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45화 (845/963)

845화. 태풍의 핵 (2)

“공기 좋군.”

목소리가 묘했다. 나이 든 사람 특유의 탁성이지만 서릿발을 연상케 하는 차가움이 그득했다.

그 차디찬 음성에 감탄이 실리니 참으로 시원하게 들렸다. 무뚝뚝할 것만 같은 목소리라 드러내는 감탄이 더 진정성 있게 들리기도 했다.

“황산(黃山)의 아름다움이야 천하제일이지만, 겨울철 대별산의 경치도 나쁘지 않구나. 이 청량한 공기하며, 제법 명당에 자리를 잡았구먼.”

눈 쌓인 높은 봉우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노인의 모습은 실로 범상치 않았다.

하얀 무복에 푸른 장삼을 걸친 모습. 초봄이 코앞이라지만 아직은 털옷이 필요한 날씨임에도 추위 따위는 조금도 타지 않는 듯했다.

딱히 치장을 한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고아한 느낌을 준다. 잘 넘긴 머리와 정돈된 차림새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고급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한 덕이었다.

“어떠냐? 네 눈에는?”

“좋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잘생긴 청년이었다.

노인보다 조금 더 큰 키. 존재감이라고 한다면야 노인에 비할 수 없지만, 청년이 뿜어내는 헌앙한 분위기는 그를 범상치 않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노인이 청년의 코를 바라보았다.

추운 날씨, 호흡에 따라 허연 김이 뿜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청년의 콧김은 보이지 않았다.

범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노인의 눈에는 보인다. 인간을 초월한 희대의 강자의 눈에 비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청년의 콧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호흡이 길고 가느다랗다는 뜻이었다.

대별산은 낮지 않다. 게다가 노인의 속도에 맞춰 따라오느라 버겁기도 했을 것이다. 한데도 호흡이 굉장히 안정적이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차 속도를 올려 보았거늘, 이제야 좀 봐 줄 만하구나.”

그간의 지옥 같았던 수련을 생각하면 봐 줄 만하다는 말로 끝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청년은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조부의 성격이 그러함을 알거니와, 실제로 자신 역시 이제야 기반을 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반을 쌓는 것도 힘들지만, 아직 제대로 날아올라 보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날갯짓 한번 못 해 본 새는 아직 새가 아니다.

청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조금은 흡족한 빛이 어렸다.

청년의 성취보다, 진심으로 멀었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더 흡족하다.

“사람은 언제나 부족하다. 중요한 건 부족한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지. 이제야 비로소 창천(蒼天)으로 날아오를 자격을 갖추었다.”

“조부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본디 너의 재능은 네 형과 비교해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네 형은 언제나 자신의 재능을 돌아볼 줄 알았지. 가끔 자신감이 과하여 실수할 때도 있지만, 부족한 것이 생기면 그것을 인정할 줄 알았다.”

“예.”

“무골(武骨)로 치면 너보다 네 형이 낫다. 하지만 신중함으로 치자면 네가 형보다 낫다. 그래서 너희의 재능은 동급이다.”

“과찬이십니다.”

“무인에게 정치와 처세술은 언제나 두 번째다. 뛰어난 머리도 막강한 무(武) 앞에선 무너지기 마련이야. 네가 천하제일검가(天下第一劍家)의 핏줄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노인이 저 멀리 무림맹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무림맹의 외관은 검(劍) 이외에는 어떤 가치도 무용하다 생각했던 노인조차 설레게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묘하도다.”

노인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떠올랐다.

“성천의 노괴들 말고는 손속을 나눌 자가 없다고 생각했거늘, 이 늙은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반선(半仙)의 기(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구먼.”

“예?”

“심지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역시 세상은 넓구나. 하나는 서늘하고, 하나는 매섭도다.”

“…….”

노인이 턱으로 무림맹을 가리켰다.

“반나절 안에 도착도록 할 것이다. 잘 따라오거라.”

“예.”

훅!

두 노소가 봉우리에서 사라졌다.

* * *

“……?”

잠시 움찔한 연호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천효락의 물음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신경이 쓰이게 하는 게 있어서.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한잔하시지요.”

“예.”

두 사람이 뜨끈한 차로 속을 달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천효락이었다.

“경이적이로군요.”

“……?”

“솔직히, 소부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패왕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그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패왕…… 정말 웃기지도 않은 별호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직접 뵈니, 왜 세인들이 소부주님을 패왕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보고 그리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제게는 과한 칭찬입니다.”

“과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천효락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군요. 오히려 저를 압박하는 기운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세간의 소문도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연호정의 웃음이 짙어졌다.

“마도 무림은 그 어떤 곳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냉혹함으로 가득하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저희도 사람입니다. 다르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다르진 않을 겁니다.”

“천 공자께서 그리도 살벌한 곳에서 살아남으실 수 있었던 비결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화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면 천효락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제 말재주가 제법이지요?”

“어떤 재주든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법입니다. 저도 무력의 부재를 실감했을 적엔 눈치와 혓바닥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썼더랬지요.”

“하하하!”

천효락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성천의 일좌, 패왕이라 불리는 절대고수께 어울리는 광경은 아니었겠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도끼보다 혓바닥 덕을 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정말 긴장해야겠습니다.”

“뭐 긴장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저는 묵룡부 소속입니다. 무림맹 행사에 끼어들 순 없지요.”

“하면, 지금 이 자리에 오신 것은 개인의 의사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연호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는 사람이 몇 명인데요. 상부의 부탁을 받았지요.”

천효락이 의외라는 듯 묘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그걸 인정하시는 겁니까?”

“인정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어렵다.

천효락은 생각했다. 이 남자는 참으로 어려운 사람이라고.

무인임을 따지기 전에, 지파를 따지기 전에 사람 자체에 빈틈이 없다.

‘……이거 위험하군.’

묵룡부 사람이니 무림맹 행사에 간섭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무림맹 윗선의 부탁으로 찾아왔음을 솔직하게 시인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

무림맹이 할 수 없는 일을, 연호정은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닌 말로 여기서 싸움이 터져서 자신이 죽어도, 그건 묵룡부의 소부주가 행한 일이지 무림맹의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효락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여기서 솔직하게 나가지 않으면 사달이 난다.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는 순간, 천효락에게서도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 진의(眞意)를 알아내 달란 부탁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연호정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고, 주는 맹의 수뇌부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얻기 위함이지요.”

천효락은 상당히 놀랐다.

“그런 것까지 말씀하셔도 괜찮습니까?”

“설마 모르셨습니까?”

“…….”

“다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짐작은 했습니다.”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겠지요. 서로 속내를 숨기고 얘기하는 거, 싫어하지는 않지만 굳이 그럴 만한 자리도 아니잖습니까?”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화에 임하라.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천효락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제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상식적인 것들이지요.”

“상식 말씀이십니까?”

“그간 활동하지 않던 마도 무림의 높으신 분께서 어찌 이 시국에 무림맹으로 찾아오셨는지, 신마림의 의도는 무엇인지 등 여러 가지가 궁금합니다.”

“역시 그렇군요.”

“결국은 천 공자께서 맹에 방문하신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맹의 수뇌부들께 말씀드리면 되겠지요.”

“물론 그러셔야 할 겁니다. 왜 오셨는지, 누가 이런 결정을 한 건지, 그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는지, 이득을 본다면 왜 이득을 보는 건지도 전부 말씀하시면 좋겠지요.”

천효락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 또한 수뇌부분들과 만나 얘기하겠습니다.”

화향은 내심 긴장했다.

그녀는 이 짧은 대화가 가진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 속에 드리워진 묘한 긴장감은 느낄 수 있었다.

나아가, 지금 주인님께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이 자리를 냉랭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놀랍게도 연호정의 반응은 화향의 생각과 달랐다.

“솔직하시군요. 좋습니다.”

연호정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드리워졌다.

화향은 천효락의 반응에 긴장했지만, 연호정은 오히려 그의 대답에 만족하는 듯했다.

“손잡고 나아갈 동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괜스레 상대를 떠보기만 했다면,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

“필요할 때 목숨 걸고 솔직함을 드러낼 수 있는 그 배포, 저는 좋아합니다. 진심으로요.”

천효락의 눈이 미미하게 떨렸다.

“동지라니요?”

“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저는 백도니, 흑도니, 마도니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해가 동도라는데, 마도 무림이라고 함께 손잡지 못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천효락은 왜 당신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진심인가?’

웃는 얼굴, 흔들림 없는 눈빛, 정갈한 어조와 목소리.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천효락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리 생각해 주시니,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좋게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진심이니까요.”

“정말 그리 생각하신다면…… 감동이로군요. 마도 무림의 일원으로서요.”

연호정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대신 이것만큼은 지금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관, 당씨 문중의 가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

“이 질문엔 꼭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천효락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 대답에, 저희의 생사가 걸렸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도 해 볼 것을.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섬서라…… 화산과 종남이 똬리를 틀고 있지만, 북부의 많은 사람이 오가는 지역이지요. 그 옆에는 감숙성이 있고, 옥문관을 통해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중원에 계셨다면 개방이 몰랐을 리 없고, 설령 개방이 몰랐다 해도 흑도의 정보단까지 모르긴 어려웠을 것이고…….”

“……!”

연호정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짐작대로군. 신마림은 중원이 아니라 새외, 그것도 청해 인근에 자리 잡고 있을 확률이 높겠어.”

천효락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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