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32화 (832/963)

832화. 삼세(三勢)의 주인 (7)

“오늘은 더 안 가는 거요?”

“그래.”

“급하다면서?”

“빨리 가면 좋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어.”

“거참, 묘한 말이구만.”

눈살을 찌푸리는 진양에게 막원이 말했다.

“사람이 여유가 없으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법일세.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서둘러서야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아, 예.”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뭐, 우리로선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쉴 때는 푹 쉬어 주는 것도 괜찮아. 특히 아우는 지난 수십 일 동안 쉬어 본 적이 없으니까.”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냐, 이 곰탱아.”

진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막원의 말이라 뭐라 투덜대지는 못했다.

연호정이 저 멀리 보이는 강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배를 타고 올라갑시다. 부에서 미리 사람을 붙여 줬다고 하니 굳이 사람을 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하세나.”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강량이 지도를 펼쳤다.

“지도대로라면 십 리 거리에 묵룡부에서 관리하는 주루가 있습니다. 거기서 쉬시지요.”

“좋지.”

그렇게 일행은 순식간에 십 리를 주파하여 묵룡부 관리하에 운용되는 소박한 주루에 들어섰다.

루주와 점소이들이 단체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소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부에서 따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호정이 쓰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과한 예의는 지양하는 편이니 그리 예를 취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보통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아닙니다.’ 소리 한 번은 할 텐데, 루주와 점소이들은 곧바로 허리를 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빨라서 그러했다. 상대가 허례허식을 싫어한다는 걸 목소리만 듣고도 깨우친 것이다.

“거처는 다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으니, 마음에 드신 곳으로 가서 쉬시면 됩니다.”

“고생하셨소.”

“그리고 소부주님께 따로 서신이 왔습니다.”

“내게?”

“그렇습니다. 부주님 직통입니다.”

“이리 주시오.”

점소이 하나가 붉은 봉투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 읽은 연호정의 눈이 일순 굳어졌다.

이 층으로 올라가려던 묵비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왜요? 또 무슨 일이라도 터졌어요?”

“…….”

“연 공자?”

“……옥화산에 모이는 의문의 집단이라?”

묵비는 물론 일 층 탁자에 앉아 술부터 푸려던 진양과 강량도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꽤 긴 서신을 몇 번이고 읽은 연호정이 이내 서신을 접어 자신의 품에 넣었다.

“고맙소.”

“별말씀을요.”

“차 한 잔만 내주시겠소?”

“알겠습니다, 소부주님.”

강량과 진양 뒤편에 앉은 연호정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엄청 큰일이 터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그냥 넘길 만한 일도 아닌 듯했다.

연호정을 힐끔거리던 두 사람은 술이 나오자 곧바로 좋다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묵비 역시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물론 막원은 진즉 방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뭔가 이상하군.’

중원에서 활동할 만한 삼교 놈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물론 세상일이라는 게 단순히 정보력만 믿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개방과 묵룡부의 정보단이 같은 결과를 도출해 냈다면, 높은 확률로 그렇다고 봐야 했다.

실제로 지금 와서 삼교가 중원에 따로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만약 이놈들이 삼교라면, 이건 너무 허술한데.’

각종 상단과 표국을 이용해서 물자를 운반한다?

중원에 무림맹 하나만 있다면 모를까, 가까운 지역에 묵룡부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하물며 외적의 침공으로 분위기가 흉흉한 세상인 만큼 꼬리가 안 잡힐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의문의 고수들까지.’

그 무력이 거의 용아철기단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는 집단이라 했다.

고수의 수를 떠나 총체적인 무력의 평가가 그러하다면, 이는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 용아철기단의 힘은 대문파와 맞먹는다. 그런 고수들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물론 없지는 않아.’

구파일방이나 육대세가의 경우, 문파마다 비밀리에 기르는 정예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당장 연가만 해도 음지에서 철저히 수련하는 비천검사(飛天劍士)들이 수십 명 존재한다. 용아철기단에 맞먹을 정도는 아니어도, 하나하나가 검도에 조예가 깊은 절정고수들이었다. 소정광에게 전수한 비천혈응검이 바로 그들이 연성하는 무공이었다.

연가가 그러할진대 다른 가문들은 어떨 것인가. 수백 년간 정파 무림의 기둥으로 불리며 도(道)와 무(武)를 수련해 왔던 구대문파는 어떨 것인가.

‘종남처럼 예외의 경우도 존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남도 체제의 특성상 전대의 고수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뿐, 그들까지 합세한다면 그 전력은 굉장할 것이다.

문파마다 내부의 이해관계가 다 다른 법. 조직화된 고수를 기르는 곳도 있고, 자유분방하게 방목하는 곳도 있다.

중요한 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명성을 날리는 고수들이 있는가 하면, 모종의 조직에 속해 입신양명의 기회를 노린 채 피땀 흘려 수련하는 고수들도 많다.

‘하지만, 설령 소림이나 무당이라 해도 비밀리 보유한 전력이 용아철기단만큼 대단하긴 힘들 것이다.’

만약 그 세력이 삼교가 아니라면, 단일 세력의 비밀조직일 확률도 높지 않다는 것.

‘절강…… 강서라…… 위치도 좋군.’

특히 절강은 연가가 속한 강소성처럼 바다와 인접해 있어, 해외와의 무역이 활발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강소성보다 절강성이 훨씬 더 활발한 편이었다.

‘사실 고수의 숫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고수를 양성하는 건 어렵지만, 오래전부터 많은 투자를 감행했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정말로 주시해야 할 것은 바로 상단과 표국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단체라도 그 많은 상단과 표국을 한 번에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단일 세력의 영향력이라고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

중원 무림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문파 대다수가 북부에 몰려 있는 백도 무림맹, 반대로 남부에 몰려 있는 흑도 연맹 묵룡부.

물론 북부에도 흑도 사파가 있고, 남부에도 백도 정파가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천하에 명성을 날린 문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히 흑백으로 양분했을 때, 중원의 세력 집중도는 그러했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갈래는 어디인가.

‘절강과 강서, 복건 인근이다.’

정파보다 훨씬 더 잘 흩어지는 흑도의 특성상, 묵룡부가 가진 힘의 밀도 자체는 무림맹보다 떨어진다. 그래서 남부, 특히 남동부 지역은 무림 문파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다.

‘안목이 좋군.’

누가, 어떤 조직이 그곳에 힘을 모으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원 판세를 보는 눈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겠다. 당장 연호정조차 큰 그림을 보는데 능했지, 세밀한 구석까지 하나하나 머리에 담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고, 전국(全國)의 중요도에서 한 단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삼교일 확률도 배제하진 못한다. 워낙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만약 삼교가 아니라면?

‘삼교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지?’

그때, 점소이가 차를 내왔다.

“고맙소.”

“아닙니다.”

차 한 모금을 마시자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어디가 되었든 단일 집단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분명한데.’

신이 나서 술을 마시던 강량이 문득 뒤를 돌아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왜요? 또 고민거리가 있습니까?”

“어, 조금.”

“뭔데 그럽니까?”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강서성 인근에 모종의 집단이 모이고 있다더라. 확인된 고수의 수만 대문파급이고, 오가는 물자의 양도 엄청나다던데.”

“허어.”

강량이 혀를 내둘렀다.

“또 어떤 놈들인데요?”

“그걸 알면 고민 안 하지.”

진양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 그게 놀랄 일이라고.”

“음?”

연호정과 강량이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천하(天下)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중원 땅이 얼마나 넓은지는 아오. 우리같이 칼끝에서 사는 인생들이야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왔다 갔다 쏘다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사는 게 다반사요.”

강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에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수?”

“아는데 왜 놀라?”

“엥? 무슨 말이오?”

“그렇게 넓은 천하에 무림맹과 묵룡부, 두 집단만 크라는 법 있어? 수도 헤아리기 어려운 다른 무림인들은 뭐 야망이 없겠냐?”

“아니, 그게 아니고.”

“알아, 인마. 내 말은,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거다. 최고가 아니라면 적어도 전국에 영향력을 끼칠 만큼의 거물이 되고 싶은 사람도 많아. 물론 그 반대되는 인간도 많지.”

“얼씨구, 희대의 현자 나셨네. 그런 걸 형님이 어떻게 아오?”

“이런 걸로 현자 소리까지 들어야겠냐? 당장 내가 화웅문을 이끌고 있다는 거, 너희는 알았어?”

“……어?”

생각해 보니 그렇다.

화웅문의 전력은 고작 몇 년 된 문파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대문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당장 문주인 진양의 무력이 천하에 통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았던가.

더 놀라운 것은, 그만한 무력을 지닌 화웅문이 여기저기로 근거지를 옮기며 철저하게 숨어 다녔다는 것이다.

음모 속에 사는 무림인들이라면, 화웅문의 존재를 모 집단의 비밀 조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합리적이니까.

그러나 정작 화웅문은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흑도 문파로 성장했다. 저희끼리 칼싸움하면서 무(武)를 수련하는 걸 좋아했지만, 그걸로 명성을 얻으려는 의지는 요만큼도 없었다.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다. 상식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상식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많다. 야망을 품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도 있다.

“즉 세력의 크기 면에서는 놀라울 수 있어도, 그러한 행동 자체는 놀랄 만한 게 아니라는 거지. 별수 있나? 약하면 모여서 덩치라도 불려야지.”

연호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그런 통찰력이 있는 줄 몰랐다.”

“통찰력씩이나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수다.”

“한데 방금 뭐라고 했지?”

“음? 또 왜 그러는 거요? 뭘로 꼬투리 잡으려고?”

“꼬투리가 아니라…… 약하면 모여서 덩치라도 불려야 한다고 했나?”

“그랬소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 집단이 단일 세력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 한데 약하다니?”

진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당연한 거 아니오? 강하면 왜 모여? 그냥 잡아먹지? 약하니까 모이는 거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만, 이미 주변을 평정한 문파가 세력 확장을 시도하려는…….”

“주변을 평정하기 시작한 문파였다면, 그 문파가 대문파급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면, 그 살벌한 맹부(盟府) 정보망에 진즉 잡히지 않았겠소?”

“……!!”

“당황스럽네. 왜 이걸 놀라워하는 거야? 설마 내가 똑똑한 건가?”

똑똑한 게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아와서 그렇다.

진양은 화웅문의 전력을 키웠지만, 크기를 키우진 않았다. 소수 정예의 실력을 높여 생존력을 확보한 것이 전부란 말이다. 세력이 커지면 각지에서 견제가 들어올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변 세력을 잡아먹기 시작하면 결코 음지에서 살 수 없다. 이것이 진양과 소정광의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약하니까 모인다…… 약해서 모이는 거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중소 문파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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