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8화. 태풍의 핵 (5)
느닷없이 들이닥친 절대자의 기운은 천효락도 느끼고 있었다.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나야말로 천하제일이라는 듯, 기파를 아낌없이 발산하며 들이닥쳤다. 그 기파는 외성을 넘어 내성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온 천효락과 화향의 눈에 한 명의 노인이 보였다.
“……!!”
천효락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큰 키의 노인이었다. 뽑아 든 검은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철검(鐵劍)이었지만, 노인의 형용할 수 없는 날카로운 기도가 평범한 검을 불세출의 신검(神劍)으로 벼려 놓았다.
‘저 정도 검기(劍氣)의 소유자라면……?’
일말의 선기(仙氣)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막강하고 예리한, 일말의 휘어짐도 없는 꼿꼿한 검기가 하늘까지 닿은 사람이었다.
‘검제 남궁승!!’
천효락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남궁승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 정도로 강했고, 그 정도로 특색 있는 기도였다.
더하여 무림맹 소속이라면 남궁승이 입고 있는 푸른 장삼에 새겨진 창천(蒼天)이라는 글자가 뜻하는 바를 모를 수가 없었다.
“남궁세가!”
“검제 어르신이다!”
“세, 세상에!”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삽시간에 커졌다.
성천에 이른 고수의 기파는 사위를 압도한다. 그들 정도의 수준으로는 입을 열기는커녕 강렬한 기파에 숨도 못 쉬어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남궁승의 기도가 철저하게 연호정만을 향해 있다는 것.
달리 말하면, 거의 모든 기운을 연호정에게 집중시키고 남은 편린에 불과한 기파만으로도 이곳에 모인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엄청나구나.’
성천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다.
흑암제 시절 그의 경지도 무척이나 고강했다.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으니, 어쩌면 신선제왕 중 삼제(三帝)보다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이미 성천 중 태반이 실종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성천에 이름을 올린 고수를 만난 건 양천 하나뿐이었다.
절대적인 무력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음교 하나만으로 중원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
‘이런 사람이 있나?!’
연호정의 얼굴에 감탄 이상의 감동이 비쳐 들었다.
음제 하은교는 혼란에 젖어 제대로 된 기량을 엿볼 수가 없었다. 검선 탁무자는 무인보다 도인에 가까운 이였고, 원체 독특한 장소에서 만난 터라 한계를 알기 어려웠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삼제(三帝)의 무력을 보게 된 연호정.
‘투왕과 차이가 없다. 아니, 깨달음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물론 싸움은 붙어 봐야 아는 것이다. 게다가 남궁승과 양천은 원체 성격이 다른 무공을 익혔기에 누가 분명한 우위인지를 가늠키 어려웠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만약 양천이 연호정과 얽히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지금의 실력을 쌓지 못했다면 확실하게 남궁승보다 뒤처졌을 것이다.
‘어떠한 불순물 하나 없이 순수하게 제련한 검 그 자체.’
경지가 아닌 사람 그 자체에 대한 놀라움.
그 놀라움은, 점점 호승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정도의 감정이었다.
“말하자면…….”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싸우자는 것입니까?”
남궁승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고상한 말로 포장할 필요가 없는 상대로구나. 그렇다. 나는 싸움을 원한다.”
담백함과 과격함을 넘나드는 어조였다.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라면 체면을 차릴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선배님.’
하은교는 말했다. 무극을 돌파한 이들의 정신은 하나같이 불안정하다고.
쉽게 말하면 정상이 아니다. 정상일 수가 없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경지에 올라 인지해선 안 될 것들을 인지한 이들의 정신이 어찌 정상일 수 있겠는가.
그 경지에 오르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신의 방벽을 쌓은 이는 결코 많지 않은 법.
다만 깨달음이 높기에 미치지 않을 뿐이다. 온전한 스스로를 다잡지 못하면, 남들이 보기에 괴인(怪人)이라 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도 순간이었다.
경지가 높을수록,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수록 그러한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 아마 남궁승 역시 그러한 경계에 서 있을 것이다.
물끄러미 남궁승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선배님과의 싸움이라면 저 역시 대환영입니다.”
남궁승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미소지만, 그 안에 담긴 희열은 엄청난 것이었다.
“실로 마음에 드는 후배로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연호정이 엄지로 내성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가다 보면 외성에 연무장이 있습니다. 무림맹에서 가장 큰 연무장이지요. 그곳에서 붙었으면 합니다.”
“장소는 상관없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와 선배님의 무공을 만천하에 공개했으면 합니다.”
남궁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싸우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무인과 무인의 대결일 뿐이다. 구경꾼들의 눈요기가 되는 건 사양이야.”
“눈요기 이전에 가르침입니다.”
“가르침?”
“노선배님의 무공은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셨으니 이번 비무를 통해 맹원들에게 깨달음을 전파해 주십시오. 지난날의 과오를 일부나마 씻어 내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남궁승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과오?”
“그렇습니다.”
“지금 이 나에게 하는 말이 맞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우우우웅.
철검이 희미하게 떨렸다. 거무튀튀한 검날이 자아내는 진동에 중원 검제(劍帝)의 분노가 실려 있었다.
“……마땅한 이유 없이 뱉은 말이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시린 늦겨울 날씨를 무더운 한여름으로 바꿔 버릴 정도로 생생한 분노였다.
그 순수하기 그지없는 분노는 대장장이들이 일평생 추구하는 순백의 고열과 같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검제의 생생한 분노 앞에서도 억지스럽지 않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만큼 그도 성장한 것이다.
“사정을 설명하자면 깁니다. 노선배님께 중요한 것이 싸움이라면, 그 사정은 싸움 이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남궁승은 생각했다. 여러모로 놀라운 녀석인 건 분명하다고.
천하의 검제 앞에서 부탁도 아니고 거래를 하려 드는 놈은 처음 보았다.
‘하긴, 오만할 자격이 있지.’
연배를 초월한 경지, 그리고 재능.
인간이 지닌 모든 상식을 파괴하고 궁극에 영역에 몸을 담았다. 사실상 이보다 더 예의가 없다 한들 이해해 줄 만한 무력이었다.
물론 이해와 용서는 다른 문제지만.
“좋다. 그래야만 너의 무력을 볼 수 있다면 구경꾼들 정도야 상관없지.”
“역시 담백하십니다.”
“대신 충고 하나 하마.”
“말씀하십시오.”
“다스렸다고 생각했던 호승심이 한껏 불타오르는 중이다. 날 만족시킬 만한 무(武)가 아니라면, 아까운 인재라도 용서는 없을 터. 이 싸움에 그 목을 걸어야 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발언이었다.
중원 제일의 검가, 희대의 명문가인 남궁세가 전대 가주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아니었다.
남궁승이 본 연호정은 상식을 벗어난 인재이지만, 가만 보면 남궁승 역시 상식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연호정의 미소가 차갑게 변했다.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뭐라고?!”
봉공과 장로들은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제 어르신이라니?”
모두의 시선이 남궁인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놀란 건 남궁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올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벌써 도착하실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비, 비무?”
“그렇습니다. 현재 외성 제이(第二) 연무장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공공대사가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오. 우리도 어서 가 봅시다.”
“그럽시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아무래도 연위와 남궁인일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을 나서던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연위의 걱정 어린 눈빛, 남궁인의 경직된 눈빛은 왠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 * *
연무장 주변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빠르게 퍼졌고, 덕분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연무장 주변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건물 지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허!”
심상치 않은 기세에 누구보다 빨리 달려왔던 막원은 한참 떨어진 남궁승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설마하니 검제 선배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젠가 한 번 만나 뵐 수 있기를 고대하기야 했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장포를 벗고 흑백쌍룡부까지 내려놓은 연호정이 옷 위로 교룡쇄를 드러내 묶고 있었다.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아우님은 참으로 사고를 잘 치는구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게 왜 사고입니까? 친선 비무인데.”
“자네는 그럴지 몰라도 검제 선배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한데?”
이미 연무장 위로 올라온 남궁승은 보란 듯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검을 올려 두고 눈을 반개했는데, 이 많은 사람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연 공자.”
다가온 묵비의 얼굴에도 걱정이 깃들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비무지.”
“굳이 사람들 다 보는 연무장에서 비무를 벌이는 거, 연 공자가 주도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냐?”
“그럼 검제씩이나 되시는 분이 사람 불러다 놓고 싸우자 하셨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호정은 그저 웃어 버렸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진양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았소.”
“뭐가?”
“당신이랑 같이 다니면 심심할 일 없을 거라던.”
“이제 알았냐?”
“왠지 당신이 벌인 판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내 앞날이 그려지는데, 이거 착각인 거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 비무나 잘 봐 둬.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무극수(無極手)들의 대결이다. 많은 공부가 될 거야.”
“……설마 그게 목적이었소?”
강량이 말했다.
“평소라면 한마디 하겠는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뭐라 말도 못 하겠습니다.”
“너도 많이 배워라. 나 말고, 노선배를 잘 봐 둬.”
“물론입니다.”
“무림의 칠 할 이상이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닌다. 그중 검객이 태반이야. 너는 물론 이곳에 모인 무수히 많은 검객들에게 멋진 배움이 될 거다.”
“배움이 되는 건 좋은데, 썰리지나 마십시오. 딱 봐도 노선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알았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모용우가 보였다. 눈이 마주친 모용우가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한 번 웃어 준 연호정이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경직된 표정의 연지평이 있었다. 언제 오셨는지, 연지평 옆으로 아버지도 계셨다.
연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연호정이 연지평에게 전음을 보냈다.
순간 움찔했던 연지평이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보였다. 특히 봉공과 장로들의 표정이 압권이었는데, 말리고는 싶지만 차마 말릴 수 없고, 고수들의 격전을 보고는 싶지만 그만큼 여러 걱정을 떠안은 얼굴들이었다.
‘따로 사과를 드려야겠군.’
그 외에 천효락과 화향도 보였다.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남궁표도 보였고, 숨을 헐떡이는 남궁현도 보였다.
‘정말 많이들 모였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연호정이 광룡부를 쥐고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그때.
번쩍!
눈을 뜬 남궁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는 되었는가.”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우우우우우웅!
광명신단의 제어력을 완전히 풀어낸 그가 자세를 잡았다.
“어쭙잖은 통성명은 생략하시지요.”
남궁승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스르르릉.
철검이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