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9화. 갈등의 씨앗 (5)
“오호.”
막원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저기가 무림맹인가.”
녹지 않은 눈이 가득 쌓인 대별산 안쪽.
엄청난 높이의 성문이 헤아릴 수 없는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무림맹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국(小國)을 연상케 할 정도로 대단했다.
“워…….”
진양은 넋을 잃고 무림맹을 바라보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무력과 세력을 갖고도 세상의 눈을 피해 음지를 전전했던 그였다. 무림맹 얘기는 많이 들어 봤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묵룡부와 함께 천하를 양분하는 백도 무림 연맹다웠다. 산자락에서 내려다보는 무림맹의 전경은 그야말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었다.
“무, 무림맹이 저렇게 대단했나?”
“끝을 모르는 천하에 산재한 백도 문파들의 총본부다. 저 정도는 당연하지.”
오랜만에 무림맹을 보는 연호정과 묵비, 강량의 얼굴에는 익숙한 반가움이 가득했다.
반면 패율의 얼굴에는 유독 아련함이 컸다. 연호정을 제외하면 정통 무림 문파 소속인 사람은 패율 하나밖에 없었다. 성격이야 원체 거칠지만, 두 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무림맹을 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패율을 힐끔거렸다.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당연하지.”
빠른 대답 후, 잠시 뜸을 들인 패율이 입맛을 쩍 다셨다.
“솔직히, 아직 좀 그렇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한테 눈총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뼈마디가 시큰시큰하네요.”
“너야 위치가 있으니 눈총 정도로 끝나겠지만, 나는 장문 사형한테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즉 돌아가시래도.”
“맞는다고 했지, 맞아 죽는다고는 안 했다.”
“그 연배에 두들겨 맞는 것 자체가 죽는 것만큼 독한 치욕 아닙니까?”
“그래서 안심이 안 된다.”
피식 웃은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 차가운 늦겨울의 공기 속,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봄의 생기가 조금씩 그 푸른 향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자, 갑시다.”
무림맹 남쪽 성문, 주작대문(朱雀大門)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앞, 무수히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선두에는 당금 무림맹의 봉공들과 장로들이 자리했고, 그 뒤에는 작전을 나가지 않은 내성 전투 부대가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길을 트고 있지만, 전투 부대 뒤로 무수히 많은 맹의 무사들이 주작대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음.”
승현진인이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전투 부대 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묵룡부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특명 전권 대사의 파견이었다. 심지어 그 파견인은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었고, 작은 주인의 정체는 당금 육가의 일익인 연가의 장남이었다.
이색적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기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무림맹 소속원 입장에선 나쁘게 보면 배신자의 귀환이요, 좋게 봐도 떨떠름할 수밖에 없는 인재가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무사들의 표정은 어떠한가?
“놀랍구려.”
승현진인의 말에 복호사태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네?”
“솔직히, 본맹의 무사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나 싶어 내심 조마조마했소. 상부에서 경거망동하지 말라 엄명을 내리긴 했지만, 군중 심리란 아주 무서운 것이니까.”
“그렇지요.”
“한데 저들의 얼굴을 보시오.”
봉공과 장로들이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중엔 이 환영식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질투와 분노, 배신감으로 얼룩진 얼굴은 냉엄하다는 말로도 설명키 어려운 독한 기색으로 역력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일 할이 채 되지 않았다. 거의 대다수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동경이 가득했다.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맹의 수뇌부를 자처하는 우리야말로 장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오.”
“장님이라…….”
“연 대수, 아니 연 소부주는 강호 출도 이후 무수히 많은 전공을 세웠소. 시시각각 명성을 올렸지만, 그 명성을 신경 써 본 적은 없었지. 그의 눈은 오직 하나의 목표로만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허허.”
“저들도 그것을 알아주는 모양이오. 천만다행이지.”
몇몇 봉공들과 장로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종남 장문인 순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음? 무슨 말씀이시오?”
“물론 저들이라고 연 소부주가 세운 공을 모를 리 없겠지요.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 알 겁니다. 하지만 그의 행보를 직접 보지 않는 이상, 그가 세운 위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체감할 수는 없습니다.”
“허어.”
“지금 저들의 눈은 강자에 대한 동경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순우가 미소를 지었다.
“이립(而立)이 되지 않은 나이에 무수한 전공과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 천재 후기지수가 비로소 성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요.”
“오호라.”
“다소 냉정한 발언이기는 하나, 저들이 보기에 연 소부주의 재능은 질투조차 나기 힘든 수준일 겁니다.”
“그렇구려. 순우 장문인의 말씀도 옳소이다.”
그때, 팽무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옳습니다만, 제 생각은 또 다릅니다.”
“팽가주?”
“연 소부주가 세운 공(功), 거친 강호를 헤쳐 나가며 쌓아 온 무(武).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지요. 하지만 저들이 연 소부주에게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진짜 이유라니요?”
“파격(破格)입니다.”
“파격……?”
팽무강이 머리를 긁적였다.
“호전적인 우리 팽가 사람들은 다른 문파처럼 예의범절에 엄격하지 않으니 당연히 품위도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저희를 다른 중소 문파의 문인들이 친근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공공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소탈한 팽가의 분위기야말로 민중에 가장 근접한 명문가의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여하간 저들이 연 소부주에게 열광하는 것은 곧 안주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안주하지 않았다?”
“백도 무림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흑도 무림으로 전향했겠습니까? 솔직히 연 소부주의 능력과 제갈군사의 정치력이라면, 적당히 조율만 했어도 묵룡부와의 관계를 지속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음.”
팽무강의 눈이 반짝였다.
“백도의 명문가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천하를 위해 흑도에 투신했지요. 그리고 대다수가 명문가 출신이 아닌 무사들의 눈에, 연 소부주의 선택과 행보는 다른 명문 출신 무사들과 전혀 달라 보였을 것입니다.”
화산파 장문인, 용선진인이 헛기침을 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발언이로군요.”
“저들이 명문가를 나쁘게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느 무림인들에게 명문이란 동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지요. 솔직히, 우리의 존재가 저들로 하여금 자괴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습니다.”
팽무강의 솔직한 말에 다른 봉공과 장로들도 헛기침을 했다.
“연 소부주는 달랐습니다. 명문가 출신임에도 으스대거나 자신의 명성에 기대어 잘난 척을 한 적이 없었지요. 반대로 성격은 백도의 모범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흑도처럼 거칠고, 때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과격하기도 했지요.”
“…….”
“그러나, 그런 연 소부주의 성격이 대중에게는 더 와닿았던 것입니다. 명문가답지 않은 언행과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자신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천하를 위해 흑도 전향이라는 파격까지 서슴지 않는다…….”
팽무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매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팽씨 문중의 주인인 저조차도 가끔 연 소부주를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하지요.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심이 꽤 섞인 발언이었다. 지나치게 연호정의 좋은 면만을 부각시키는 발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승현진인이나 순우 장문인보다 훨씬 더 대중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무사들이 연호정에게 열광하는 것이 그 부분이었다.
주변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것.
세상을 살다 보면 원치 않아도 주변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때에 따라 나쁘게도 작용하고, 좋게도 작용한다. 인간 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연호정은 그런 사회의 문제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대중에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연호정의 행보가 예상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온 것은 팽무강의 말마따나 그가 ‘명문가 사람’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 하지만 자신의 잘남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좋으시겠습니다, 연가주.”
제갈문호가 씨익 웃으며 연위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이렇게까지 세상의 인정을 받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 어떻습니까?”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놀리지 마시오, 군사.”
“하하하!”
“녀석의 선택이 어찌 되었든, 녀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당황했고 피해를 보았소. 무림맹의 봉공이기 이전에 아비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십시오. 연가주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투왕의 제자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아비라는 명목으로 다른 분들 대신 혼을 내야 하지 않겠소. 투왕의 제자라는 위치는 쉽게 건드릴 수 없으니.”
“하하하.”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표정,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 나오는 연위의 모습에 봉공과 장로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모두가 그런 심정은 아니었다. 몇몇 장문인들, 특히 남궁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진정들 합시다.”
남궁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아직까지는 불편한 동맹군의 후계자가 맹에 방문하는 것입니다. 인연이 있는 후기지수가 아니라 공무 때문에 온 대사(大使)이니, 조금 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후기지수라고 불릴 만한 위치가 아니다. 냉정한 의미로 후기지수는 맞지만, 그런 표현 자체가 성립되기 힘든 일대 종사의 귀환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가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 곧 저 오솔길로 접어들 것이니, 손님 맞을 준비를 하시지요.”
제각기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는 수뇌부들.
그리고 잠시 후.
어색하게 열병한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연호정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놈아.’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새 살이 또 빠졌구나.’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오는 연호정 일행.
그들이 주작대문 삼 장 거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쿵!
광룡부를 내려놓은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묵룡…….”
어색함 때문일까, 아니면 미처 해소하지 못한 긴장 때문일까.
잠시 입을 달싹인 연호정이 조금 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번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된 묵룡부의 소부주 연호정이라 합니다. 넘치는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공대사가 대표로 말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감사합니다.”
“자, 날도 추운데 이만 들어가십시다.”
“예.”
허리를 편 연호정이 주작대문을 넘어섰다.
“우아아아아!!”
순간 엄청난 함성이 외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연호정 일행은 물론 수뇌부들조차 얼떨떨한 얼굴로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무사들의 함성은 천지를 뒤집어 놓을 것처럼 우렁찼다. 연호정을 향한 무림맹 무사들의 동경이, 수뇌부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했던 것이다.
팽무강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구만.”
의정군 대수가 아닌 묵룡부 소부주로서의 입맹.
탕아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