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화. 태풍의 핵 (7)
“보이느냐.”
남궁표의 목소리는 은근한 패배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것이 바로 당대 패왕으로 불리는 연호정의 무공이다.”
“…….”
남궁현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처음 후기지수끼리 만났을 때도 그는 연호정이 싫었다. 애초에 좋게 얽힐 수가 없는 인연이었다.
흠모하는 여인과 그렇게나 얽힌 것도 모자라 천재라 불리는 형조차 뛰어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연호정은 어떠한가?
“네가 폐관에 든 사이 세상이 변했다. 나도 바뀐 세상을 보며 많은 심란함을 느꼈지. 하지만…….”
“…….”
“저자, 무림 최연소로 성천에 이름을 올린 괴물만큼 날 놀라게 한 사람은 없었다.”
으드득.
이를 가는 남궁현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다시 제갈아연을 만나도 예전만큼 흔들리진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달랐다. 인생 최초로 패배감을 안겨 준 저 빌어먹을 놈은, 잡히기는커녕 보이지도 않는 하늘로 날아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존재하는 한, 다음 세대의 무림은 연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두어선 안 되지요.”
“그래, 안 되지. 하지만…… 누가 저 괴물을 상대할 것이냐?”
남궁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남궁표가 탄식했다.
“어찌하여 하늘은 저런 말 같지도 않은 괴물을 세상에 내보냈단 말이냐.”
남궁 형제들만큼이나 놀라고, 남궁 형제들 이상으로 절망한 사람은 바로 그들의 아비인 남궁인이었다.
‘말도 안 돼.’
남궁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설마 아버지께서 힘을 비축하고 계신 것인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처음 병장기술로 서로의 실력을 가늠한 직후, 아버지는 곧장 창궁대연신공을 꺼내 들었다.
그것도 적당히 개방한 게 아니라 완전하게 개방한 수준이었다. 이룬 경지가 이러하여 아버지가 지닌 힘의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한 번씩 보이는 심각한 표정이 아버지의 진심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 연호정이 무극에 올랐다고 했을 때, 당연하지만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건을 거쳐 그가 진정 무극에 올랐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때 남궁인은 연호정이 아닌 연위에게 깊은 패배감을 느꼈다.
더 경악스러운 일은 연호정이 비왕을 죽이고 새로운 사왕(四王)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정말 그것만큼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가 싫었다. 세상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또한 사실이라는 게 입증되었다.
삼제의 일인, 검으로는 명실공히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아버지와 박빙의 승부를 겨루는 연호정의 무공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칠고 심오하였다.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남궁세가의 부자들만큼이나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는 놀라는 와중에 감탄했고, 누구는 놀라는 와중에 좌절했다. 누구는 한없이 놀라기만 하였으며, 또 누구는 정신없이 두 사람의 깨달음을 탐닉하기 바빴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의, 무수히 많은 시선으로 얼룩진 거대한 연무장에서.
두 괴수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퍼퍼퍼퍼펑! 퍼어엉!
비로소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꺼내 들고 본격적인 결투에 임하는 두 사람이었다.
남궁승의 창궁무애검법은 무겁고 장중했다. 기본적으로 검법 자체가 그러했다.
하지만 검이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기술과 깨달음을 녹여 낸 창궁무애검법은 강검(强劍)과 유검(柔劍), 쾌검(快劍)과 둔검(鈍劍), 중검(重劍)과 경검(輕劍), 환검(幻劍)과 무변검(無變劍)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연호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공격에 백호, 방어에 현무, 즉살에 주작, 회피 반격에 청룡을 골고루 섞어 내어 순간순간에 어울리는 무공을 구현하는 그는 가히 투신(鬪神)의 재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희대의 검사와 불세출의 투사가 부딪치니, 두 사람의 움직임은 점차 역동적으로 변하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를 연출해 냈다.
번쩍!
천풍보와 천뢰보를 섞어 가며 변칙적으로 접근한 남궁승이 창궁무애의 칠천향검(七天饗劍)을 펼쳤다.
일곱 가닥의 거대한 검이 춤을 추며 수십 가닥의 검기를 뿜어냈다. 하늘을 덮는 검기의 향연은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연호정의 양손이 광룡부를 쥐었다.
위이이이이잉!!
팔십 근이 넘는 중병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기 다발을 빨아들였다.
남궁승의 잡티 하나 없는 하늘색 진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녹청빛 기류로 가득한 연호정의 진기. 청룡기를 기반으로 한 용군삼형(龍群三形)이 발현된 것이다.
‘또!’
오룡비관의 힘을 무마시켰던 그 수법이었다.
남궁승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굳이 회피할 것도 없다는 듯, 칠천향검의 검기를 모조리 수거한 연호정이 한 마리 청룡이 되어 남궁승에게 짓쳐 들어갔다.
나아가는 발걸음은 청룡답운보(靑龍踏雲步)요, 칠천향검의 힘까지 담아 휘두르는 도끼에는 용군삼형의 마지막 초식, 용왕회천포(龍王廻天咆)의 발경술이 담겨 있었다.
‘물러서지 않겠다.’
남궁승의 검이 교묘하게 움직이며 광룡부의 도끼날을 막아 냈다.
콰아아앙!
그간의 싸움 중 가장 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용왕회천포는 극에 이른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으로 나의 힘과 적의 힘을 함께 담아 쏘아 내는 무적의 반격술이었다.
놀랍게도 남궁승은 벼락같은 일검으로 그 거대한 힘을 소멸시켰다. 푸른 벼락을 담은 검, 순간적으로 사위를 짓누르는 압력을 자아내는 그 검력은 창궁무애검이 아니었다.
파바바바박!
무자비한 반탄력에 연호정이 이십여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압박을 무시하고 백호군림보로 달려들려 했지만, 광룡부를 쥔 손아귀로 전해지는 충격파가 상상을 초월했다. 청룡답운보와 괴주부동(怪柱不動)의 힘이 아니었다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것이다.
치이이이익!
허연 연기를 피워 올리는 연호정 앞으로.
바닥에 내려선 남궁승의 몸에, 더 이상 하늘색 진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창궁대연신공이 끝이 아니었군.’
들은 적이 있었다.
창궁무애검과 창궁대연신공은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일절의 절공들이다. 그러나 천하제일검의 깨달음은 지고하여, 가문의 무공을 재정립해 극한에 이른 또 하나의 검도(劍道)를 창안했다고 하였다.
“대단해.”
한층 험해진 모습.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상한 옷자락은 남궁승과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차갑고도 매서운 얼굴에 드리워진 한 줄기 미소에는 진심 어린 감탄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싸움에 이골이 났군. 단순히 병장기만 주고받는 싸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기를 이용해 상대를 속이거나 빈틈을 만들어 내는 능력도 발군일세.”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대단한 재능이지만, 이것은 재능보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지도다.”
순간 연호정이 움찔했다.
남궁승의 미소가 짙어졌다.
“뭐가 되었든 자네가 차세대 무림의 주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즐거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흥이 오를 줄은 몰랐어.”
파삭!
남궁승이 선 땅 주변의 돌멩이들이 하나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기도. 창궁대연신공보다 훨씬 더 묵직한 무형의 기운이 가닥가닥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림에 주인 따위는 없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게. 나 또한 남들의 시선 따위, 더는 신경 쓰지 않겠네.”
지금까지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호정은 남궁승이 뱉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꺼내는가.’
가문의 진짜 비기.
앞으로 남궁세가의 명성을 두 단계는 더 끌어올려 줄 무적의 검법을 세인들 앞에서 꺼내 들 작심을 한 것이다.
구결이나 진기 운용을 모른다면 그 무공의 진체(眞體)를 손에 넣을 수 없는 법. 그래서 고급의 무공일수록 동작은 간결해지고, 기공의 운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섬세해진다.
보는 것만으로는 훔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비기를 꺼내 드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남궁승은 그 부담을 잊기로 한 것이다.
“자네에게는 그 이상의 무공이 있나?”
“다른 무공은 있지만…… 그 이상의 무공은 없습니다.”
아직은.
그때 연호정의 머리를 스친 것은 황금빛으로 물든 지고한 깨달음 한 조각이었다.
남궁승의 눈이 깊어졌다.
“아쉬운지고.”
그가 한 발을 내디뎠다.
우르르릉!
박살 난 연무장 바닥을 가볍게 디딘 것뿐인데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진동했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사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사신기를 몽땅 끄집어낸 것이다.
“그럼.”
남궁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의 깨달음을 보여 주겠네.”
그때였다.
촤르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풀려 나온 교룡쇄가 남궁승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지금껏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교룡쇄였다. 천하의 남궁승도 몸에 걸친 철쇄를 이렇게 쏘아 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단한 녀석이야.’
검을 펼치기 위해 미세한 호흡 조절을 하는 그 순간.
자기 자신조차도 생각지 못한 그 빈틈을 노리고 공격을 가한다. 아예 무공 구현 자체를 못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검심(劍心)은 무심(無心).
남궁승이 왼손을 뻗었다.
파아아악! 퍽!
교룡쇄에 묶인 팔에서 피가 튀었다. 교룡쇄에 둘러친 발경을 다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남궁승의 검에는 무공을 구사하기 위한 기운이 팔 할 이상 집결하였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훅! 쾅!
교룡쇄를 끌어당겨 남궁승의 자세를 무너트리고, 동시에 쾌속하기 그지없는 불꽃의 지풍을 쏘아 냈다. 홍염육살공의 홍련일섬(紅蓮一閃)이었다.
퍽!
뚫리지 않는다.
교룡쇄를 따라 날아오는 남궁승의 몸 전체에 무형의 방벽이 둘러쳐졌다.
검법이며 신공이다. 따로지만 하나이기도 하다. 이 정도 힘으로는 남궁승의 무공을 방해할 수도, 맞부딪쳐 튕겨 낼 수도 없다.
‘빌어먹을!’
알아도 막을 수 없는 무공. 사음교주와의 대결 이후, 이 정도의 막무가내 무공은 처음 보았다.
후우욱!
팽팽해진 교룡쇄.
하늘로 향한 남궁승의 검이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득!
연무장 바닥 전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이 다 휘둘러지지도 않았는데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공기는 검날처럼 따가웠고, 몸은 점점 오그라지는 기분이었다.
‘상단전!’
상단전의 힘을 가미한 검제의 절대무공.
남궁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왕검형(帝王劍形)이다.”
번쩍!
느릿했던 검속이 일순간 빨라지며 무지막지한 힘이 연호정을 짓눌렀다.
바로 그때.
‘그냥 당해 주진 않아.’
무게가 없는 불꽃의 힘을 한계까지 담아낸 연호정이 검보다 빠른 일격을 가했다.
부아아아앙! 화르르르륵!!
압력을 헤치고 나아간 시뻘건 광룡부가 점점 새하얀 불꽃으로 물들었다. 그 열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연무장 너머에 서 있던 무인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남궁승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연호정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두 사람 주위로 새하얀 불꽃이 돌풍을 일으키며 지옥과도 같은 광경을 만들었다.
이 몸으로 돌아와 사신공을 연성한 이래, 단 한 번도 펼쳐 본 적 없던 홍염육살공의 마지막 초식이자 최악의 무공.
‘초열(焦熱)!!’
초열의 힘을 담은 도끼날과 제왕검형의 압력을 담은 검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쿠르르릉!!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연무장.
빛의 폭풍으로 둘러싸인 괴수들의 격전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