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화. 갈등의 씨앗 (1)
군사부로 돌아오던 제갈문호는 문득, 군사부 정문에 서 있는 네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대사님. 그리고…….”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가주님.”
나머지 둘은 감시 명목으로 따라붙은 화룡단의 무사들이었다.
공공대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용가주와의 대화는 잘 끝나셨소?”
“예, 그렇습니다.”
“뭐라고 하더이까?”
공공대사답지 않게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그렇게 세 사람이 제갈문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허어.”
공공대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서 연합이라…… 모용가주가?”
“예.”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안목 좋은 두 분께서 모용가주를 그리 보셨으니, 확실히 사람이 달라지긴 한 모양입니다.”
제갈문호가 물었다.
“연가주께서 보시기에는 어땠습니까?”
“속 깊은 얘기를 나누진 않았으니 그 사람의 진심을 알기가 힘드오. 그러나, 적어도 그이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소.”
“역시 그렇군요.”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사의 안목과 일 처리가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서 나와 같은 범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소.”
“과찬이십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이대로 그를 보내도 괜찮은 것이오?”
공공대사 역시 약간의 걱정과 궁금함을 담고 제갈문호를 보았다.
사실 모용군의 일방적인 출맹은 맹법(盟法)을 어기는 것이었다. 물론 봉공의 권한은 막강하고 유사시 상부의 허가 없이 출맹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비록 지난 과오를 인정하며 사람이 크게 바뀌었다지만, 아무도 모르게 강서에 본인의 힘을 모아 두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물론 문파나 세가별로 비밀 세력을 키우는 거야 조직 마음이다. 다른 조직에 허가를 받을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문제는 모용군이 모은 힘이 전국(全國)에 영향을 줄 정도로 상당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단일 세가의 조직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중소 문파와 상단, 표국이 집약된 힘이었다. 실질적인 무력은 무림맹이나 묵룡부에 비할 수조차 없겠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전력도 아닌 것이다.
무림맹, 그것도 봉공의 일원으로서 수뇌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연합을 결성한 것 자체가 문제다. 당연히 모용군을 붙잡아 두어야 했고, 답답할지언정 연위처럼 청문회를 열어야 마땅했다.
“상식적으로 그냥 보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렇소.”
“두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모용세가의 전력을 무림맹으로 보내 반쯤 인질에 가깝게 잡아 두었다 한들, 그냥 보내서는 안 되었지요.”
실제로 모용군이 배신하지 않으리란 걸 안다 해도 이래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절차의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제갈문호가 눈을 감았다.
웃으며 등을 돌리는 모용군의 얼굴을 떠올리니,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았다.
“우리가 붙잡았다 한들 모용가주는 결코 섭섭해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림맹이 그런 조직이라는 걸 그도 알 테고, 실제로 그것이 타당하니까요. 그래도 새벽을 틈타 몰래 떠나려 했던 것은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거기서 그를 붙잡는 것이, 이 바보 같은 군사 생각에는 썩 좋지 않을 듯했습니다.”
“무슨 말이오?”
다시 눈을 뜬 제갈문호.
그의 눈은 묘한 서글픔과 맑은 지혜로 빛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비유이지만, 불안하고 걱정된다 한들 부모가 자식의 출가를 아무 말 없이 지지해 줘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모용가주에게 있어 무림맹은 손에 넣고 싶은 일생의 꿈이자 집터였고, 동시에 부모였습니다.”
“부모라…….”
“예, 그렇습니다. 물론 저는 제 권한을 벗어나는 일을 했습니다. 무림맹이 모용세가를 인질로 잡아 둔다 한들, 그의 형제인 모용 대수를 우리가 확보하고 있다 한들 그가 가족마저 버리고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아 무림을 배신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테니까요.”
지나친 불신이다? 그렇지 않다.
모용군은 말했다. 모용세가의 가주 쟁탈전은 혈육을 상대로 칼을 꽂아 가면서 얻어 내야 하는 광기의 생사결이라고.
혈육까지 죽이면서 가주직을 얻어 낸 사람이니, 가문 전체를 배신하는 선택도 낮은 확률이나마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군사란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대우해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 군사만의 덕목은 아니겠지요. 대사님께서도, 연가주께서도 봉공이시니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해야 한다고 봅니다.”
“…….”
“말하자면, 저는 모용가주에게 특혜를 준 셈입니다. 독단적으로요.”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유연하지 못한 법은 반드시 파탄이 나게 되어 있소.”
“맞습니다. 그래도 모용가주의 출맹을 못 본 척한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니, 정말 모용가주가 배신을 한다면 저는 군사직을 내려놓고 평생 뇌옥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군사.”
“그래도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직감 때문에.”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욕먹을 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도 각오하고 있지요. 그러나 모용가주를 붙잡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느낀 건 진심입니다.”
공공대사는 제갈문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사실, 이곳에서 모용군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제갈문호가 아니라 공공대사였다.
무인에게는 말이 필요치 않은 법이다. 서로를 노리는 칼과 주먹만으로도, 그 강렬한 충돌만으로도 상대의 마음과 의도를 읽어 내야 진짜 무인이라 할 수 있는 법.
공공대사는 그 짧고 과격했던 승부에서 모용군의 근본적인 변화를 느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드럽고도 청아한 변화.
“냉정하게 판단해서.”
공공대사와 제갈문호가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용가주가 우리를 배신하고 강서 연합을 악용할 가능성은 아예 없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연가주께서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나는 모용가주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확신하는 것 두 가지가 있소.”
“무엇입니까?”
“무림맹을 향한 애정, 그리고 삼교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비무가 끝난 이후, 모용군이 공공대사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림맹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 한마디에서 모용군의 깊은 애정과 회한, 버렸음에도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미련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모용군은 무림맹이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우면 도왔지, 뒤통수 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진심만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었다.
‘그렇다면 삼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모용군의 발언들을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삼교를 향한 그의 증오는, 아마도 이 광활한 중원에서 최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위가 말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소. 그러나 사람 속을 모른다 한들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적어도 행동을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하시는 말씀이 마치 호정 같습니다.”
연위가 무안한 듯 웃었다.
“녀석 덕분에 세상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늘었소. 군사에 비하면야 공자 앞에서 문자 읊는 격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연가주께서는 모용가주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럴 수조차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게다가 그이는…….”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던 연위가 피식 웃었다.
“적어도 제 사람 챙기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한 위인이니까.”
적에게는 가차가 없지만, 내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은 절대 참지 않는다.
그런 면은 연호정과 무척이나 닮았다. 물론 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울타리 안의 사람을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그였다.
공공대사가 나직이 불호를 뱉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네 글자에 모용군에 대한 걱정과 격려가 담겨 있었다.
“사실, 제가 고민하는 것은 저의 처우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 역시 연가주처럼 모용가주가 결코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곧 사신도 보내야 하고요.”
“하면 무엇이 고민이시오?”
“가장 큰 고민은…….”
제갈문호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맹주(盟主)입니다.”
“……!”
공공대사와 연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맹주를 정파 무림 모든 이의 선거로 뽑는 것을 반대합니다.”
“어찌 그렇소?”
“이 넓은 땅덩어리의 모든 문파에 선거 표를 전달하는 데에만 최소 반년은 넘게 걸릴 겁니다. 거기까지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그 표의 진정성이 확실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성이라니?”
“표가 조작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본디 선거라는 것은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표가 나뉘는 법이다.
그러나 제갈문호는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제삼 세력의 개입이었다.
삼교의 세작들이 중원에서 증발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드러내지 않은 채 암약하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선거가 진행될 시 다시 세작을 파견할 위험도 충분하다.
즉, 제갈문호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맹주 선출을 선거로 한다는 말을 퍼트리진 않았습니다. 나아가, 실질적으로 개인의 표를 확실시하는 제도나 기구를 설치하지도 못했지요.”
“으음.”
“평화의 시기였다면 시간을 들여 차분히 진행했겠지만, 삼교가 준동한 이 상황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을 풀어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맹주 석을 공석으로 비워 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그건 그렇소.”
제갈문호가 공공대사를 보며 말했다.
“천만다행히도 전 무림이 인정하는 집단의 수장이 계십니다.”
“음?”
“봉공분들과도 상의를 해야 하고 강서 연합은 물론 여러 문파의 동의도 얻어야겠지만…… 그분이 나서 주신다면 무림맹이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군사?”
“지금은 전시입니다. 휴전에 가깝지만, 단순히 휴전 상태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형국이지요.”
“군사, 내 말을 들어 보오.”
“누구에게나 결단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솔직히, 모용가주의 말도 옳습니다. 지지부진한 회의 때문에 피해 본 문파가 그리 많은데 그러한 잘못을 또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세상에는 완벽한 정책도, 정치도 없습니다. 처한 상황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 강압적인 것이 좋을 때도 있고, 느슨한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효율만을 따져야 할 시기가 있고, 효율 이전에 모두가 손해를 봐서라도 안정을 추구해야 할 시기가 있는 법이지요.”
“…….”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이 전란이 끝날 때까지 초대 맹주로서 활동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공공대사가 연위를 보며 말했다.
“연가주께서도 말씀 좀 해 주시오. 이것이 얼마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대사님께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오.”
“왜 오르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어찌하여 빛에 이르지 않으셨습니까?”
“……!”
공공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