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4화. 삼세(三勢)의 주인 (9)
소외된 자들, 무시당하며 살아온 자들.
그런 자들의 힘에 편승했을 뿐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제국의 주인이 제후(諸侯)를 두는 이유를 아시오?”
“…….”
“혼자서는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오.”
모용군이 검지로 탁자를 두들겼다.
“무림맹도 마찬가지요. 백도 무림 연맹이라는 이 무림맹의 힘은 분명 천하 정점에 이르러 있지만, 과연 무림맹의 일 처리에 전혀 피해 보지 않는 정파의 무문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시오?”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를 거요. 워낙 바쁘신 분이니.”
비꼬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함이었다.
“군사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사람인 이상 한계가 있소. 그 한계를 보충하고자 봉공들을 모아 놓았으나, 그중 절반은 협의와 정의만 부르짖을 줄 아는 벽창호들이오. 행정과 통치에 대해서는 모르지.”
“모용가주.”
“나라고 잘 아는 건 아니오. 다만, 이번에 연가주의 청문회에 참여하고 깨달았소. 이중 절반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과한 언사입니다.”
“우리 둘밖에 없는데 눈치 볼 필요 있겠소? 듣는 군사만 참아 주면 되오.”
“…….”
“중요한 건, 맹의 수뇌부라는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탓에 일 처리가 느리고 분명하지 못하여 피해를 보는 문파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오.”
제갈문호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봉공들에 대해 가장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강하고 결단력 있는 무림맹주의 존재는,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원하는 바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봉공들을 하나씩 내 편으로 만들어 무림맹주가 되려 하였소.”
“……!”
“더하여 강서에 모인 그 약자들은 맹주 선거가 시작되면 날 지지할 수 있도록 모아 놓은 정치 자금이자 다수의 선거 표였소.”
“……그랬었군요.”
제갈문호는 새삼 모용군의 철두철미함에 놀랐다.
그리고 그 철두철미함보다,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게 선을 넘나드는 비도덕성과 꿈을 향한 맹목적인 야심에 소름이 돋았다.
“즉, 모용가주에게는 그 느리고 분명치 못한 봉공분들의 회의가 오히려 기회였군요.”
“그렇소.”
솔직한 인정이었다. 심지어 그는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몇 번이나 회의의 안건을 뒤로 늦추기도 했소. 중요한 사안이라고 꼬투리를 잡아 가면서 말이오.”
“……!”
“봉공들의 일 처리가 늦어질수록, 그 분위기를 알게 모르게 주도하는 사람이 내가 될수록, 그리고 나를 지지하는 소외된 이들이 많아질수록!”
“…….”
“나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가까워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소.”
제갈문호가 침을 삼켰다.
잔을 내려다보던 모용군이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역시 쓰구먼.”
“그렇다면…….”
“…….”
“무림맹주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떠나려 합니까? 강서에 모인 그 힘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왜? 내가 그 힘을 모아 무림맹을 칠까 두렵소?”
“…….”
“하하, 군사는 생각보다 알기 쉬운 사람이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우면 도왔지, 이곳을 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오.”
“그러니까 어찌……!”
“나는 무림맹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오.”
“……예?”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순간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비정하고 잔혹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사람임이 분명한데.
지금 모용군이 짓는 저 미소는 이상하게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의 무림맹이, 내가 맹주가 되었을 때 과연 얼마나 대단한 조직이 될 것 같소?”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소. 나도 별 이변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도 계속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난리를 쳤을지 모르겠소.”
“이변?”
“삼교.”
“……!”
“무림맹을 내 입맛대로 바꾸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일 년? 이 년?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적게 잡아도 십 년은 걸리겠지. 심지어 그 와중에 또 한 번 선거를 치러 연임(連任)까지 해야 하오.”
“…….”
“입맛대로 바꾼다 한들, 그런 나를 믿고 따라 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모용군의 변화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오직 스스로의 능력만을 보았던 모용군이, 비로소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사람을 보려 하고 있다.
나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내가 보는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 모용군은 자살을 떠올릴 만큼의 정신적 충격을 거듭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돌아보았고, 결국 ‘나’를 바꾸었다.
바뀐 ‘나’의 눈은 무공을 바꾸었고 보는 시선을 바꾸었다. 보는 ‘시선’이 바뀌자, 보이는 세상도 달라졌다.
그것이 지금의 모용군이었다.
그 똑똑한 머리와 통찰력으로도 무엇이 우선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달려 나갔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무엇이 우선인지를 알아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소. 개인적으로도 그랬고, 공적으로도 그랬지.”
“…….”
“이 무림맹에, 더 이상 나의 자리는 없소.”
“모용가주.”
“정치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아는 것은 술수였소. 상대를 찢고, 죽이고, 부러트리고, 망가트리는 것.”
“…….”
“모략가로서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 능력이었지만, 정작 진짜 정치는 모르고 있었소.”
“……진짜 정치 말입니까?”
“그렇소. 진짜 정치.”
“진짜 정치가 무엇입니까?”
“모르오.”
모용군이 껄껄껄 웃었다.
“정치를 모른다는 사람한테 진짜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다니, 군사께서도 얄궂은 면이 있소이다.”
“…….”
“다만, 정치의 기능 중 하나만큼은 알고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상생(相生)이오.”
제갈문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상생…….”
“나는 힘없는 문파와 연고 없는 상단, 표국들에 손을 뻗었소. 중앙으로 진출하고 싶어도 아무 연고가 없고, 업장이 그곳인지라 쉬이 떠날 수도 없는 그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소.”
“…….”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그들을 잘 대해 주었소. 언가의 후예가 왜 그들에게는 잘해 주고 무림맹에서는 이 모양이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소. 그들이야말로 나의 진짜 힘이었으니까.”
“…….”
“무림맹이 제 역할을 했다면 그런 이들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오.”
“……맞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이 아니었다면 불안함에 무너졌을 것이오.”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하찮게 봤던 약자들에게, 나는 도리어 힘을 받고 있었단 말이오.”
진리란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고 나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았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보지 않았다.
“어떨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들을 잘 통합하여 멋진 세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이미 세력은 꾸려졌잖습니까?”
“아, 이 말을 하지 않았구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그들, 무림맹과 묵룡부에 끼지 못한 중소 문파 연합의 우두머리로 가는 게 아니오.”
“예?!”
“그들을 하나로 묶으러 가는 것이오. 애초에 나는 연합의 맹주로 시작할 생각이 없소.”
“그, 그럼……?!”
“인정받을 것이오.”
“……!!”
“연합의 첫 주인을, 사려 깊고 강단 넘치며 지혜로운 젊은이로 세우고 싶소. 나와는 다른 세대의 현인(賢人)을 보며 배우고, 채워 주고 싶소.”
“모용가주…….”
“더 많은 걸 배우고, 더 많은 걸 깨닫고 싶소. 나의 무공 역시 세상을 깨달아야 상승한다는 것을 아니까.”
쪼르르.
잔을 채우는 술이 청아한 소리를 냈다.
“그들 약자들이 진정으로 나를 원하면, 나의 능력과 안목이 우두머리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해 주는 날이 오면.”
“…….”
“그때 나는, 기쁘게 새 조직의 수장이 되어 무림맹주 자리를 넘볼 것이오.”
제갈문호의 눈이 붉어졌다.
그렇게나 냉혹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사람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눈과 코가 시큰했다.
깨달음을 얻은 모용군은, 더 이상 탐욕에 젖어 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도덕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을, 사람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크나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깨달음 속에 녹아든 삶을 거머쥐었지만.
제아무리 번뇌를 쫓아냈다 한들, 일생의 꿈을 포기하는 이 순간에 어찌 마음이 좋을 수 있을까.
웃고는 있지만, 제갈문호는 알 수 있었다. 모용군의 속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모두에게 인정받은 연후에 무림맹주 자리를 넘보겠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이 반드시 오리란 보장은 없다. 내 힘으로 쟁취하는 자리가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용군은 인생을 불태울 목표라는 돛단배를 풍랑이 이는 바다에 띄워 보냈다.
회한에 젖어, 피눈물을 쏟아 내며 떠나보낸 것이다.
“그들이 익힌 무공은 진주언가의 비전들이오. 혹 다른 사이한 무공을 연성한 무리라고 착각하진 말아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이십 년 넘도록 무림맹주가 될 나를 위해 자금을 모았소. 그 돈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인즉,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이 아니니 그 또한 알아 주시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그리 알고 있지요.”
이 말로, 제갈문호는 그 세력이 명백한 무림맹의 하위 조직이라고 인정하는 모용군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위 조직이지만, 제후를 두는 제국의 주인처럼 그 지역은 중소 문파 연합이 잘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저 다른 길을 걷지 않는, 든든한 부하이자 맹우라는 것을 인정해 주라는 것이었다.
“맹 차원에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을 거요. 그게 더 확실하니까. 같은 길을 걷는다는 확실한 보증이 필요할 테니, 다리는 내가 놓겠소.”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모용세가는 여전히 무림맹을 도울 것이오. 또한 강서 연합으로 가는 사람은 오직 나와 언자방 뿐이니, 무림맹의 힘에 공백이 생기진 않을 것이오.”
나아가, 모용군 자신이 강서 연합을 이용해 함부로 나쁜 일을 획책할 수도 없다. 세가의 힘을 무림맹으로 집중시킨다는 것은 곧 모용세가 자체를 인질로 두겠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제갈문호는 모용군의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나아가 그의 각오도.
모용군이 양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꽤 늦어졌소이다. 아무도 모르게 떠나려 했는데, 그래도 군사와 이런저런 대화라도 나누니 속이 시원하구먼.”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저와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성을 빠져나가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그 진의를 의심했을 테니까요.”
“지금은 의심하지 않소?”
“한번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무림맹 차원에서 사신도 갈 거니까요.”
모용군이 코웃음을 쳤다.
“그 말랑말랑한 감성을 버리지 못하면, 언젠가 큰코다치게 될 거요.”
“그렇겠군요.”
“몰래 나가려고 했지만, 이왕 오셨으니 부탁 하나 합시다.”
“봉공분들께는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역시 똑똑하시오. 연가주처럼 가운데 앉혀 두고 이런저런 헛소리로 시간만 축내는 거, 나는 딱 질색이외다.”
“덕분에 욕은 제가 다 먹겠습니다.”
“욕먹는 거, 이제는 익숙하잖소?”
“하하.”
봇짐을 챙겨 든 모용군이 턱으로 술병을 가리켰다.
“남은 건 군사께서 다 드시오.”
“모용가주.”
“말씀하시오.”
“……곧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피식 웃은 모용군이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은 제갈문호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펑펑 쏟아지던 눈의 양이 조금은 줄어든 듯했다.
무림맹의 동쪽 성문, 청룡대문을 나선 모용군은 한참을 걷다가 작은 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봉우리 정상에 선 모용군이 무림맹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새벽, 눈 내리는 무림맹의 절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저토록 크고 멋들어진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장관이로고.”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저토록 멋들어진 세상의 주인이 된다면, 그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인생일까.”
그리고 그 책임감에 얼마나 피곤한 인생이 될까.
웃으며 무림맹을 내려다보던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잘 있어라.”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동생인 모용우에게 하는 말인지, 남은 모용세가의 무인들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무림맹 그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인지.
“부디, 이렇게 또 볼 수 있기를.”
주르륵.
모용군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가슴 답답한 회한, 사무치는 감정을 두고 무겁디무거운 발을 애써 내디딘다. 작은 봇짐 위, 한 자루 보검을 메고 길을 떠나는 모용군의 뒷모습은 모용세가의 주인답지 않게 무척이나 초라했다.
더 커지기 위해,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꿈을 접고 나아가는 거인의 발걸음.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