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무림맹주란? (7)
“…….”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다.
꾸르륵.
익숙한 새소리가 들렸다.
차갑게 식은 찻잔, 맞은편 의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연호정에겐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자각했을 뿐, 그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구나.’
우우웅.
심장이 은은한 떨림을 발했다.
폐장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간장은 환해졌고, 신장은 본래보다 더 탄탄해졌다.
후웅. 후웅.
명치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광명신단의 내단기였다. 연가의 오대신공을 모두 연성하여 만든 연가신단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마지막 문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에게 있어 광명신단은 마지막이 아닌 시작이었다.
연가의 비기를 주력으로 삼았다면 광명신단이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훨씬 더 섬세해지고, 훨씬 더 막강한 제어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의 광명신단에 그 정도 힘은 없었다.
아니, 그 정도 힘이 필요치 않았다.
사신기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또 다른 절공인 흑사자기를 잠재우는 것. 빛처럼 환하고 강력한 기운을 응축하여 끊기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
지금까지의 광명신단은 그러했다. 그 정도 역할로 족했단 뜻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홍천기를 익혔다면 훨씬 더 빨리 무극에 이르렀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강해졌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이상은 없다.
스승의 말대로, 그는 홍천기 이상을 원했다. 사신공을 뛰어넘어 사신무 자체의 극의를 이루기 위해 조금 늦더라도 연가신단을 형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실이, 지금 이 순간 맺어졌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기(氣)에는 한계가 없다.’
백호금기(白虎金氣)는 폐장을 담당한다.
그러나 한계를 깬 지금, 그는 굳이 폐로만 호흡하지 않았다.
후우우우우웅!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이 연호정의 몸 전체로 빨려 들어왔다가 나가길 반복했다.
평온하고도 급진적인 변화였다. 멀리서 연호정을 지켜보던 남궁승이 탄성을 질렀다.
“시작하는구나.”
사라라라락!
연호정의 명문혈에서 탁기(濁氣)가 뿜어져 나왔다.
완벽에 이른 육신에 탁기 따위가 남았을 리 없다. 지금 명문혈을 통해 빠져나가는 탁기는 그가 지니고 있던 번뇌의 기운, 상단(上丹)의 탁기였다.
해독, 그리고 여과다. 간장과 신장에서 처리할 일을 청룡목기(靑龍木氣)와 현무수기(玄武水氣)를 이용, 온몸으로 다스려 기의 출입구라는 명문혈로 뽑아내 버렸다.
오장육부가 했던 일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오장육부를 가지고 있다면 마땅히 그것으로 다루었어야 할 일들을 전신으로, 진기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아아아악!
거칠고 사나운 주작화기(朱雀火氣)가 상단전에 남은 불순물들을 그대로 불살라 버렸다.
상단전은 위치부터가 위험한 곳이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광인이 되거나 뇌사(腦死)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피한다 해도 순간의 실수로 쌓아 온 모든 영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주작화기는 최고 출력으로 뿜어졌으며, 어느 한 군데도 이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순수한 영력(靈力)만을 남긴 채 그 외의 삿된 것은 모조리 날려 버린 사신기(四神氣)는 점차 연호정의 몸을 벗어났다.
후웅! 후우웅!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연호정의 몸을 벗어난 사색의 기운들이 자그마한 구체가 되어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남궁승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나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비하고 화려한 볼거리에 불과한 사색의 진기들.
그러나 남궁승의 눈에는 보였다. 그 기운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엄청난 밀도의 힘이.
‘화기(火氣)는 호수마저 통째로 증발시킬 듯 드세고, 수기(水氣)는 산불이라도 단박에 잠재울 듯 농밀하다. 목기(木氣)는 사막조차 수풀로 뒤덮을 듯 활발하며, 금기(金氣)는 수백 그루의 거목도 뿌리부터 날려 버릴 듯 거칠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힘이 그야말로 재해를 방불케 한다.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품고 있진 않겠지만, 그 기세만큼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했다. 지금껏 저토록 거센 기운들을 한 몸에 담고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융합되던 진기가 다시 체외로 튀어나왔다. 실패한 건가?’
그렇지 않다.
천하의 검제라도 사신무를 연성치 않은 바에야 지금의 상황을 분명하게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호정은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성공을 맛보기 위해 서서히 합쳐지려는 진기를 체외로 뽑아냈을 뿐이었다.
‘영원과 찰나의 간극을 오가는 이 깨달음이 사라지기 전에.’
위이이이잉!!
광명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전력을 다할 때면 언제나 이렇게 회전했다. 회전 자체만으로도 강한 힘을 만들어 내 사신기의 출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광명신단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인력(引力)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사방 어떤 외물도 건드리지 않는, 오직 성스러운 기운만을 원하는 빛의 바다.
사방의 신수들이 지닌 힘을 묵묵히 다스리는 용수(龍首)의 알로서 기능할 또 다른 생명의 원천이었다.
‘들어와라.’
연호정의 눈이 뜨였다.
번쩍이는 빛도, 벼락같은 힘도 없는 눈.
그의 눈빛은 마치 득도한 도사와 같이, 해탈을 눈앞에 든 고승과 같이 평온하고도 고요했다.
웅! 우웅!
연호정의 몸 주위를 천천히 돌던 사색의 진기 덩어리가 점점 속력을 높였다.
‘그동안 너희와 함께해 온 세월 덕에 나는 성장했다.’
그토록 빠르게 회전하고 있지만, 연호정의 눈에는 기운 하나하나가 전부 선명하게 보였다.
‘너희와 함께, 더 높은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
사신기(四神氣)는 구결을 안다고 다 연성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구결과 함께 대지에 잠자고 있는 각 기운의 특성을 모아, 나만의 영력(靈力)을 담아 불러내야 한다. 말하자면 소환이다.
한번 소환된 기운은 죽을 때까지 주인의 몸에 남아 성장한다. 사신기가 다른 내공심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영력으로 불러낸 기운들.
그것이 연호정의 상단전과 상통(相通)하니, 기운 하나하나가 생명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다.
백호, 청룡, 주작, 현무.
영력을 지닌 네 가지의 신기(神氣)다. 영혼의 기운이었다.
그 네 개의 성스러운 기운들이, 연호정의 강력한 부름과 순수한 진심에 반응했다.
훅!
가장 처음 들어온 것은 현무기였다.
현무수기. 회귀 후 처음으로 소환한 북방(北方)의 수신(水神).
화아악!
상극이지만 또한 중화(中和)였다.
그토록 사납던 주작화기가 남방(南方)의 화신(火神)으로서 현무의 품에 안겼다.
덜컹!
연호정의 몸이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속이 더부룩해졌다. 각 장기에 깃들어 힘을 불렸던 기운들을 한 곳에 몰아넣었다.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연호정의 마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와라.’
쩌저저적!
중화된 바닷속에 활력의 극치인 동방(東方)의 목신(木神)이 들어왔다.
거대한 하나의 씨앗이, 원천 속에 파고들어 맥동하는 생명의 알을 만들었다. 아직은 작고 작지만, 분명한 형태를 이룬 것이다.
마치 동방목신의 청룡, 그 몸체와 같이.
길고도 유연한 몸체가 작은 알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키워라.’
휘이이이이이잉!!
백색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점차 크기를 불려 갔다.
‘내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어 이것을 키워라.’
훅!!
질풍처럼 쏘아진 백풍(白風)이 연호정에게 스며들어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곧 돌풍이 되어 파도를 일으켰고, 파도는 다시 돌풍에 녹아들어 허공에 뜬 작은 알에 무한한 영양을 공급했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순간.
사신기(四神氣)로 탄생한 하나의 알이, 사신기의 도움 아래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알 속에서 강렬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연호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치이이이이익!!
강한 열기가 차디찬 늦겨울 공기와 만나 수증기를 만들어 냈다.
‘나와라.’
백색, 청색, 적색, 흑색.
그리고 황색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지며 알에 금을 만들었다.
‘너와 함께,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 길을 걷겠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와라.”
술사(術士)들의 위엄 넘치는 언령(言令)과도 같은 한마디.
퍼석!
알이 깨졌다.
“……?!”
어느새 질펀해진 술자리에서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막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많이도 마셨는지 말끝이 묘하게 뭉개졌다.
“가만히 있어 보시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강량이 제 쪽으로 기운 진양의 머리를 옆으로 밀쳤다. 진양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그대로 넘어졌다.
꽤 우스운 광경인데도 막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놀란 듯, 의아한 듯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다.
강량이 묵비에게 속삭였다.
“누님, 갑자기 선배님이 왜…….”
덜컹!
“억!”
벌떡 일어난 묵비 때문에 강량도 넘어질 뻔했다.
묵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조금은 달랐다.
뭔가 알겠다는 듯 익숙함을 드러낸 얼굴, 그러나 그 안에 깃든 경이는 막원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람이 없었다.
강량은 누님까지 왜 그러냐고 외치려다가 순간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
후우우우웅.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늦겨울 산속의 바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바람에도 색이 있다면, 이 바람은 맑고 고운 황금빛으로 물들지 않았을지.
파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네 사람은 순식간에 식당에서 나와 무곡각으로 향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무곡각과 가까이 있던 초고수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뛰쳐나와 남궁가의 거처로 모여들었다.
거기에는 연위가 있었고, 연지평도 있었다. 저 멀리 공공대사와 승현진인 등 봉공과 장로들도 달려오고 있었다.
무곡각의 정문에 도열한 남궁의 무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작스레 이 많은 고수가 몰려오니, 군기가 엄정한 그들로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들을 당혹게 할 만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들어가지 맙시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한 이.
막원이 떨리는 눈으로 무곡각 정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들어가선 안 되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땅이 울렸다.
마치 이 드넓은 대지가 산고를 겪는 어미처럼 구슬프면서도 기쁨 섞인 울음을 토해 내는 듯했다.
그리고.
캬아아아앗!!
범의 포효 같기도 하고, 용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새의 고성 같기도 하고, 뱀의 사나운 위협 같기도 한.
혹은, 그 모든 소리를 합친 것과 같은.
지금껏 그들 모두가 들어 본 적 없는 강렬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빛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번쩍!
요란하기 그지없는 승천이었다. 황금빛 길고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천공을 뚫고 나아간다.
환상이었다. 단연코 환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극도로 연마된 상단전을 지닌 고수들의 눈에, 그것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공공대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이 깨어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