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화. 무림맹주란? (2)
“끄응.”
어깨를 매만지는 연호정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다 늙었는데도 뭔 힘이 그렇게 센 건지.”
막원이 피식 웃었다.
“투덜대는 꼴을 보니 그래도 살 만한 모양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끝날 줄은 몰랐습니다.”
“말이 이 정도지, 까딱 잘못했다간 죽을 수도 있었겠는데?”
“살벌하긴 하더군요. 그래도 그 노친네, 힘을 어느 정도 숨기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게나 말일세. 워낙 눈빛이 사나워서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절제는 하시더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일행은 깜짝 놀랐다.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요? 검제 노선배님이요?”
묵비의 말에 막원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 당연한 것 아닌가?”
“다, 당연하다고요?”
“진정한 깨달음을 꺼내 들었을 뿐, 죽이자고 싸웠으면 자네들도 무사하지 못했어. 일대가 초토화되었을 테니까.”
“……!”
“그리고 그건 아우님도 마찬가지일세. 진심으로 싸웠지만, 죽이자고 싸운 건 아니지.”
모두의 시선이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그들이라고 연호정이 대단한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항상 함께해 왔던 사이인 만큼, 무공의 깊이는 모를지언정 누구보다 강한 무인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연호정의 무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수천 명이 도열해도 넉넉한 초거대 연무장에서 단둘이 싸웠을 뿐이다. 그런데도 당분간 쓸 수 없을 만큼 연무장 전체가 갈라지고 박살 났다.
한데 그게 진짜로 싸운 게 아니었다니.
연호정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온 힘을 다하기는 했지. 하지만 서로의 깨달음을 보는 자리였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강량이 꿀꺽 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당가에서 보여 준 형님의 힘은 정말 엄청났지요.”
광혈교의 사제장과 싸우며 무극에 올랐었던 그때.
무한의 경지에 진입하여 신체와 기가 변화를 맞이한 것만으로도 한참 멀리 떨어진 전장이 휩쓸릴 정도의 충격파가 나왔다.
물론 그것은 연호정의 상태가 남들과 달랐던 것에 기인한다. 하나로 엮인 무공이되 남들보다 훨씬 많은 기운을 품고 있으니, 그 모든 기운을 무한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면 훨씬 더 많은 외기(外氣)의 교감이 필요했다.
그것이 충격파가 되어 반경 백 장이 넘어가는 영역까지 돌풍을 일으켰다. 실제로 한 경지를 뚫었다고 하여 그렇게 요란한 광경을 연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말 대단했어요.”
묵비와 강량이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형을 아끼는 연지평이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두 눈 가득 몽롱함을 품고 있는 게, 아직까지도 어제의 승부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무림 정점에 오른 고수들의 겨룸은 확실히 다르더군요. 움직임을 제대로 좇을 수가 없었지만…… 배울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강량의 눈이 커졌다.
“배울 게 많았다고?”
“예.”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강량을 보는 연지평의 얼굴은 여전히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형님도 보셨잖아요? 극치에 이른 진기 운용의 섬세함을.”
“물론…… 보았지. 요만큼.”
“세상에 그렇게 막강한 기(氣)를 거미줄처럼 흩뿌리면서도 단 하나의 빈틈도 없이, 그것도 순간순간 공식을 바꿔 가며 공방을 벌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연지평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몽롱한 두 눈, 의지를 불태우는 게 아니라 아직도 그 싸움에 몰입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움의 극치였습니다. 누가 있어 그러한 무공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강량은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연지평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묵비와 진양은 물론, 막원조차 깜짝 놀라 연지평을 보았다.
“자네 설마…….”
막원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게 보였나?”
“예? 저, 저요?”
“그래, 자네.”
“……물론이지요.”
연지평은 아직 막원이 어려웠다. 친형과 의형제를 맺었다지만, 막원 역시 강호의 전설로 불리는 성천의 고수가 아닌가.
“전부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흐름을 외우고 싶어도 찰나지간 몇 번이나 발경술이 바뀌어서 눈에 담아 두는 정도밖에 안 되었지요. 저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천외천의 경지입니다.”
“……허.”
막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연지평의 얼굴이 붉어졌다. 막원의 반응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기가 차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게 아닌데.”
“예?”
“부족한 게 아니라,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서 문제인데?”
“……?”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연지평의 얼굴은 퍽 순진해 보였다. 어엿한 청년이 되었음에도 천성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막원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핏줄인가? 무종지벽을 넘지도 못한 아이가 중원 정점의 고수들이 구사한 진기 운용을 엿보다니?”
“하하.”
“웃어넘길 게 아니야, 이 사람아. 어떤 의미로는 아우님보다 더 대단한 거라고, 이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보다 훨씬 더 재능 있고, 훨씬 더 겸손한 아이입니다. 가끔은 무섭더라고요.”
막원이 혀를 내둘렀다.
“이런 괴물 같은 인재를 더 키울 생각은 안 하고 그리 중원을 쏘다녔나? 너무 무심했던 거 아닌가?”
“저와 함께 다녔다면 지금보다 강해졌을지언정 저만한 눈을 기르지는 못했을 겁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면 지금 이대로가 나아요.”
“허.”
“본디 천재란 스스로 커야 제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저 같은 놈이 건드릴 만한 녀석이 아니지요.”
강량은 새삼스레 놀랐다는 듯 실없이 웃었고, 묵비는 따뜻한 눈으로 연지평을 보았다.
진양의 표정은 조금 침울해졌다.
“비비지도 못하겠군.”
“음?”
“솔직히 내 재능 같은 건 신경 써 본 적이 없소. 당신을 따르기 전까지는.”
“그런데?”
“이후에는 나도 제법 출중한 재능의 소유자구나 싶었는데, 당신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었구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가끔 바보 같아서 그렇지, 너도 보통 천재는 아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진짜 진정성 없이 들리는 거 아시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여하간 너도 열심히 해라. 소정광에게까지 따라잡히면 부끄러워서 같이 다닐 수나 있겠냐?”
“헐.”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밥이나 드시러 가시죠. 배가 너무 고픈데요.”
“그럴까.”
연호정이 연지평에게 말했다.
“아버지 혼자 드시게 하지 말고 너는 이만 가거라. 이따 저녁에 들르도록 하겠다.”
“예, 형님.”
“너무 그렇게 사로잡히진 말고.”
“예?”
연호정이 연지평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보고 놀라워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자꾸 몰입하다 보면 네 수련도 안 될 거야.”
“아, 예!”
“그런 건 재능에 상관없이 독이야. 강한 집착 자체가 독이 되는 게 아니라, 집착하지 말아야 할 때 집착하기 때문에 독이 되는 거다. 그 차이를 분명히 해 둬라.”
“알겠습니다, 형님.”
진양은 연호정의 말을 기억해 두려고 열심히 웅얼거렸다. 꽤 멋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자, 가시죠.”
“그러세.”
그때였다.
“…….”
일행이 일제히 팔성각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우님은 참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구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먹을 복이 없는 거겠지요.”
묵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따 저녁에 아버님이랑 같이 먹어요.”
“그래야겠어.”
잠시 후.
“연호정 소부주를 뵈러 왔소.”
낯선 듯하면서도 왠지 익숙한 목소리.
밖으로 나온 연호정이 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딱딱한 표정의 남궁표가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로?”
말이 짧았지만 남궁표의 표정에 흔들림은 없었다.
“조부님께서 뵙고자 하시오.”
그럴 줄 알았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내하시오.”
남궁승은 당연하게도 남궁세가의 거처인 무곡각(武曲閣)에 있었다.
다만 무곡각에도 별실이 따로 있어,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는 남궁승은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무곡각으로 가는 길.
뒷짐을 진 채 남궁표의 뒤를 따르는 연호정의 모습은 여유롭다 못해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비결이 무엇이오?”
“음?”
남궁표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연배에 그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오?”
연호정보다 예닐곱 살은 더 많은 남궁표였다.
특히 남궁세가는 검중제일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가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정통 검법의 달인이라 불리는 연가는 썩 좋게 보일 수 없었다.
하물며 뛰어난 재능과 강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남궁표에게 있어, 연호정은 정말이지 질투 나는 존재임과 동시에 떨떠름한 존재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사람마다 발전 방법은 다 다른 법이오. 모르지 않을 텐데?”
“알고 있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대의 성취는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지 않소?”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기괴하게 보일 것이고, 상식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대단해 보일 것이오.”
“……!”
남궁표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상대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에 더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비정상적’이라는 단어로 튀어나왔다.
비정상적이긴 하다. 전례가 없는 성장 속도니까.
그러나 굳이 부정적인 단어를 써 가며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 상황도 아니었다.
남궁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호정이라는 존재가 지나치게 신경 쓰인다는 사실을.
“그러나…….”
“어차피 말해 줘도 모를 것이고, 알아도 그건 내 방식이지 그대의 방식은 아니오.”
“…….”
“성장의 방법은 많고, 해결안은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법이오. 고뇌의 대상을 자신에게로 돌려야지, 남에게 답을 구하려 해 봤자 의미가 없소.”
“…….”
“조언 정도야 가능하지만, 솔직히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소?”
남궁표의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곡각에 들어선 두 사람이 별실로 발을 옮겼다. 중간중간 남궁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연호정을 보는 그들의 눈은 선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궁표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좋지 않아.’
굳이 자신을 향하지 않더라도, 명백한 타 가문의 인재에게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것은 탐탁지 않은 일임과 동시에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들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별실 앞에 도착한 남궁표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조부님. 표입니다.”
“왔느냐.”
“연가의 장남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였다.
덜컹!
손도 대지 않은 별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순간 놀란 남궁표가 문 안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남궁승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남궁표가 고개를 숙였다.
“조부님.”
“어디서 배워 먹은 말버릇이냐.”
“……예?”
“무림인은 지닌바 무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그 무력은 성천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고 지위 역시 동맹인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거늘, 어째서 네 언사가 그리도 경망스러운 것이더냐?”
“조, 조부님?!”
“설마하니, 저이가 너와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게다. 소부주에 대한 무례,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줄 것이나 다시 한번 그따위 말버릇을 보인다면 전대 가주로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남궁표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쯧.”
혀를 찬 남궁승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더 때려 줄 게 남으셨습니까?”
남궁승이 헛웃음을 지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안으로 들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