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화. 무림맹주란? (1)
“음?”
노인이 자신이 들고 있던 목도(木刀)를 내려다보았다.
“헉헉! 왜 그러십니까?”
“…….”
“스승님?”
“……아니다.”
노인이 입맛을 다셨다.
“너무 대충 만들었나? 안쪽 심지에 금이 간 것 같다.”
“대단하신데요? 그런 것까지 느껴지십니까?”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그렇게 감이 떨어지니까 이 위대한 스승의 발끝도 쫓아오지 못하는 거다.”
“제 나이에 스승님과 비견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시끄럽다! 그놈 참, 붙잡고 가르친 지 어언 십 년이 넘었거늘 어째 아직도 기본을 졸업하지 못했누.”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에는 스승이 말한 ‘기본’이라는 게, 정말 남들이 말하는 기본기인 줄 알고 자신의 재능을 한탄했더랬다.
하지만 스승이 잠시 외유를 나갔을 적, 어쩌다 무림인들과 시비가 걸린 적이 있었다. 길을 가던 일가족을 죽이려 들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목도를 뽑았다.
승부는 아홉 합 만에 끝이 났다. 무림인들의 실력이 너무 낮았다.
한데 나중에 그 무림인들이 산동에서 제법 이름이 난 산동삼악(山東三惡)이라는 걸 들었다. 하나하나가 절정고수에 육박하는 실력자들로, 수년간 산동에서 온갖 악행을 벌이던 마귀들이라고 하였다.
즉, 자신의 실력은 이미 무림에서도 제법 알아줄 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사 년이 지난 지금.
스승은 아직도 기본이 안 됐다며 자신을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놈 봐라? 가르침을 받는 놈이 제멋대로 수업을 중단한다고?”
“수업 맞죠? 단순 폭행이 아니라?”
“오늘 날 샐까, 아주?”
“아오, 무림맹 안 가십니까?! 어떻게 두 달을 뛰었는데도 이제 겨우 하남입니까! 저 죽어요, 이러다가!”
“안 죽어, 이놈아! 고작 두 달 훈련으로 죽을 만큼 이 스승의 무공이 만만해 보이냐!”
“적당히가 안 되잖아요, 적당히가!”
“적당한지 아닌지는 내가 정한다, 이 자식아!”
파아아악!
그렇게 덩치가 큰데도 노인의 움직임은 벼락을 방불케 했다.
“이익!”
사내가 이를 악물고 목도를 휘둘렀다.
퍼버버버버벅!
신명 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이 산을 울렸다.
잠시 후.
“좀 쉬다가 운공 들어가라. 오늘은 이쯤 해 주지.”
“콜록콜록!”
“에이, 약해 빠진 놈 같으니라고.”
투덜대던 노인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허, 하늘이 맑구만. 사람 패기 좋은 날이로고…….”
“우웨엑!”
“시끄러워!”
“쿨럭! 제, 젠장.”
제자의 무엄하기 짝이 없는 말에 노인이 피식 웃었다. 맞기 싫어하는 놈 주둥이에서 젠장 소리까지 나온 걸 보면, 정말 힘들긴 힘든 모양이었다.
노인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림맹이라…… 뭐, 무림맹 정도면 저 멍청한 제자 놈에게 자리 하나는 만들어 주겠지.”
기본이 안 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가르칠 건 다 가르쳤다. 남은 건 무수한 실전과 개인의 노력이다.
‘그나저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림맹에 재미난 게 있을 거라고? 정말 그러려나?’
워낙 허풍이 심한 양반이지만, 그래도 자세 잡고 말할 때만큼은 거짓이 없었다. 그 호랑말코의 말대로라면, 갑갑한 이 인생에 재미가 되어 줄 흥밋거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어허, 어허. 다시 봐도 날이 좋구먼. 이놈아, 빨리 운공 시작해라. 얼른 회복해야 또 빨래질을 하지.”
“그냥 저를 죽이세요.”
“싫어.”
“왜요? 때리는 건 좋고 죽이는 건 싫습니까?”
“제자 또 구해야 되잖냐. 그리고 네가 죽으면, 십 년 넘게 네놈만 가르친 내 인생은 뭐가 돼?”
“으어어.”
* * *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무사가 무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드시랍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쉰 천효락이 무성전으로 들었다.
쿠구궁.
무성전은 거대한 대전이었다.
하지만 크기만 컸을 뿐 볼품은 없었다. 아무런 치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의자나 탁자, 융단이나 태사의 같은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맹주가 없기 때문인가.’
무성전은 무림맹주가 거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봉공들이 회의를 할 때면, 무성전 뒤쪽에 나 있는 회랑을 통해 회의장으로 가야 했다.
헛기침으로 목을 푼 천효락이 회랑으로 들어갔다.
‘…….’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그는 묘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이건…….’
고수의 기운은 아니었다. 일부러 누군가가 기파를 발산하여 압력을 가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천효락은 속이 텁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상극(相剋).’
강렬하기 그지없는 힘의 소유자.
어제 무림맹 외성에서 비무를 벌인 무신(武神)들에 비할 수는 없으나, 저 회의장 안에는 굉장한 고수들이 있다. 화향 정도는 스무 합 안에 제압 가능한 고수들이.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힘은, 화향이라도 세 합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오셨구려.”
회의장 안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소림의 공공대사, 무당의 승현진인, 군사인 제갈문호.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새로이 봉공으로 추대된 점창 장문인 장인릉과 당관이었다.
천효락이 포권을 취했다.
“신마림(神魔林)의 천효락이 무림맹을 이끄는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공공대사가 웃으며 손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반갑소. 일단 거기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천효락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사람이다.’
우우웅.
이명이 들리는 듯하다.
기도를 드러내기는커녕 본래의 존재감마저 죽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봉인된 마기가 마구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마기는 의지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 탓에 속이 더부룩해질 지경이었다.
‘이 사람의 내공 때문이야.’
마공과 신공은 상극이다.
그중에서도 불가(佛家)의 신공은 항마(降魔)의 힘이 담겨 있어, 마공을 연성한 이들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천효락의 마공 성취가 훨씬 더 뛰어났다면 공공대사의 몸이 이상해졌을 것이다.
먹고 먹히는 관계. 상극이란 그런 것이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쫓아내지 않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천효락은 자신을 낮추고, 또한 솔직하게 말했다.
공공대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람됨이 차분하고 진중하니 오늘 대화가 참으로 기대가 되오. 안 그렇소, 군사?”
“그렇군요.”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연 소부주에게 얘기는 좀 들었습니까?”
“예. 저를 먼저 떠보라고 보내셨다고 하더군요.”
“거 사람 참,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멋쩍은 듯 웃은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마도 무림은 대대로 백도와 상극이었습니다. 그 역사는 피로 점철되어 있으며, 흑도 역시도 마도를 두려워하지요.”
“그랬지요.”
과거형이다.
단순한 대답이지만, 그 안에 깃든 뜻은 남달랐다. 제갈문호는 대번에 그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먼 길 오신 손님이시니 저희로서도 마땅히 대접해 드려야겠지만 그간의 역사가 환대를 허락지 않는군요. 이 부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합니다. 오히려 지내기가 아주 편했습니다.”
“그리 느끼셨다면 다행이군요.”
그때였다.
“없소.”
뜬금없는 당관의 말에 모두가 그를 보았다.
당관이 조금은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암기나 폭약 같은 것도 없고, 독공을 연성하지도 않은 것 같소.”
“커흠! 당가주.”
“왜? 그거 알아보라고 날 부른 거 아니었소?”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천효락에게 말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물론 이해합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야지. 솔직함을 원하는 것 같아 나도 솔직하게 말했소. 봉공분들도 괜히 머리 아프게 빙빙 돌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아무리 이전과 달라졌다 해도 당관은 당관이었다. 솔직함과 무례를 넘나드는 그의 발언에 승현진인이 헛기침을 했다.
“당가주.”
“거참.”
당관이 입맛을 다시며 팔짱을 꼈다. 천효락이 별로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자꾸만 이해를 바라서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천효락이 빙긋 웃었다.
“이해합니다. 기분과는 별개로요.”
당관이 요놈 봐라? 하는 눈으로 천효락을 보았다.
천효락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함을 바라시는 것 같아서…….”
당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차라리 재수 없는 게 낫지. 그래, 앞으로도 그러시게.”
“알겠습니다.”
공공대사가 손을 들었다.
“그만들 하십시다.”
“크흠.”
“자, 천 공자. 시간은 넉넉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소.”
천효락이 고개를 숙였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신마림의 분께서 무림맹엔 어인 일로 오셨소?”
천효락이 허리를 폈다.
잘생긴 걸 넘어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화사한 미안(美顔)이다. 그러나 자세를 바로잡으니 상당한 엄격함이 드러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신마림은 백도 무림맹과 정식으로 수교(修交)를 맺고 싶습니다.”
“……!”
수교.
즉, 신마림과 무림맹이 외교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이었다.
꽤 충격적인 발언이었지만, 제갈문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 그런가.’
이런 시기에 신마림이라는 곳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진 않을 것이다. 다만, 신마림의 반역자가 백도 무림 측으로 도망쳤거나 달리 원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사람 하나만 달랑 보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천효락은 무척이나 절제된 자세를 보여 주고 있으니, 외교의 중요성을 안다면 꽤 적절한 인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습니까.”
담담한 제갈문호의 대답에 천효락이 미소를 지었다.
“예상하고 계셨군요.”
“예상은 했습니다. 다만 알고 싶은 것은, 신마림이 무엇이 아쉬워서 본맹과 수교를 맺으려 하느냐지요.”
신마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그들이 오랜 세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잘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을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신마림에서 전쟁 발발의 위험이 다분한 이 시국에 무림맹과 수교를 맺으러 사람을 보냈다?
내막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편 천효락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천효락의 입이 열렸다.
“수교를 원하지만, 그것은 본림의 사정이 나아진 연후의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음? 무슨 말이오?”
“본림은 현재 꽤 어지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다른 문파나 조직 등에서도 겪고 있는 권력 문제지요.”
“…….”
“그 문제가 해결된 연후에 수교를 맺고 싶습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은 알겠소만…… 그렇다면 내부 문제를 해결한 연후에 찾아오셨으면 되었을 걸, 어찌 혼란을 벗겨 내기도 전에 예까지 오신 것이오?”
“미리 왔습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미리?”
“그렇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봉공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장인릉이 물었다.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천효락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신마림주(神魔林主), 제 스승님을 구해 주시고 더는 건드리기 힘들어진 반역자 무리를 소탕하는 데에 도움을 주십사 청하고자 예까지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