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화. 갈등의 씨앗 (4)
푸스스스.
피 묻은 칼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추운 날씨, 사방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더운 피가 묻어 있는 칼이니 김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살인자의 칼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김이 아니라 유형화된 살기였다.
‘엄청나군.’
당관의 눈이 굳어졌다.
폭발적인 살기가 담긴 칼, 그 살기가 해소되며 올라오는 아지랑이는 마치 죽어서 귀신이 된 영혼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살기가 저렇게 유형화된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한 번은 봤다. 바로 연호정이었다.
물론 연호정의 살기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연호정의 살기는 허연 아지랑이를 넘어 시커먼 불꽃처럼 이글거릴 정도였다. 그만한 살기를 품고도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게 신기한 수준의 엄청난 농도였다.
저 여자의 살기는 연호정만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
‘살기가 훨씬 더 연마되어 있다.’
칼에 두른 살기를 의식적으로 연마했다. 저 정도 살기를 자유자재로 칼에 담아 휘두르려면 살인귀(殺人鬼) 수준의 살인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도 단순한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최소 조건이다. 그 외에도 많은 싸움을 거쳐 자신의 살기를 완성시켰을 것이다.
“호오.”
여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데도 묘하게 천진한 느낌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미소였다.
“이놈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구나. 전혀 달라, 기세가.”
“…….”
“실력이 가늠되질 않는데…… 엄청난데? 깊이가 보이질 않아.”
느닷없는 고수의 등장이다. 하물며 실력을 가늠할 수 없다면 긴장하는 것이 정상이다.
한데도 여인에게는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듯, 반짝이는 두 눈에 위험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당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적인가.’
종남 전쟁 이후로 섬서의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 그렇다 해도 이 숫자와 육체의 단련도를 보면 상당한 규모를 지녔을 것이다.
‘꽤 명성이 있는 세력인 듯한데, 묵룡부가 관리하지 않나?’
그때, 여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봐, 당신들 누구야? 이놈들과 한패인가?”
당관이 다시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눈빛, 긴장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눈이다.
잠재우지 못한 살기로 인해 흥분 가득했던 여인의 눈이 점점 굳어졌다.
스륵.
여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작 한 걸음이지만 거리가 삼 장은 벌어졌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움직임, 이 많은 산적을 홀로 죽인 실력이 보법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여인의 실력은 엄청났다.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은 것이 은거 고수라고 하지만, 저 연배에 벌써 무종을 넘어 완숙의 경지에 다다랐다.’
자신에 비하면 분명한 하수다. 그러나 여인의 나이를 생각하면 실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당관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대단한 고수로군.”
“…….”
“어디에서 사사했나.”
여유가 가득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강자의 여유였다. 여인의 살기가 대단하고 그 실력 역시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천의 제왕 당관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붙어 봐야 아는 게 싸움이라지만, 이미 격차가 확연하다. 당장 당관이 무의식적으로 내뿜는 존재감에 여인의 긴장은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당관에게 칼을 겨누며 거칠게 외치는 여인.
당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또한 당형의 피를 이은 진성 당가인이었다. 감히 당가의 가주에게 저따위 언사를 보이는 자를 앞에 두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당관이 입을 열었다.
“대화가 안 되는군.”
“누구냐고 물었다!”
의복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정체를 알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당가의 문양을 안다.
당관의 소매와 가슴에 새겨진 전갈과 뱀의 표식을 보고도 저리 말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버려 둬도 되려나.’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말투야 거슬리지만, 야밤에 느닷없이 나타난 고수를 호의적으로 보긴 힘들 것이다.
다만 당관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당가의 표식을 몰라보는 상황이 아니라, 저 여인의 칼에서 흘러나오는 과격한 살기였다.
‘위험한 살기다. 저 정도 연마된 살기를 뿜는다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선인(善人)이라고 보긴 힘들지. 그러나…….’
당관은 내심 떨떠름했다.
‘아무런 시비가 없는데도 손을 쓰긴 애매하고.’
일부러 손을 쓴다 한들, 저 독기 가득한 눈을 보면 순순히 대답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에게는 최고의 독종도 반 각 안에 입을 열게 할 만한 온갖 고문 수단이 있었다. 당장 떠오른 독과 암기 몇 개만 써도 기억에 없는 조상님 이름까지 토해 낼 것이다.
문제는 거기까지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인데.
‘일부러 알아낼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냥 둘 수도 없겠어. 일행에게 물어봐야겠군.’
당관이 뒷짐을 풀기로 마음먹을 때였다.
“그만.”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여인과 당윤이 흠칫했다.
“상대는 사천을 제패한 무림세가의 주인이시다. 칼을 거두어라.”
낭랑한 목소리였다.
젊고 기운찬 청년의 목소리. 별다른 위엄이랄 건 없지만, 듣는 이를 차분하게 만드는 목소리는 몹시 듣기가 좋았다.
스르릉!
재빨리 납도한 여인이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고개를 조아렸다.
순간 당윤은 깜짝 놀랐다.
‘언제?!’
돌벽 부근, 그림자가 깊게 진 곳에 상당이 큰 가마 하나가 있었다.
마차가 아닌 가마였다. 덩치가 크고 표정이 없는 사내 둘은 가마꾼인 모양이었다.
‘왜 발견하지 못했지?’
가마는 계속 그곳에 있었다. 다만 당윤이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제 나서는가.”
당관이 가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굉장하군. 나도 중간까지는 눈치를 채지 못했어. 고수라면 기척을 숨기는 것 정도야 쉽지만, 가마까지 안 보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덜컹!
가마의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었고, 손에는 섭선까지 들고 있었다.
당윤의 눈이 반짝였다.
‘미남이군.’
전형적인 문사풍 미청년이었다. 하얀 피부엔 잡티 하나 없었고, 오관이 뚜렷하여 어디 지방에 가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외모라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미남이라는 건 분명했다. 당장 입고 있는 옷과 분위기보다도 얼굴에 먼저 시선이 쏠릴 정도이니, 정말 대단한 외모라 할 수 있겠다.
미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제 사람이 눈이 어두워 대단한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평생 칼질만 하던 사람이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
“이 무례는 주인인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당관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어렸다.
차분하고도 여유로운 말투. 목소리에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살기 가득한 칼질을 해 대던 여인의 인상을 완전히 지워 버릴 정도로 모범적인 자태다. 숙인 고개와 그 아래로 언뜻 보이는 표정, 말투에 목소리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가만히 청년을 보던 당관이 툭 던지듯 물었다.
“진법인가.”
자세를 바로 한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보시다시피 연약한 몸이라, 거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진법이라도 배워 두어야 했지요.”
가마와 가마꾼들을 숨겼던 그 능력.
당관이 피식 웃었다.
“역시 세상은 넓구만.”
당가 사태에서 광혈교 놈들의 진법에 갇혀 보았고, 나중엔 귀문이 펼쳤던 진법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상대가 당가 역사상 최고수였기에 허무하게 돌파당했지, 당장 당관만 하더라도 귀문의 진법을 버티긴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진법과 친하지도 않았던 그였다.
그 이후 진법도 틈틈이 공부해 두었지만, 역시나 어렵고도 신묘한 공부였다. 무공으로는 끝을 보아도 진법으로는 태산의 중턱도 못 가 포기할 것만 같았다.
“상대는 내 정체를 아는데, 나는 상대를 모르는 건 좀 그렇구먼. 자네들은 누군가?”
청년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 소속을 밝히지는 못합니다. 다만, 제 별것 아닌 이름 석 자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사정이라…… 그래, 이름이 뭐지?”
“천효락(天曉樂)이라 합니다.”
이름 한번 독특하기 그지없다.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그러실 겁니다.”
묘한 대답이었다.
가만히 천효락을 보던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피 냄새가 짙었네. 살기도 대단했어. 무시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무시할 수가 없어 예까지 왔네.”
“그러셨군요.”
“한데 이거, 우연이 맞나?”
천효락이 미소를 지었다.
환한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대단한 우연입니다. 설마 백도 무림 연맹으로 가는 길에, 사천 당씨 문중의 주인을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요.”
“무림맹으로 가는 중이라?”
“그렇습니다.”
맹으로 향하는 두 일행. 그 길목에서의 만남.
“대단한 우연이군.”
“예, 대단한 우연입니다.”
물끄러미 천효락을 보던 당관이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위험천만한 칼잡이를 대동하고 가도 되겠나?”
“하하, 보시기에 좀 위험할 수는 있습니다만, 제 명령이라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은 안 하지. 자격이 되느냐가 문제지.”
“아, 하기야 당문의 주인이시니 무림맹에서의 발언권도 굉장하시겠군요.”
“굉장하다 할 것까진 아니지만, 떼를 쓰면 통하긴 하더군.”
“제 호위가 맹에 들어가선 안 될 인물입니까?”
“그건 모르겠네만, 들어가서 좋을 건 없어 뵈는데.”
천효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안전하게 무림맹까지 수행토록 하고, 맹 외에서 대기하도록 하면 되겠군요.”
부드러운 대처였다. 단 한 점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정체를 밝힐 수 없다고?”
“맹에 가면 밝혀지겠지요.”
“그렇구먼.”
“이왕지사 이리 뵌 것도 우연인데,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한술 더 뜬다.
그 자신도 알 것이다. 자신의 언행이 상대로 하여금 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당관더러 함께 가자고 제안까지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독과 암기의 조종인 당씨 문중의 주인에게.
당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는 길에 말동무가 생길 줄은 몰랐군. 다만 우리의 이동 속도는 꽤 빠른 편인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이 녀석들도 다리가 날랜 편이라 어떻게든 보조는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가마꾼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가마꾼들의 내공 역시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묘한 녀석이군.’
그리고 묘한 집단이었다.
‘어차피 무림맹으로 간다…….’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호의적으로 느끼기 힘든 미소였다.
“길 안내는 내가 하지.”
“영광입니다, 가주님.”
“가세.”
“예.”
그렇지 않아도 맑게 빛나던 천효락의 얼굴이 더더욱 환해졌다.
“저에게 대운이 있을 모양입니다. 사천 제일의 패자분까지 뵙게 된 걸 보면 말입니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대운이 될지 일생일대 흉사가 될지는 지켜봐야지. 내가 원체 재수 없기로 유명한 인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