢)이 되고, 최연소 나한에서 최연소 나한당주(羅漢堂主), 팔대호원 등을 거쳐 순식간에 방장 직까지 올라온 사람이 그였다.

스승이자 무림의 전설로 불리는 권신 무허대사의 제자라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공공의 재능과 무력은 대단했고, 능력 역시 탁월했다.

그러나.

정작 모두가 감탄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상황 속에서 공공은 웃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순수했던 나 자신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장이 되어 모두의 축하를 받았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네.”

공공대사가 쓰게 웃었다.

“평생 입에도 대 보지 않았던 독주(毒酒)가 마시고 싶었다네. 남들이 그렇게 피워 댄다는 연초를 입에 물고 싶었다네. 이유를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술을 들이붓고 연초 연기를 뻐끔대도 내게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네. 모두 당황할 테지만 감히 한마디도 못 하는 승려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리하고 싶었네.”

승현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공공대사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을 자연과 벗 삼아 살아온, 위계는 알아도 모두가 흙의 일부라 생각하는 그에게 있어서 공공대사의 번뇌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하여 타인의 걱정이나 번뇌를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승현진인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지만, 어렴풋이나마 공공대사를 이해했다.

그리고 연호정과 제갈문호는 승현진인보다 공공대사를 훨씬 더 잘 이해했다.

“내 삶의 반은 불법에 녹아들었네. 그리고 절반은 번뇌를 버리기 위한 몸부림이었지.”

“…….”

“그런 내가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으면? 그때는 또 얼마나 거대한 번뇌가 찾아오겠는가?”

“수행이 아닐는지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답답함이 느껴지는 공공대사의 목소리와 달리, 연호정의 목소리는 산뜻하게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찾아온 번뇌를 안타까워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서워하는 것입니까? 그도 아니면, 점점 크기를 불리며 다가오는 번뇌 앞에, 대사님께서 이뤄 내신 수행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그 모두일세. 나는 번뇌가 두렵네.”

“저는 벌레가 싫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공기가 맑고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벌레들이 기형적일 만큼 크지요. 저는 그런 벌레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 왔습니다.”

“…….”

“하지만 그곳에 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싫어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몸에 달라붙은 벌레들을 모두 쳐 죽였습니다. 절 중독시키려고 꿈틀거리는 독사들과 지네들은 모조리 밟아 죽였지요.”

“…….”

“그렇게 운남을 몇 달 동안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끔찍했던 기억이지요.”

연호정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전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을 어렵지만 확실하게 쟁취하고 돌아왔습니다.”

“…….”

“벌레가 무섭고 껄끄럽다고 그 길을 걷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까지도 그때를 후회했을 겁니다.”

“이보게, 소부주. 나는…….”

“더 큰 번뇌를 두려워하시는 거라면 그냥 걸어가십시오. 하지만 수십 년 수행에도 번뇌가 찾아온다는 현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거라면…….”

연호정이 승현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더는 대사님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대신 무당 장문 어른을 닦달하겠습니다.”

승현진인이 피식 웃었다.

연호정이 다시 공공대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위치를 떠나 무림맹을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저와 군사님이 대사님을 맹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소 섣부른 판단이지만, 저희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 생각할 겁니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설령 불만을 품은 자가 있어도, 감히 잘못된 인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걸세.”

“말하자면, 저희는 대사님의 능력과 인품을 인정함과 동시에 희생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담담한 목소리 속.

연호정은 유독 ‘희생’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더 큰 번뇌가 찾아올까 두려우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대사님께서 엇나가셔도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

“번뇌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더더욱 맹주위에 올라 보셔야 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의 마주함은, 좋은 장작이 되어 대사님 마음 안에 있는 순수한 불꽃을 더 크게 키워 줄 수 있을 겁니다.”

묘하다.

공공대사는 연호정의 말을 들으며, 마치 그의 목소리가 불경을 읽는 어느 고승의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다소 자극적인 언사를 뱉는데도 그 목소리가 이리 매끄럽게 들리다니? 연호정이 특별해서인지,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번뇌가 커진다는 것은 곧, 대사님께서 더더욱 빛에 가까워지고 계신다는 걸 뜻하지 않겠습니까?”

“빛……?!”

“번뇌가 더 커질까 두려워 무한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던지지도 않으셨습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연위의 눈에도, 모용군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당연히 성천에 이름을 올린 연호정의 눈에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옛날얘기였다. 머무른 곳은 여전히 무한의 코앞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기에 오를 수 있는 깨달음을 하나씩 상실해 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일세.”

“그렇습니다. 부족하시니 인정하지도 않으시지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이리 대사님을 원하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아니네. 나는 생각하고 있네. 그래서 고마워하고 있고, 그래서 면목이 없네.”

“아니지요. 그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면피에 가깝지요.”

“면피라니?”

“우리가 대사님을 원하는 이유는 대사님이 뭔가를 잘해 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대사님이라면 못하진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

“나아가, 희생해야 할 순간에 분명히 희생하시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그만한 유혹을 물리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습니다.”

“…….”

“그리고 그것을 대사님도 알고 계시지요. 한데 대사님은 번뇌가 무섭다는 핑계로 한사코 거절하고 계십니다.”

“…….”

“진정 그 자리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오르지 않겠다고 하시면, 저희라고 어찌 이리 강권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대사님은 정말로 그 자리가 싫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이런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대사님.”

연호정의 미소가 더 따뜻해졌다.

“최고의 번뇌 앞에서, 가장 위험하고 깊은 번뇌를 넘어설 기회입니다. 불법을 따르는 승려이자 무림의 어른으로서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마다하십니까.”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번뇌를 넘어설 기회라…….”

“저는 대사님이 아니라 여기 계신 승현진인께서 초대 맹주가 되시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대사님처럼 스스로를 분명하게 희생해 주실 만한 분이거든요.”

승현진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권력에 미쳐서 흥청망청 살 수도 있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사님께서 맹주가 되셨으면 합니다.”

승현진인의 말을 웃음으로 무시한 연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이, 자신의 속됨을 아는 이가 사람보다는 신선에 가까운 이보다 맹주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신선에 가까운 이는 승현진인이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이는 공공대사다.

연호정이 보는 두 사람은 그러했다. 승현진인은 연호정의 칭찬이 부담스러워서 헛기침을 했고, 공공대사는 스스로가 한계를 알고 속됨을 아는 것 이상으로 못났다고 생각하여 부끄러워했다.

두 사람을 보던 연호정이 제갈문호에게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더 설득해 봐야 저만 나쁜 놈이 될 것 같군요.”

“자네 역할이 그거 아니었나? 묵룡부에 가서 소부주까지 된 사람이 말은 좋구먼.”

“하하하! 사람들 눈에 그리 살벌하게 찍혔는데, 봉공분들에게까지 찍힐 수는 없잖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그 잠깐 사이에 번뇌에 사로잡혔을까?

멍하니 탁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공공대사의 얼굴은 심각함과 허술함으로 가득했다.

승현진인이 감탄 어린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자네의 심어(心語)가 아라한(阿羅漢)의 마음에 닿았다네.”

“그렇습니까?”

“번뇌를 심어 주었군. 더 큰 번뇌를 이겨 낼 수 있도록 처방전을 내려 준 겐가?”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디 가시는가?”

“숨으러 갑니다.”

“숨다니? 무슨 말인가?”

연호정이 동쪽을 바라보았다.

“또 누가 오고 있습니다. 왠지 절 찾을 것 같군요.”

“으응?!”

“드릴 말씀도 다 드렸으니, 수련도 할 겸 형님이나 닦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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