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화. 갈등의 씨앗 (8)
“살이 좀 빠졌구나.”
오랜만에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대사였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어 하는 아들의 첫 대사는 그러했다.
“죄송해야지.”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놈아, 사전에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더냐? 물론 네 녀석의 흑도 전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저질러 버릴 줄은 몰랐다.”
“…….”
“거기서 홀대를 받진 않느냐?”
“예, 잘해 줍니다.”
“하기야 양 부주께서 눈이 있다면 너처럼 막 나가는 녀석을 홀대할 리는 없겠지. 속 시끄럽지 않으려거든 잘 대해 줘야지.”
“…….”
“많이 바빴던 모양이다. 그럴수록 밥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어겨선 안 된다. 제아무리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 한들 사람은 사람이야. 건강은 젊을 때 챙겨야 하는 법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혼을 내겠다고 했지만, 연위는 연호정에게 어떠한 질책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질책을 하겠는가. 연호정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연가의 위상이 다소 실추되었지만, 평생을 가세(家勢)에 신경 써 본 적이 없던 그였다.
오히려 연호정의 그러한 판단은 천하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연호정이 묵룡부의 후계자가 된 이후, 묵룡부의 도발이나 기습 공격을 걱정하는 여론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모든 것이 아들의 공이었다.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은 섭섭했으나, 대업을 하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것이다.
연위가 연호정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 위치가 위치인 만큼 맹 내에서도 자주 보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차라도 한잔하거라.”
“물론 그래야지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다소 긴장감 있던 분위기가 편하게 풀어졌다.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형님.”
“오랜만에 보는구나.”
동생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어렸다.
“많이 컸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형님이 그간 너무 무심하셨지요.”
“그래, 미안하다.”
“저는 아버지와 달리 어떠한 직책도 없습니다. 또 언제 휙 떠나 버리실지 모르니, 맹에 계시는 동안만큼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괴롭힐 겁니다.”
“하하.”
웃음을 터트린 연호정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나저나, 네 무공은 어떻게 되어 먹은 거냐?”
“예?”
“나는 사실 네가 지금쯤 무종을 돌파했을 줄 알았다.”
연지평이 무안한 듯 웃었다.
“저에게는 형님만큼의 재능이 없어서요.”
“웃기는 소리. 재능만 치면 당대 천하에 너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몇 없다.”
“제가 많이 부족한 탓입니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연호정이 연위를 보며 물었다.
“이 녀석, 완전히 아버지와 판박이인데요?”
“네가 보기에도 그러하냐?”
“예.”
연호정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룬 경지는 얼추 무종의 앞에 다다른 수준인데, 전신에서 어우러지는 검기(劍氣)는 거의 패율 선배나 모용 형님에 육박합니다.”
검(劍)에 대한 이해도가 동년배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연지평이 무종을 뚫었다면, 짐작은 했어도 새삼 놀랐을 것이다. 그 천재적인 감각을 잘 개화(開花)시켰다며 칭찬부터 쏟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연지평은 더 빨리 달리는 대신, 스스로를 더 꾸미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고고하기 그지없는 막강한 검도(劍道)로 돌아왔다.
크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정말이지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품에 안았으니, 무종을 뚫기만 하면 정말 볼만해지겠다.”
연지평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오랜만에 본 형이라 약간의 어색함도 있었다. 하지만 강호 최고수가 된 형이 자신의 성장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쑥스럽기도 하고,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그간의 노력이 헛것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더더욱 발전해야겠다는 의지가 일었다.
“그나저나.”
연호정이 창밖을 힐끔거렸다.
“감시자입니까?”
“화룡단이다. 너의 멋진 선택 덕분에 감시 명목으로 무사들이 붙었지.”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말이 감시지, 이런저런 일도 처리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제갈 군사께서 일부러 붙여 준 터라 도리어 미안할 지경이다.”
“군사님 덕을 자주 보는군요.”
단번에 제갈문호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연호정이었다. 아마 그가 감시자를 붙인 것은, 연가를 향한 무분별한 악성 여론을 잠재우려는 조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연위는 가장 큰 사건부터 말해 주었다.
“모용가주에 대한 얘기는 들었느냐?”
“아직 못 들었습니다만…… 생각해 보니 아직 모용가주 얼굴을 못 봤군요. 폐관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으음, 모용 대수도 별말이 없었나 보군.”
“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연위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짧게 설명했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람이 정말 그랬습니까?”
“그래.”
“…….”
연호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변한다.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모용군이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단 하나의 욕망, 무림맹주가 되겠다는 그 욕망을 평생 가져갈 거라고 연호정은 생각했다.
한데 모든 것을 털고 강서로 향했다니?
“모종의 조직이 그곳으로 모여든다는 정보는 받았습니다. 저도 오늘 군사님을 뵙고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는데, 무림맹도 이미 알고 있었군요.”
“정확히는 후개가 날카롭게 포착한 것이지. 설마하니 그 집단이 모용가주와 연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강서 연합이라…….”
짐작했던 대로 중소 문파들의 연합이 맞았다.
하지만 그 조직이 모용군의 정치 자금 및 지지자들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역시 무섭구만.’
연합을 만들지 않았다면 끝까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치밀한 인선 관리였다.
‘치밀한 것도 치밀한 거지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연호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당신, 정말 바뀐 건가?’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괴로웠던 자신과의 시간.
고작 몇 달의 폐관이었지만, 온전한 스스로와 마주한 모용군의 변화는 수십 년 폐관보다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들군.’
모용군의 욕망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의 목표 지향적인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알기에,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그를 신뢰하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약한 소리나 하는 사람은 아니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나약함과 과거의 잘못을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모용군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알 수 있다.
‘뭐가 되었든, 예전보다 훨씬 더 무서워졌군.’
진심이 아니라면, 모용군은 그 뻣뻣한 자존심까지 접어 가며 상대를 방심케 할 만큼 무서워진 것이다.
그리고 진심이라면.
정말로 스스로를 바꾼 것이라면, 모용군도 엄청난 성장을 이룰 것이다. 고수는 한 번의 깨달음으로 수십 계단을 뛰어오를 수 있으니까.
그 성장이, 발전이 무섭다.
‘당신이 진정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었다면, 다른 모두가 당신을 손가락질할지언정 나만큼은 쌍수를 들고 환영해 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그 모습이 그저 목표 달성을 위한 계략에 불과했다면…….’
지옥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모용군은 똑똑한 사람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것이다.’
사실 답은 나왔다.
답은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모용군과는 그만큼 많이 대립했던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바뀌었다면…… 무척 괴로웠겠지.’
양천은 자신이 직접 설득해서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모용군은 그 스스로 바뀌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 한다.
연호정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들의 꿈이 아무리 대단해도 내 땅을 지키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거인의 꿈을 직, 간접적으로 무너트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나는 나의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의 미래를 파괴한 것인가.’
공공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행동은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아니, 많은 미안함을 느낀다.
괜스레 착잡해진 연호정을 보며, 연위가 말했다.
“모용가주는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
“인간은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너무 씁쓸해할 필요는 없다.”
귀신처럼 아들의 속내를 읽어 내는 그였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어째 오늘도 술이 당기는군요.”
“오늘은 참거라. 이따 군사와 만나야 하지 않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따가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해야지요.”
“준비?”
“무림맹주 선출 건에 대해 말입니다.”
연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내 너를 누구보다 신뢰하긴 한다만, 맹주 선출 건에 관해서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
“예, 자칫 잘못하다간 내정 간섭이 되니까요.”
“그렇지. 잘 알고 있구나.”
“사적으로 만나 이런저런 대화만 나눌 겁니다. 결국 무림맹주는 모두가 이해할 만한 인사가 선출되어야 할 터이니, 저 하나 나선다고 어쩔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안심하고는 있겠다.”
“예.”
무거운 얘기를 끝낸 연호정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당가주님 따님은 어디 있습니까?”
“폐관에 들었다.”
“폐관이요?”
“그래, 그간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지. 지금 당장 무종을 뛰어넘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렇군요.”
연호정, 묵비, 강량, 진양.
모용우와 당상아, 남궁표 등등.
지난 몇 년 사이 재능 넘치는 이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으로 자신의 경지를 끌어올렸다. 물론 넓은 천하에 한 줌도 안 되는 천재들이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세대의 교차다.
이전 세대에도 그들과 비슷한 연배에 무종을 돌파한 천재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전 세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호정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시대가, 이 무림이라는 세상이 또 한 번의 과도기를 겪고 있음을.
구시대의 고수들은 하나둘 물러나고, 새 시대의 주역들은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때.
이 격동 가득한 시대가 삼교와의 전쟁으로 몽땅 무너져 내리지 않기를, 연호정은 진심으로 바랐다.
“아, 그리고 아버지.”
“그래.”
“제…… 음, 어쨌든 제게도 사매가 생겼잖습니까?”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양 부주의 제자 말이냐?”
“그렇습니다. 입문 시기만 보면 제 사저인데, 제가 좀 특별한 경우다 보니 그 양반이 먼저 사형으로 우대하겠다고 하더군요. 그게 더 그림이 예쁠 거라고.”
“선한 사람이겠구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그이가 왜?”
“오던 길에 따로 일을 맡겼습니다. 조만간 도착할 테니, 숙소는 이곳에 잡아 두었으면 합니다.”
“팔성각이 아니라?”
“예.”
“물론 나야 상관없다만, 달리 이유라도 있느냐?”
“그게…….”
말을 하려던 연호정이 순간 흠칫 놀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으음.”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무림맹이 좋기는 좋습니다. 반가운 인연들이 자꾸 모여드네요.”
“음?”
잠시 후, 연위와 연지평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깃들었다.
“싸가지 거기 있느냐?”
당관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