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화. 무림맹주란? (5)
어둡다.
사방에 빛이라곤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으니 위아래도 구분하지 못하겠고, 좌우는 물론 앞뒤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뭐지.’
연호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뿐인데, 희한하게도 자신의 몸은 선명히 보였다.
한참이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났다.
하얗고도 하얀 빛줄기가 점차 굴곡진 형상을 이루었다. 네발 달린 짐승처럼 보이던 빛은, 어느새 등 뒤로 산맥 같은 어둠을 그려 나갔다.
‘오른쪽인가.’
그럼 왼쪽은?
후우우웅.
가벼운 바람이 부는 듯했다.
아무것도 없던 어둠 속에서 점차 환상처럼 청록빛 뱀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두 개의 뿔, 기다란 수염이 좌우로 물결처럼 흔들렸다.
‘용?’
연호정이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호랑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그렇다면.’
연호정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화르르륵!
거대한 두 날개를 펄럭이는 불꽃 형상의 새가 있었다.
신비로움으로 가득했던 좌우의 신수(神獸)와 달리, 남쪽의 불새는 오직 화려함으로 가득했다. 온기가 느껴지진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움이 느껴질 정도로 온몸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
한참 동안 불새를 보던 연호정이 이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요했다.
농도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나타난 육각(六角) 귀갑의 동체, 얼굴과 꼬리 부분에 뱀처럼 보이는 형상이 연신 꿈틀거렸다.
‘앞과 뒤, 남과 북.’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
‘사신(四神)이다.’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사방의 신수.
지금껏 그를 지켜 주었던, 그의 놀라운 행보를 가능케 했던 원천.
이들이 사신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번쩍!!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벼락처럼 지상에 내리꽂힌 것만 같았다.
폭발하듯 번져 나오는 빛의 폭풍 뒤로, 익숙한 광경이 드러났다.
‘여기는……?’
그때였다.
“하압!”
쿵! 쿵!
젊은 청년이 맨주먹으로 바위를 두들기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 빼빼 마른 몸은 보기에도 가여울 지경이었다. 신발은 어디에 두었는지, 맨발로 눈 덮인 땅을 디딘 채 연신 바위를 때려 댔다.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나?!’
그렇다.
주먹으로 바위를 치며 수련하는 사람은 바로 과거의 자신이었다.
다만, 회귀 후의 과거가 아니다.
회귀하기 전, 흑암제라 불리기도 전.
가문이 멸문하고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돌다가 스승을 만나 홍천기(洪天氣)와 사신무(四神武)를 전수하였을 때.
새로운 무공과 무서운 집념으로 수련에 집중했던 그때 그 시기였다.
‘어떻게 이런……?’
이제는 기억도 어렴풋한 그 시기를, 이 세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과거로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수십 년 전의 나. 사신무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의 나.
세상이 그때의 나를 보여 주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만하거라.”
퍼어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어린 시절 연호정의 주먹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이미 피범벅이 된 주먹이었지만, 또 한 번 상처가 터졌다.
“후욱! 후욱!”
“무공을 수련하라 했지, 분풀이를 하라고 한 적은 없느니라.”
연호정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벅저벅.
묵직하면서도 깃털처럼 사뿐한, 너무나도 상반된 이 걸음 소리.
스륵.
연호정을 지나친 하얀 의복의 노인이 어린 시절의 그에게로 다가갔다.
“허억! 허억!”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구나. 중간에 끊지 않았다면 호흡이 끊겨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우우웅.
어린 연호정의 등에 내력을 주입하는 노인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였다.
“후우우.”
어린 연호정이 길게 숨을 뱉었다.
털썩!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어린 연호정의 얼굴에는 허망함이 가득했다.
노인이 말했다.
“손이 엉망이 되었구나.”
“…….”
“신발은 언제 다 닳았느냐? 동상 직전이다.”
“…….”
어린 연호정은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그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바위에 분을 푼다고, 네 가문을 무너트린 악적들이 죽기나 한다더냐?”
“……!”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것이다.”
사아아악!
연호정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살기는, 놀랍게도 지금의 자신 이상이었다. 일류는커녕 이류라 하기도 애매한 저 시절의 자신이, 무극을 넘은 지금보다도 더 과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파괴될 정도의 무시무시한 살기.
초절정고수도 심중에 타격을 받을 만큼 농밀한 살기를 피우는데도, 어린 시절의 자신은 멀쩡했다.
훅!
노인이 손을 휘젓자 살기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연호정조차 노인이 무슨 수로 살기를 씻어 낸 것인지 알지 못했다.
“무서운 살기구나.”
“…….”
“내 이 땅을 침범했던 마교 무리와도 싸운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었지. 그러나 그 마귀 놈들 중에서도 너처럼 과격한 살기를 드러내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마교 무리라니?
연호정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당연한가.’
어린 시절의 자신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증오도 표출하지 못하고, 천하를 피로 물들일 정도의 살기마저 빼앗겼으니 거의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무골(武骨)을 타고나진 않았지만, 너의 정신만큼은 누구보다 대단하구나. 그 정신을 사무치는 슬픔과 좌절이 만들어 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만한 그릇을 타고났다면, 누구보다 빨리 선도(仙道)에 이를 수도 있었을 터인데.”
노인이 한숨을 쉬며 어린 연호정의 양손을 잡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우우우웅.
대기가 비틀리는 듯했다. 환상을 보는 연호정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환상이지만, 또한 환상이 아니었다. 피부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대기의 흐름이 기묘했다.
‘기(氣)?!’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외기(外氣)가 이렇게까지!’
풍부한 영기(靈氣)를 가득 머금은 산의 정기가 무서운 속도로 어린 자신의 몸에 들어갔다.
‘이럴 수가.’
놀라움 이상의 경이다.
‘스승님께서는…… 어찌 이런 능력을……?’
자신 앞에서는 한 번도 능력을 제대로 보여 준 적이 없었던 분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했을 뿐, 스승은 인간을 넘어 반선(半仙)조차도 초월한 능력을 거리낌 없이 선보이고 있었다.
아니, 그 시절 자신은 스승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자신을 가르치실 때 외에는 그 흔한 신법 한 번 펼치신 적이 없었던 분이다.
‘격체전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자신의 기를 타인에게 전달하여 내공을 불려 주는 것을 격체전력이라 한다. 물론 자신의 기로 타인의 내상을 바로잡는 것 역시 격체전력의 일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승의 능력은 그러한 차원을 넘어섰다.
자신의 몸을 매개 삼아, 무한에 가까운 자연기(自然氣)로 타인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해 낸다.
기(氣)는 치유의 성질이 있어, 무극의 고수들 역시 부러진 뼈를 완전히 복구하는 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빠르게, 순간적으로 모든 상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될 능력이었다.
‘마치 마(魔)와 같다.’
마공의 극치를 이룬 자의 초회복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스승의 능력은 그조차도 넘어섰다. 극도로 음한 마기의 부정한 능력이 아닌 자연기를 통째로 끌어와 쓰는 것이니까.
“보아라.”
어린 연호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멍한 눈, 혼란이 가득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노인은 안심하라는 듯 웃어 주지도 않았다. 그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고수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악업을 쌓은 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뜻이지.”
“…….”
“그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만은 그것이 진리로 적용되지 않는다.”
“…….”
“나쁜 짓을 한 놈 중에는 잘 먹고 잘살다가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는 놈들도 많다. 정녕 인과응보라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그러나 저 하늘은 악인을 처단하지 않기도 한다.”
“…….”
“광활하고 깊은 하늘의 뜻을 뉘라서 알겠느냐? 그러나 하늘이 인간의 인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이라면, 인간의 복수심과 증오까지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
“나는 함께 싸운 전우들에게 내 무공의 일부를 전수했다. 그들의 후예는 강호에 나가 그럴듯한 가문을 세웠다. 그 가문은 오랜 세월을 거쳐 천하제일로 불리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지만, 뒤로는 온갖 악업을 쌓고 있었다.”
“…….”
“하늘은 그들을 벌하지 않았다. 그 죄가 수십 년간 쌓였는데도. 하여 내 직접 그들을 벌하려 했지만, 그들의 무공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선조의 무공도 많이 유실한 상태였지.”
“…….”
“그들은 곧 패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 자명하다. 말하자면 자업자득이요, 하늘이 내린 철퇴라고도 할 수 있다. 굳이 내가 손을 쓸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디서 그 억울함을 풀겠느냐? 죽어서라도 눈을 감을 수나 있겠느냐?”
노인, 스승이 어린 연호정의 손을 꽉 잡았다.
“나는 너에게 하늘을 대신하여 응보의 철퇴를 내리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그러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너의 한과 분노를 이해하지만, 네가 아니기에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내가 너에게 이 힘을 주는 것은 단순히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다. 나와도 연이 있는, 그러나 선대 이후로 연이 끊어진 그 악랄한 가문 때문에 피해를 봐서도 아니다.”
“…….”
“내가 너를 가르치는 것은, 너의 천품(天品)을 믿기 때문이다.”
어린 연호정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너에게 많은 걸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 강요하진 않을 것이다. 복수를 원한다면 하고, 세상을 손에 넣고 싶다면 그리하라. 악인을 처단하고 싶다면 죽이고, 바다 건너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면 그 또한 좋다.”
“…….”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너 자신의 발전이 필요하다. 분노와 증오를 풀어헤치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다만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이 시기를, 그러한 감정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돼.”
“……사부님.”
“그래, 안다. 어찌 모르겠느냐. 하나 네 삶은 당장 끝나는 것이 아니잖느냐?”
스승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 흑암(黑暗)만이 가득하던 세상에 빛이 내려와 만인을 비추었으니, 그 빛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닿아 있다.”
“…….”
“자유로워지거라. 증오로부터, 한으로부터. 적어도 몇 해만이라도 그 사무치는 감정을 눌러 놓아라.”
“…….”
“이후 네가 나의 진전을 잇고 훗날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면, 그때야 비로소 황제(黃帝)가 널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