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36화 (836/963)

836화. 갈등의 씨앗 (2)

연위가 말하는 ‘빛’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무극(無極).

필설로 형용할 수 없어 그저 무극이라 부르는, 그에 도달한 사람조차도 정의할 수 없는 무신(武神)의 경지.

“황궁으로 떠나기 전,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부터 제 눈에는 보였습니다. 대사님께서 얼마나 높은 곳에 도달하신 분인지.”

“…….”

“대사님께서는 필경 모든 무림인이 꿈에서라도 도달코자 하는 그 경지 앞에 이르셨을 겁니다. 지금도 제 눈에는 그것이 보입니다.”

“……연가주.”

“한데 어찌하여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신 겁니까?”

제갈문호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모용군 역시 공공대사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어째서 빛에 이르지 않았느냐고.

모용군 한 사람의 말이라면 모를까, 연위의 눈에도 그것이 보인다면 진정 공공대사의 깨달음이 극에 이르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대사님께서 그곳에 이르셨다면, 소림은 당금 무림의 절대자라는 성천에 두 분이나 이름을 올린 문파가 되었을 겁니다. 소림의 명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올랐을 것이고, 영향력 역시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해졌겠지요.”

지금도 백도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이었다. 물론 무당 역시 태산북두라 불리고는 있으나, 냉정하게 봤을 때 소림보다 조금은 아래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만약 공공대사마저 성천에 이름을 올렸다면 그 우열이 확실하게 갈렸을 터.

소림의 명성 역시 당대 제일을 넘어 고금 제일로 불리며 역사에 획을 그었을 것이다.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사님.”

의아함과 감탄을 품은 두 사람의 눈을 마주하며, 공공대사는 한숨을 쉬었다.

“자격 없는 이가 빛에 이르러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소? 빈승은 애써 떨쳐 냈던 번뇌를 다시 끄집어 올 만큼 어리석은 이가 아니외다.”

“대사님.”

“이 얘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합시다.”

공공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가주에 대한 건은 빈승 역시 어떻게든 무마해 볼 생각이오. 군사께서는 맹주 건은 물론 강서 연합에 대해 고민 좀 해 주셔야 할 듯싶소.”

“물론 그래야지요.”

공공대사가 반장을 올렸다.

“빈승은 이만 돌아가겠소.”

그렇게 공공대사가 집무실을 떠났다.

제갈문호가 연위에게 물었다.

“보이셨습니까?”

“그렇소.”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예전부터 보였지만, 굳이 여쭤보진 않았소.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터이니. 사적인 부분을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기도 하고.”

“허어.”

“다만 대사님의 말씀을 토대로 추측하건대, 불자로서의 자만을 경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소.”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림인이라면 그 성정이 선한 이들이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력의 발전이거늘, 대사님께서는 그것조차 포기할 수 있는 분이었군요.”

어떤 이유에서건 무공을 연성한 무인에게 무극의 경지는 최고의 유혹이자 이상향이다.

그 가능성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침식을 잊고 나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당장 소림 최강의 고수 무허대사도 그에 이르지 않았는가.

공공대사는 그 파멸적인 유혹 앞에서도 스스로를 지켰다. 이유는 그 자신만 알겠지만, 무인이라면 무엇을 지불해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무극의 경지이니 공공대사의 인내심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동의하오.”

“예?”

“나도 동의하오. 대사님께서 맹주위에 오르는 것 말이오.”

“…….”

“아닌 말로, 무력을 떠나 성품과 영향력만 따졌을 때 대사님만 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오.”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이오?”

“저는 대사님께서 맹주위에 오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연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군사께서…….”

“예, 대사님께 초대 맹주를 맡아 달라 했지요.”

“한데 어찌 반대라 하는 것이오?”

“대사님께서 저리 나오실 줄 알았거든요.”

“……?!”

연위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군사께서는 대사님이 맹주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맹주, 좋은 수장으로서는 대사님이나 승현진인만 한 분들을 찾아보기 어렵겠지요.”

“한데 어찌……?”

“전시(戰時)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대사님께서는 분명 좋은 맹주가 되시겠지만,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맹주감이라 할 순 없습니다. 삼교와의 전란이 해소된 연후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 바로 그때 맹주가 되신다면 저는 성심을 다해 모셨을 겁니다.”

“전시…….”

“지금 이 세상에는 인자하고 성품 좋은 맹주가 아닌, 결단력 있고 지혜로우며 매서운 위엄을 지닌 맹주가 필요합니다.”

“…….”

“적어도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제갈문호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피로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차라리 모용가주가 연맹의 시작 때부터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저는 진지하게 그를 맹주로 추대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용군의 욕망은 사람을 압도하는 수준을 넘어 기괴함이 느껴질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하지만 딱 그 부분만 벗겨 놓고 보면, 실상 모용군만 한 맹주감도 달리 없었다.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며 무공 역시 대단했고, 나아가 삼교를 향한 증오와 내 사람만큼은 확실하게 챙길 줄 아는 배포도 갖추었다.

출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배경도 가졌으니, 그야말로 전시의 맹주로는 제격이라 할 만했다.

“대사님은 조금 전 제 말로 큰 부담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속내를 떠나, 절대 맹주가 되지 않으려 하시겠지요.”

“……그럴 것 같소.”

“제가 대사님께 바라는 것은 새로이 추대된 맹주의 뒤를 받쳐 주는 든든한 조력가의 역할입니다. 백도의 태산북두를 다스리는 수장, 하물며 그 영향력과 인품이 뛰어난 이가 맹주의 정치적 배경이 되어 준다면 누가 있어 맹주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은…….”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군사께서는, 구시대의 인물이 아닌 새 시대의 인걸(人傑)이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순간 제갈문호는 깜짝 놀랐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현 무림맹의 봉공과 장로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분들이오. 물론 대사님께서 뒤를 봐주신다면야 더 좋겠지만, 굳이 그런 도움이 필요치 않은 분들이기도 하오.”

“……허어.”

“천하제일 소림 방장이 인정한 걸출한 인걸이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소이다.”

대단하다.

제갈문호는 연위의 날카로움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전에도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은 있었지만, 어떻게 봐도 연위는 머리를 쓰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저 통찰력 좋은 검도의 고수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모용군에 대한 분석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연위의 안목이 예전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사실 능력과 결단력만 따진다면 연가주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초대 맹주감 말입니다.”

연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금물이오.”

“하하,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지요.”

지닌 능력을 떠나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연가는 지금도 몇몇 봉공들의 견제를 받고 있다. 심지어 장남이 흑도로 전향하기까지 했다.

아비가 백도의 무림맹주, 아들이 흑도의 후계자.

이건 누구라도 인정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흑도 측에서야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백도 무림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전시에 어울리는 결단력 있는 인걸이라…… 지혜롭고 위엄이 있는 사람…….”

연위가 쓰게 웃었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구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세상일이라는 게 쉬운 게 하나도 없군요.”

* * *

배를 타고 호북 상부에 도착한 일행은 또 한 번 주루 한 곳을 잡고 쉬었다. 배가 워낙 빠르고 안정감이 있어 체력이 생생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쉬어 줘야 했다.

“주루에서 편히 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일부터는 전속력으로 하남을 넘어 무림맹으로 간다. 최단 거리로 갈 생각이니 노숙도 염두에 두어야 해.”

연호정의 말에 일행은 오늘 하루만큼은 끝내주게 쉬어야겠다는 의지를 공고히 했다.

각자가 숙소로 들어갈 때, 막원이 연호정의 곁으로 다가왔다.

“돈이 참 많군.”

“예?”

“여기 주루는 묵룡부 게 아니지 않나?”

“맞습니다.”

“이렇게 큰 주루를 통째로 빌리다니, 역시 사람은 잘나고 볼 일이야.”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 돈은 아니니까요.”

“하하.”

연호정이 굳이 주루를 통째로 빌린 것은 그의 정체 때문이었다.

흑백쌍룡부와 교룡쇄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 몸뚱이만 한 광룡부를 어깨에 걸치고 이동한 참이다. 벌써부터 호북에 묵룡부의 소부주가 왔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

백도 정파 측에서는 연호정을 너무나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맹부가 동맹을 맺은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패왕의 무력이 워낙 무시무시하기로 유명하니 시비를 걸려 해도 걸 수가 없고, 하물며 묵룡부의 소부주인 만큼 배경도 엄청나게 든든하다.

“저나 일행도 불편할 테고, 한자리에 모이면 사람들도 불편할 겁니다. 어쩔 수 없지요.”

“노숙하면 되지?”

“그 정도 불편함까지 감수하고 싶진 않군요. 남의 돈 펑펑 쓰는 재미도 쏠쏠하고.”

피식 웃은 막원이 턱으로 광룡부를 가리켰다.

“오면서 계속 봤는데, 그 도끼 정말 무지막지하군.”

연호정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좀 흉하긴 하지요?”

“흉하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품이 또 어디에 있다고?”

백병신군이라는 별호답게 온갖 병장기에 능한 막원은 병장기 자체를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도끼날이 저렇게 크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철의 재질과 탄성이 극한에 이른 광룡부가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 아우도 팔팔한 것 같은데 대무(對武)나 해 볼까?”

너무나도 유혹적인 말이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좋지요. 저도 한번 전력으로 싸워 보고 싶었습니다.”

“나이 많은 우형 관절 생각은 해 줘야 해.”

“승부에 나이가 어디 있고 관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말씀은 약해지고 나서 하십시오.”

“하하하!”

껄껄껄 웃음을 터트린 막원이 밖을 가리켰다.

“저 멀리 공터가 있더군. 저기서 한판 하지.”

“좋습니다.”

안타깝게도 슬슬 불이 붙은 두 사람의 호승심은 채워지지 못했다.

“개방에서 왔습니다.”

주루의 문을 두들기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개방의 거지였다.

“연호정 소부주님이시지요?”

“그렇소.”

거지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호북 흥산분타주입니다. 사천에서 온 서신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사천 말이오?”

“그렇습니다.”

“사천이라면 설마…….”

“받으시지요.”

서신을 받아 펼친 연호정이 순식간에 내용을 읽었다.

막원이 은근슬쩍 서신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누구한테서 온 건가?”

“오늘 저녁에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어른보다 늦었다고 또 이놈 저놈 욕할 게 눈에 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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