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56화 (856/963)

856화. 무림맹주란? (6)

“표야.”

“예, 예!”

“지금부터 무곡각에 누구의 출입도 금한다. 무사들을 밖으로 물리고 철저히 통제케 하라.”

“……알겠습니다.”

잠시 후, 무사들에게 명을 내린 남궁표가 다시 별실 앞으로 다가왔다.

남궁승은 뒷짐을 진 채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황금빛 기류는 마치 자욱하게 번지는 운무와도 같았다. 그 기운은 조금씩 풍성해졌고, 바닥에 깔린 계단까지 내려오다가 점차 희미해졌다.

“놀랍구나.”

남궁승이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기(氣)가 섞이고 있다.”

“섞이다니요?”

“본디 연호정 소부주는 네 가지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천하일절의 신공이라, 그 기운들을 절묘하게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역량이 대단함을 증명하는 바였다.”

“…….”

“한데 지금, 그 네 가지 기운이 공명하며 하나로 섞여 들어가고 있다.”

“그 말씀은……?”

“모르겠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남궁승의 눈이 반짝였다.

“다만 저 또한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깨달음이 분명할 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겠지.”

무극에 오른 이들에게 깨달음이란 약도 되고 독도 된다.

한 번의 벼락같은 깨달음 덕분에 경지가 크게 상승하기도 하고, 반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남궁승이 무곡각을 통제한 것도 최대한의 변수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잘 보아라.”

남궁승이 남궁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역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심(一心)으로 행한다면, 바로 저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 *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일 년이 지났을까? 아니면 이 년이 지났을까?

퍼어어억!

스승의 손에 가슴을 맞은 연호정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땅을 굴렀다.

“쿨럭!”

피 색깔이 심상치 않았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안색은 창백했고, 눈은 충혈되었다. 그러나 천천히 몸을 세우는 연호정의 자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

스승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눈썹 하나 까딱이지도 않았다.

“보아라.”

바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스승이 부드럽게 장을 뻗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손길. 청룡공의 용군삼형, 청룡발주(靑龍發珠)의 투로(套路)였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흔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압도적인 내공으로 바위를 쪼갠 것도, 날려 보낸 것도 아니었다.

“어떠냐?”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말없이 수도(手刀)를 내리쳤다.

쩍!

허공을 격했을 뿐인데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순간 어린 연호정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환상을 보는 현실의 연호정도 크게 놀랐다.

어린 연호정은 바위 안의 상태에 놀랐고, 현실의 연호정은 바위를 가른 스승의 참격(斬擊) 그 자체에 놀랐다.

“보았느냐?”

“어, 어떻게……?”

일장(一掌)에 맞은 바위 중심부는 동그랗게 파여 있었다.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였고, 쪼개지는 순간 돌가루가 바람에 휘날렸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너에게는 무리다. 하지만 이 바위를 친 나의 무공이 무엇인지는 보았을 것이다.”

“청룡공…… 청룡발주였습니다.”

“청룡발주는 강한 탄력으로 적의 공격을 휘감아 반격하는 반격술이다. 그 자체로는 별다른 위력을 내지 못하지.”

“…….”

“구결은 그렇지만, 실제는 다르다. 적의 공격이 없었는데도 나는 바위를 이렇게 만들었다. 인체였다면 맞은 즉시 죽었을 테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상식을 버리면 된다.”

“예?”

“백호는 공격, 청룡은 반격과 회피를 담당한다. 주작은 즉살의 살법이며, 현무는 절대의 방어다. 맞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내친 주먹을, 내 백호공으로 맞부딪쳐 물리쳤다. 그럼 나는 공격을 한 것이냐, 방어를 한 것이냐?”

“……!”

“네가 휘두르는 다리를 북천십이벽으로 막아 튕겨 냈다. 자세를 잡지 못한 너는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방어를 한 것이냐, 공격을 한 것이냐?”

“…….”

“공격과 방어, 회피와 반격, 살법과 활법은 모두가 하나다. 각자가 그에 맞는 특성을 가졌을 뿐 수십, 수백 가지의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사신무가 어렵다. 사신무를 완벽하게 체득(體得)했다 함은, 무아지경 속에서도 본능적인 조합을 통한 무공 구현이 가능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

“딱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입문(入門)이다. 사신무가 최강의 전투술이라 불리는 이유다.”

“……!!”

“나아가 연무(鍊武)의 과정을 거치고 극치(極致)에 이르게 되면, 투로가 극단적으로 단순해진다. 기(氣)의 세밀함이 그것을 대신하겠지.”

“극치.”

“그렇다. 거기까지 도달하게 되면 극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투술의 극치일 뿐, 그것이 사신무의 끝은 아니다.”

“끝이 아니라니요?”

“상식에 얽매이지 마라. 모든 상식을 허물어트리는 순간, 사신무는 신왕공(神王功)으로 변한다.”

“…….”

“내가 해 줄 말은 그것뿐이다.”

“신왕공이라면, 예전에 말씀하셨던 황룡을 뜻하는 것입니까?”

“너에게는 너무나도 머나먼 경지다. 어쩌면 죽기 전까지 그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은 잊거라.”

후우우우웅!!

또 한 번 세상이 바뀌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연호정은 스승과 함께 수련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연호정은 크게 놀랐다.

‘저런 일들이 있었나?’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수련의 나날들이었다. 어찌나 지독했는지,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한데 이렇게 보니, 정말 많은 것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스승께서 해 주신 말들은 하나같이 신선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호정은 또 다른 세상에 진입하여 스승의 말을 들었다.

“네게 홍천기를 전수한 것은 너의 기본이 워낙 허술했기 때문이다. 물론 홍천기만으로도 능히 절공이라 할 만하나, 그 이상을 넘보려거든 나름의 깨달음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면 사신무에 더 적합한 새로운 무공을 연마하거나.”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또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때마다 스승의 말은 연호정의 정신과 마음을 뒤흔들었다.

“무공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세상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무공만 배우면 세상을 모르지만, 세상을 배우면 무공도 성장할 수 있다. 무공 하나만 믿고 날뛰려 하지 말고, 더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해라.”

“감정은 허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허상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렇다면 눈에 훤히 보이는 이 육신은 인간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느냐?”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하지 말고, 들리지 않는다고 무시하지 말아라. 보려 하면 보일 것이고, 들으려 하면 들릴 것이다. 결국 오감이라는 것도 다 내 마음 안에 있다.”

“어느 현상을 해석할 때는 언제나 근본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닌 법. 근본을 알기 위해선 더더욱 바깥부터 훑어야 한다. 고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통찰력은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개성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 걸음걸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가 다르고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의 완성을 이루려면, 헤아릴 수 없는 개성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특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너에게 무공은 무엇이냐? 수단이냐? 목적이냐? 수단이라면 웃으며 살 것이고, 목적이라면 고통스럽게 살 것이다. 그러나…….”

평온하게 스승의 말을 복기하던 연호정은 순간 정수리에 벼락이 꽂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무공을 목적으로 둔다면, 고통스러울지언정 통달(通達)하게 될 것이다.”

훅!

일순 세상이 어두워졌다.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다시 처음의 어둠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저 편안함을 느꼈다.

“알겠느냐?”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뒷짐을 진 스승이 있었다.

어쩐지 얼굴이 흐릿했지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그분이 스승이라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까.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너를 두고 떠난 것은 나다. 그리 말할 것 없다.”

“그렇습니까.”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영원 같던 침묵을 깬 것은 스승이었다.

“너도 많이 늙었다.”

“아직 젊습니다.”

“그럴 리가.”

순간 연호정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손을 보고, 상의를 열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흑암제의 몸이었다. 회귀 후 패왕의 별호로 불리게 된 연호정이 아닌, 흑암제의 몸으로 수년을 더 산 몸뚱이가 여기에 있었다.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예. 꽤 먹었습니다.”

“그만큼 살았는데도 네 영혼은 아직 젊구나. 뜨겁게 맥동하는 생기가 훤히 보인다.”

“…….”

“잘 컸구나.”

“……!”

“이제야 가르친 보람을 느낀다.”

연호정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스승은 함께했던 몇 년 동안 칭찬다운 칭찬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칭찬에 한없이 인색한 사람, 자애와는 거리가 먼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듣는 스승의 칭찬.

무공의 성취가 아니라 영혼이 늙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로소 웃어 주는 은인이다.

격해지는 감정을 추스른 연호정이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스승님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이 공간이 중요한 게 아닌 것처럼, 지금 네 앞에 있는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따지는 게 무의미한 것처럼.”

“……그도 그렇군요.”

“그저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으냐?”

“족하지 않습니다.”

연호정은 분명하게 말했다.

“명백한 세상에서, 다시 뵙고 싶습니다.”

“연이 닿으면 그리되겠지.”

“하늘이 인과응보에 느슨하다면, 사람의 손으로 철퇴를 가하면 됩니다.”

“…….”

“하늘이 인연의 실을 닿게 하지 않는다면, 제가 강제로 닿게 하면 그만이지요.”

“어릴 때는 말수가 적어 몰랐거늘, 이제 보니 말솜씨가 아주 제법이다.”

“자주 듣습니다.”

스승이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사념에 불과하다.”

“…….”

“네가 진정 이 영역에 도달하면, 이렇게나마 한번 보고 싶었다. 평생 볼 수 없을 줄 알았건만.”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너는 이미 인간의 탈을 벗고 신선이 된 자가 남긴 선기 그득한 산에도 다녀왔다.”

무당산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걸 스승님께서 어찌 아십니까?”

“사념이지만, 네 안에 있으니까.”

그저 자신의 말에 반응해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스승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묘하게 서정적으로 들렸다. 가슴을 울렸고,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한(恨)은 무저갱처럼 깊었고, 증오는 바다처럼 넓었다. 너는 그런 아이였다.”

“…….”

“용케 모든 걸 버리고 예까지 왔구나.”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잠시나마 무공을 놓았을 뿐입니다.”

“무인에게 무(武)란 목숨과도 같은 것. 통달(通達)한 무를 놓았으니, 네 한과 증오도 조만간 내려놓을 수 있을 게다.”

“……예.”

고개를 끄덕이며 스승을 보던 연호정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이 웃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소 짓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가거라.”

“스승님.”

“황룡(黃龍)을 오해하지 말아라. 황룡은 깨달음이야. 그에 이르렀다고 한들, 당장에 두 배 세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승이 몸을 돌렸다.

“그 옛날 여물지 않은 주먹으로 바위를 쳤을 때처럼, 피범벅이 되는 과정을 수도 없이 거쳐야 비로소 입문(入門)이나마 할 것이다. 중원 제일은 아직 멀었어.”

흔들리는 눈으로 스승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봐 줄 만하지 않습니까?”

스승이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연호정을 본 스승이 피식 웃었다.

“언제나 봐 줄 만했지, 너는.”

“…….”

“스러진 인연에 연연치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라.”

그 말을 끝으로, 스승은 사라졌다.

가만히 어둠을 보던 연호정이 천천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화아아악!

어둠이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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