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60화 (860/963)

860화. 무림맹주란? (10)

“헉헉! 사, 사부님!”

“이제 왔느냐?”

“쿨럭! 예!”

숨을 헐떡이던 사내가 그 자리에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막강한 내공, 무종의 벽을 넘은 고수가 그였다. 그런 그가 달리기만으로 호흡이 흐트러졌으니, 그야말로 쉬지도 않고 달린 모양이었다.

노인이 투덜거렸다.

“젠장, 네 녀석 때문에 더 빨리 갈 수 있는 걸 못 가고 있지 않느냐. 혼자 갔으면 지금쯤 대별산을 오르고 있을 터인데.”

“커헉! 그러니까 먼저 가시라니까요!”

“이놈아! 암만 그래도 그렇지, 제자를 놓고 가면 쓰겠냐?”

제자를 개 잡듯이 두들겨 패는 건 어떻고요?

사내는 그렇게 반문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말할 힘도 없거니와 실제로 그런 말을 뱉어 버렸다가는 사망 확정이다.

‘고통스럽게 죽지 않는다면 시원하게 질러 버리기라도 할 텐데, 빌어먹을.’

속으로 투덜대던 사내가 끙끙대며 자세를 세워 호흡을 바로잡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흐트러진 호흡, 내공도 죄다 쥐어짜서 한 톨의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호흡이 돌아오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무종의 벽을 깨고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육신은 근본적으로 범부의 그것과 달라서, 담아 놓을 수 있는 기와 공기의 한계치가 수 배를 넘는 까닭이다.

우우우우웅.

순식간에 내기를 불려 체력을 되돌린 사내를 보며, 노인은 생각했다.

‘이젠 정말 거의 다 배웠군.’

수준이 낮아서 문제일 뿐, 그간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팬 성과가 이제야 나오는 것 같았다.

흡족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뭐였지?’

노인의 눈이 무림맹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대별산이 나올 것이다.

‘분명 말 못 할 뭔가를 느꼈는데.’

무극을 돌파한 후 아주 오랫동안 도(刀)를 갈고 닦았다.

도(刀)를 갈고 닦으며, 또한 깨달았다. 무공이란 게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그걸 깨닫자 신(神)이 열리고, 신이 열리자 선(仙)에 이른 놈들이 그렇게 부르짖어 대던 뜬구름 잡는 소리들도 죄다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거대해진 상단전은 강호의 제왕 중 하나로 불리는 그에게 상상을 초월한 힘을 안겨 줌과 동시에, 때로는 원치 않은 세상사를 강제로 깨우치게 해 주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일을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자연스레 알려 준다는 건 정말이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싶어서, 그냥 나 혼자 잘난 맛으로 살고 싶어서 오랫동안 상단전에 대해 연구했다.

덕분에 큰 깨달음이 있어 무공이 상승했다. 하지만 반대로 상단전이 불안정해졌다. 신기(神氣)를 조절하려다가 신기의 그릇에 금이 갔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죽은 목숨이었다. 죽지 않아도 대량의 신기가 빠져나가서 광인이 되거나, 기억을 잃게 되어 종내에는 나 자신조차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탄탄한 깨달음은 그릇에 난 금을 어떻게든 메울 수 있었다. 다만, 예전보다는 낮은 빈도나마 한 번씩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세상사를 저절로 깨우치게 되었다.

바로 반나절 전 때처럼.

‘엄청난 기운이었는데.’

노인의 눈은 여전히 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그리 멀지는 않아. 아마도 무림맹이겠지.’

반나절 전, 그쪽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선선한 바람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늦겨울 차디찬 바람과는 질이 다른, 극에 이른 상단전을 지닌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편안하고도 위엄 넘치는 신기(神氣).

‘지기(地氣). 이 널따란 대지를 연상케 하였지만, 그렇다고 땅의 기운만 품고 있었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쉽게도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 이 정도 위치만 되었더라도 그 바람의 향기를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 볼 수 있었을 텐데.

괜스레 답답해진 노인이 제자를 노려보았다.

체력을 가다듬은 사내가 움찔했다.

“왜, 왜요?!”

“……망할 놈 같으니.”

“아, 또 왜요!”

“시끄럽다, 이 약골 자식아.”

노인, 종리백(鐘里柏)이 등 뒤의 큼직한 칼을 꺼내 들었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다시 봐도 정말이지…….’

스승의 칼은 다섯 자가 훌쩍 넘는 거도(巨刀)였다.

칼날 길이만 넉 자요, 손잡이는 한 자가 넘는다. 그 굵기도 상당한 편이었지만, 칼날 너비는 성인 여성의 어깨너비에 육박할 정도였다.

세상에 저런 칼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어떤 미치광이 대장장이가 만들었는지, 그 널따란 칼날에 어울리는 호화로운 도집까지 딸려 있었다.

‘무게 배분이 어떻게 되는 거야, 저거.’

하북의 패자, 팽가의 완력가들이 종종 사람 몸뚱이만큼 거대한 칼을 쓴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라 한들 스승의 저 참악도(斬岳刀)만큼 거대하고 완벽한 신병(神兵)을 보유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종리백이 사내, 오구문(吳拘文)에게 참악도를 던졌다.

“으헉!”

참악도를 받아 내자 무릎이 다 휘청거렸다. 호흡이 돌아오고 내공과 체력 일부를 회복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날아온 중병(重兵)이었다.

“엄살떨지 말고 앞으로 그걸 휘둘러라.”

“예, 예?”

“어차피 지금은 쓸 일도 없으니까 네놈이 쥐고 휘둘러 보라고.”

“……!”

“만날 가벼운 목검만 쥐고 휘둘러 대니까 체력이 그렇게 저질이지.”

오구문의 눈이 흔들렸다.

“사부님……?”

“미리미리 친해져야 할 거다. 그놈, 생각보다 훨씬 난폭한 놈이야. 까딱 잘못하다가는 주인 잡아먹을 놈이니, 잘 억눌러 다스려 봐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단 하나뿐인 후계자를 위해 애쓰는 사부였다.

체력이 저질이니 뭐니 했지만, 이제 참악도를 쥐고 휘둘러도 문제가 없을 시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칼을 건넨 것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모습 속에 섬세함이 있다. 그의 안목과 성정이 그러했고, 또한 능력이 그러했다.

종리백의 눈이 반짝였다.

“계속 머물고 있는 듯한데, 정말 만나 보고 싶군. 대체 누굴까?”

* * *

연호정의 느닷없는 말에 공공대사는 깜짝 놀랐다.

“이보게, 소부주.”

“말씀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먼저 여쭙겠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왜 멀리하려 하십니까?”

“…….”

“무림맹주라는 자리가 누구에게나 버거운 자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 무게를 받아 낼 만한 사람도 흔치 않지요.”

“…….”

“맹주위(盟主位)가 주는 무게감, 자리가 주는 부담스러움 때문입니까?”

공공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이 아닐세.”

“그게 아니라면, 남들이 욕심 많다고 손가락질을 할까 두려우신 겁니까.”

공공대사는 순간 움찔했다.

연호정의 언사는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변함없이 솔직했고,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 목소리가 품고 있는 인자함 비슷한 감정 때문일까? 기분이 나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조차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너무도 부드럽게 깨닫게 된 듯했다.

그래서 공공대사는 놀랐다.

“손가락질이라…… 욕심…….”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네. 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까 무섭네. 소림 방장씩이나 된 사람이 무림맹주 자리까지 넘본다며 욕심 많은 땡중이라 욕하는 것이 무섭다네.”

너무나도 솔직한 발언이었다.

연호정은 물론 제갈문호, 승현진인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솔직하십니다.”

공공대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그리 묻는데 어찌 진솔하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난처한 듯 웃어넘겼겠지.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무엇이 말인가?”

왜일까?

공공대사는 똑똑한 연호정이 자신을 몰아붙이리란 걸 알았다. 대화를 이어 가면 갈수록 분명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대가 되었다.

소림의 절대 무공, 무상대능력의 감지 능력으로도 연호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바뀌었고, 바뀐 그의 목소리와 기질이 공공대사로 하여금 기대를 품게 했다.

“소림 방장이라는 자리는 소림승들에게 있어 권위의 상징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를테면 절대 권력을 지닌 위정자의 자리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 그럴 리가 없지요. 버거운 자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버겁지.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네. 나처럼 모자란 놈이 이 자리에 앉은 이유는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닐 거라고.”

“그 자리에 앉은 이는 책임을 지는 사람일 겁니다. 만에 하나 소림승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나서서 뭇매를 맞아 주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네.”

“그리고 소림을, 불자들을,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일 겁니다. 방장이라는 사람은 그래야 할 것입니다.”

연호정이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당의 장교위(掌敎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천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자리이지.”

“내 집, 우리 살림을 잘 꾸리면서 천하를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비단 두 분 어른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집단의 수장 모두가 그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연호정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무림맹주 역시 그러합니다.”

“……!”

“조금 더 힘들어질 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역할은 다르지 않습니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소부주. 여기 진인이라면 모를까, 나는 맹주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세.”

“죽을까 봐 무서우십니까?”

“……?!”

“맹주로서 죽게 될까 무서우신 겁니까?”

편안한 분위기로 이어 간 대화였지만, 이번 발언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말의 내용이 그러했다.

“죽다니?”

제갈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림맹의 본질을 가장 잘 꿰뚫어 보는 분은 군사님입니다. 그런 군사님은 차세대 무림을 이끌어 갈 새로운 인재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맹주위에 올랐으면 하십니다.”

“그렇다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밀어붙인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 아마 필요 이상의 불만이 나오겠지요. 적도 많이 생길 겁니다.”

“그래서?”

“다만 군사님께서 정녕 그러한 인재를 맹주로 삼고 싶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연호정이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훌륭한 분께서 초대 맹주를 맡아 주시고, 이후 군사님께서 생각하는 멋진 인재를 후계자로 삼으십시오.”

“……!!”

“그리고 초대맹주는 이대 맹주(二代盟主)를 위한 자양분이자 든든한 담벼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전쟁이 터질 수 있는 현실을 보듬고, 사람들의 마음에 안정을 심어 주어야 한다.

나아가 자신의 후계가, 다음 대의 맹주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시들어야 합니다. 죽어야겠지요.”

“…….”

“다음 시대, 새로운 맹주와 천하를 위해서.”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무림맹주(武林盟主)의 역할입니다. 소림을 위해 희생하는 방장처럼, 무림을 위해 희생하는 자리가 맹주직입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다시 묻겠습니다.”

미소 짓던 연호정의 얼굴에 엄기(嚴氣)가 어렸다.

“희생이 두려우십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당할 수도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보다도 더 두려우십니까?”

“…….”

“그렇다고 하시면, 더는 대사님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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