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화. 삼세(三勢)의 주인 (8)
이른 새벽.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대별산은 밤새 펑펑 내린 눈으로 어둠 속에서도 환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좋구나.”
바람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
창밖으로 눈을 보는 모용군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참으로 곱다. 추위만 덜하다면 이 멋진 광경을 더 편히 즐길 수 있을 텐데.”
한서불침의 경지에 달해 더위와 추위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온도를 타지 않는 것이지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즈넉하게 걷기 좋은 날씨로고.”
한참 동안 눈을 보던 모용군이 탁자 위에 양손을 올렸다.
“자, 그럼.”
그때였다.
“음?”
쏟아지는 눈을 헤치며 다가오는 한 사람의 기척을, 모용군은 읽을 수 있었다.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날카롭구먼.”
잠시 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시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제갈문호가 들어왔다.
모용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축시(丑時)가 다 지난 시간에 어인 일로 예까지 찾아오셨소?”
“날이 춥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어깨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던 제갈문호는 문득 방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짐을 보았다.
‘…….’
잠시 짐을 보던 제갈문호가 손을 매만지며 말했다.
“오는 길이 제법 추웠는데, 차 한잔 대접받을 수 있겠습니까?”
“차는 없고, 마시다 남은 술은 있소.”
“술도 좋지요.”
모용군이 술병 하나와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제갈문호의 눈이 커졌다.
“백주로군요.”
“그렇소.”
“싸구려 백주도 즐기셨습니까?”
“어떤 부자(父子) 때문에 한 번씩 마시곤 했소. 폐관 전에는 제법 들이켰는데, 나오고 나니 손이 잘 안 가더군.”
“그랬군요.”
“이거 말고 다른 술은 없으니 마시기 싫으면…….”
“아니, 괜찮습니다.”
“몸 따끈하게 만들어 주는 데는 이거만 한 게 없소.”
모용군이 제갈문호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지 않고 그대로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크!”
제갈문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거, 유독 독하군요.”
“날이 추워서 더 그럴 거요.”
“속이 따가울 정도입니다.”
“자주 마실 건 못 되더군.”
모용군이 다시 자신과 제갈문호의 잔을 채웠다.
등불을 하나만 켜 놓은 방 안은 꽤나 어두웠다. 그래도 탁자 옆에 놓아둔지라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폐관에서 나오기 사흘 전, 저를 찾아오셨지요.”
“그랬지.”
“말하자면 모두가 아는 출관 날짜가 아니라 그 사흘 전이 진짜 출관 날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맞습니까?”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폐관에 들었다 해도 사람이 오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요. 숲과 공터, 개인실이 많은 무림맹 내에서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
“또한, 폐관이라고 하여 굳이 벽곡단과 물로만 버틸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너무 구시대적이고, 요즘은 간편한 음식으로 영양을 섭취하고 체력도 비축하면서 합리적으로 수련하는 게 이득이라는 걸 모두가 압니다.”
“…….”
“음식을 누가 가져다주었습니까?”
“글쎄올시다. 기억이 나지 않는구려.”
“정신이 없으셨던 모양이군요. 사람이 오간 기억은 있습니까?”
“물론이오.”
“따님은 어디 있습니까?”
잔을 보던 모용군의 시선이 제갈문호에게로 옮겨 갔다.
음영 진 제갈문호의 얼굴은 박제된 짐승 거죽처럼 묘하게 생기가 없어 보였다.
“언가의 후예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
“가주께서 가장 가까이 두던 사람들이, 더 이상 주변에 보이지 않는군요.”
“…….”
“한데 그게 언제부터였을까요? 사흘 전? 아니면 한 달 전입니까? 그도 아니면 모용가주가 폐관에 들었을 때부터입니까?”
모용군은 말없이 제갈문호를 주시했다.
제갈문호의 눈이 점점 깊어졌다.
“무림맹 출입 기록을 보았습니다. 근 몇 달 동안 따님께서 맹에 온 기록이 없더군요. 아주 오래전에 출맹했던 기록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것도 기록해 두는구려.”
“물론입니다.”
“역시 꼼꼼하시오.”
“따님의 출맹 기록은 아주 오래전 한 건이 잡히는데, 언씨 성을 지닌 무소속 무인은 가주께서 폐관한 지 삼 주 뒤에 출맹한 기록이 있더이다.”
“…….”
“그 지옥 같은 시간이 삼 주였습니까? 아니면 몇 달이었습니까?”
“몇 달이오.”
“그렇다면…….”
“다만, 처음 그 삼 주의 기간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고 지옥 같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소.”
“…….”
“하루가 일 년 같았소. 군사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불안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살 시도까지 했을 정도였소.”
제갈문호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혼자서 어느 하나의 감정에 자꾸 매몰되다 보면, 평소에는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모용군이 홀로 잔을 비웠다.
“그때 깨달았지.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
“같은 하루라도 누구에게는 반나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일 년도, 십 년도 될 수 있소.”
왠지 모르게 지친 듯한 음성.
그때의 잔혹했던 성찰 기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떠올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극심했던 정신적 고통, 제갈문호는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삼 주 간의 성찰 이후에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무공 수련을 하셨습니까?”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취조라도 받는 것 같소이다.”
제갈문호가 품에서 잘 접힌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게 무엇이오?”
“읽어 보시지요.”
천천히 서신을 펼쳐 읽은 모용군이 이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막히는구려.”
“…….”
“후개요? 아니면 용두방주께서?”
“후개입니다.”
“정말이지 그 허술하고 어쭙잖은 정의감 때문에 앞으로 고생 좀 하겠다 싶었거늘, 용두방주의 사람 보는 안목이 이렇게나 뛰어날 줄 몰랐소. 벌써 여기에 다다랐단 말인가.”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솔직히 부인할 줄 알았다. 혹은 당황할 줄 알았다.
동시에, 예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폐관 이후의 모용군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인정할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모용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연호정 그 녀석이 묵룡부에 세작으로 파견되었던 작전을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모용가주께서도 그때 관리자로 호남에…….”
“…….”
“설마, 그때부터?”
“그 전부터였소. 그때 내려가서 작전조를 관리함과 동시에 상인들을 통해 정보를 받았소. 호남에서 귀주까지 여러 물자를 이송하고 있었거든. 귀주상회도 그중 하나였고.”
“……!!”
“그때 최초로 정보를 받았었소. 자금이 얼마나 모였는지 말이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그때는 몰랐지. 연호정 그놈이 묵룡부주를 끌고 와 내 뒤통수를 후려칠 줄은. 내 생애, 그런 무지막지한 계략은 처음 당해 보았소. 정말 목숨이 날아가는 줄 알았소이다.”
제갈문호는 심장이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제갈문호가 잔을 비웠다.
“가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음?”
“추위가 가시는군요. 땀이 날 정도입니다.”
“하하, 그렇소?”
모용군이 재차 제갈문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제갈문호가 병을 받아 모용군의 잔을 채웠다. 모용군은 웃으며 그 잔을 받았다.
“지금은 무너졌지만, 가주께서는 묵룡부주와도 손을 잡았었습니다.”
“알지만 애써 쉬쉬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지.”
제갈문호가 살짝 침을 삼켰다.
“도대체 어디까지 판을 벌일 생각이었습니까?”
“판을 벌이는 건 중요하지 않소. 벌인다 한들, 연호정 그놈에 비할까.”
모용군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불빛에서 조금 멀어진 모용군의 음영 가득한 얼굴은 반으로 쪼개진 가면처럼 보였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무림맹주였소.”
“…….”
“그 하나의 자리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었소. 타 세력을 끌어오는 건 물론, 사람들이 주시하지 않는 문파나 상단 등 여기저기 손을 뻗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니, 군사는 모를 거요. 내가 무슨 짓까지 저지를 뻔했는지.”
모용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나는……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삼교 놈들과 손을 잡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소.”
“……!!”
제갈문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잠깐이지만 그랬소. 생각해 보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 줄 알고 손을 잡겠소? 날 잡아먹으려 들지나 않으면 다행 아니오?”
“……모용가주.”
“놈들의 힘은 진짜요. 그 힘의 편린과 싸워 봤을 뿐이지만, 본체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 상상도 되지 않더군.”
“…….”
“그런 놈들을, 나는 나의 지략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줄 알았소.”
“…….”
“자기 과신이자 오만이었지.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외적 놈들이라고는 하나, 고수들이 그리 많은데 머리 쓰는 놈들이라고 적겠소?”
“……그렇겠지요.”
“그리고 다른 걸 떠나서.”
훅!
방 안의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졌다. 모용군이 뿜은 미세한 살기는 그 정도로 날카로웠다.
“오만불손한 침략자 놈들과 손을 잡는다는 행위 자체가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소. 차라리 무림맹주의 꿈을 포기하고 말지,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과 손을 잡아서야 쓰겠나.”
삼교를 향한 모용군의 증오는 이상하리만치 맹목적인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을 연호정만큼 잘 알지 못하면서도 연호정 이상으로 삼교를 증오하고 경멸했다.
그리고 제갈문호는 모용군의 저 증오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모용씨(慕容氏)의 역사, 그 핏줄에 절절히 박힌 피눈물 나는 과거지사 때문이리라.
달리 말하자면, 아주 잠시나마 그토록 경멸하는 외적과 손을 잡을까 고민했을 정도로 모용군에게 무림맹주라는 자리는 포기하기 힘든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힘을 모은 겁니까?”
“힘이야 젊은 시절 때부터 모으고 있었소. 내 꿈은 내가 가주가 된 순간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모용군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본가의 가주 쟁탈전은 다른 가문이나 문파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귀계와 모략이 판을 치고, 배신도 서슴없이 저지르오.”
“…….”
“심지어 그 상대가 타인이 아닌 핏줄이오. 내 핏줄들을 상대로 뒤통수를 치고 등에 칼을 박는단 말이오.”
“…….”
“당신들과 나는 다를 수밖에 없소. 그걸 가주가 된 이후에야 확실히 알았지.”
물끄러미 모용군을 보던 제갈문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무림맹주의 꿈을 포기했습니까?”
“사람은 짐승과 다르오. 일생의 꿈을 품었는데, 그것을 손에 넣기는커녕 태사의 한 번 만져 보지도 못하고 포기하다니? 그건 인생을 살 줄 모르는 놈들이나 하는 짓이오.”
제갈문호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럼 강서성의 그 집단은 무엇입니까?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키워 왔던 무력과 자금력을 총동원해서 무림맹과 대립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하하하하!”
모용군이 크게 웃었다.
“그게 정녕 나만의 힘이라고 생각하시오?”
“하면 무엇입니까?”
“내 인맥이 아니오. 내 힘이 아니오.”
“……?”
“소외되고 무시당하며 산 약자들의 힘이오. 나는 그저 거기에 편승했을 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