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28화 (828/963)

828화. 삼세(三勢)의 주인 (3)

“후우.”

가볍게 내쉬는 한숨에 기다란 입김이 흘러나왔다.

“늦겨울 추위가 보통이 아니구려. 동장군께서 어지간히 성이 나신 모양이외다.”

평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공공대사의 자태는 몹시 고아했다.

이 맹렬한 추위에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바람은 많이 불지 않아서, 수염과 옷깃도 움직임이 그리 크지 않았다.

“겨울이 있어야 봄의 따스함에 더 감사할 줄 알게 되지요. 지금의 불행을 인내하지 못하면, 생명이 만개하는 봄의 따사로움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허허, 군사 말씀이 맞소.”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제법 잘 어울렸다.

한 명은 구파일방의 수좌이자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의 방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신산(神算)의 가문이라 불리는 제갈가의 주인이었다.

어울릴 수밖에 없는 조합이지만, 무림맹 내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미묘하기도 했다. 무림의 선후배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지만, 동시에 대립하는 순간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존중이 있음은 물론 서로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근래 몸이 많이 상하신 듯하오.”

공공대사의 말에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를 많이 쓰다 보니 몸 관리에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제갈가의 무공이 신묘한 것이, 그 와중에도 신공의 성취는 는 것 같소. 다만 몸에 피로가 가득하여, 되레 발전한 신공의 힘을 감당키 힘들어하는 듯하오.”

제갈문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까지 보이십니까?”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온화했다.

“흐트러진 균형에 원체 민감해서 그렇소. 대단한 재주는 아니오.”

“대단하기 이를 데 없는 재주지요. 역시 굉장한 안목이십니다.”

“내 조만간 숭산에서 나는 약초를 보내 드리리다. 군사의 신공은 목기(木氣)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잘 맞을 것이오.”

“하하.”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자칫 뇌물로 간주되면 대사님께서 피곤해지십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공공대사가 허허 웃었다.

“사람 몸 챙겨 주는 것까지 뇌물로 여겨질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서글프오.”

“대사님의 자비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감사한 진심, 잘 받겠습니다.”

“허허, 여하간 몸 관리에 신경을 썼으면 하오. 지금껏 무림맹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군사 덕분이오. 군사가 건강해야 무림맹도 건강해지지 않겠소.”

“과찬이십니다.”

“날이 추운데 이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제 몸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오히려 찬바람을 맞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입니다.”

공공대사가 못 말리겠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오늘은 어인 일로 이 땡중을 찾아오셨소?”

제갈문호가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곧 연호정 소부주가 맹을 방문할 것입니다.”

연호정 소부주.

회의장이 아닌데도 사적인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공무 때문에 왔다는 뜻이며, 공공대사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중재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정말 그 때문에 오셨다면, 헛걸음하신 것이나 다를 바가 없소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묵룡부의 소부주이고, 무림맹은 묵룡부와 동맹을 맺었소. 동맹 조직의 작은 주인을 핍박한다면 어찌 되겠소이까.”

“공식적으로는 그렇겠지요.”

“사사로이 그를 해하려는 자도 없을 거요. 소부주의 무공은 성천에 그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오. 누가 그에게 함부로 칼을 들이댈 수 있겠소이까?”

“칼을 뽑진 않더라도 압박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압박이라?”

“남궁가주와 뜻을 함께하는 몇몇 장문인들을 보셨잖습니까?”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이 또한 바른 것은 아닙니다. 숭산에 나는 약초를 사사로이 받아 챙기는 것이 뇌물이 될 수 있다면, 대사님을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못된 공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흐음.”

“이런 걸 보면 저에게도 선이라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있다면 제멋대로의 선을 그어 두고 사는 거겠지요.”

“유연하지 않은 법도는 언제나 세상을 망치게 마련이오.”

수염을 쓰다듬는 공공대사의 얼굴에 고민이 일었다.

“그간 남궁가주의 발언을 보면 다소 경직되고 사나운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그러한 의견 또한 필요하다고 보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그 또한 큰 문제외다.”

“하나 그 발언에 깃든 의도가 너무 명백하지 않습니까.”

“으음.”

“저쪽 인사들과의 건강한 논쟁이라면 저도 이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전에도 이런 문제로 대사님을 찾아온 적은 없지요.”

“그러셨지.”

“논쟁이나 압박을 가해서는 안 될 부분에서 치고 들어올 것을 알기에 부득불 예까지 온 것입니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논쟁을 해선 안 될 부분이다?”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군사가 남궁가주를 좋게 보지 않음을 알고 있소.”

제갈문호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누구라도 의심해야 하며, 어느 한쪽에 마음을 싣지 않아야 하는 것이 군사다. 하지만 군사도 사람인지라 정나미가 떨어지는 인간이 있고, 받은 것이 없이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남궁인은 제갈문호가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삼교의 실질적인 위협 속에서도 자기 잇속을 챙기려 드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경계하고, 어떤 사안이든 자신의 주도대로 흘러가길 원했다.

‘그 모용가주조차도 이러지 않았거늘.’

하물며 모용군도 남들이 혀를 내두를 만한 욕심의 소유자였지만, 삼교의 존재를 안 이후에는 그들부터 박살 내는 것이 먼저라고 외쳤을 정도다.

‘남궁가주도 많이 변했다.’

남궁인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멍청하면 가주가 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정치적 능력은 봉공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가 모든 일을 정치와 권력으로만 따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남궁가주는 자신의 재능을…….”

그때였다.

“거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소.”

공공대사가 손을 올리며 제갈문호의 말을 제지했다.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대사님.”

누구에게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는 그다. 그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흔들리거나 나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공공대사와 연위뿐이었다.

“남궁가주의 흠을 잡으려 해서가 아니오.”

“예?”

공공대사가 저 멀리 대문을 바라보았다.

“굳이 기척을 죽일 필요 없소이다. 들어오시오.”

끼이이익!

대문이 열리고 모용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문호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럴 수가.’

대문과의 거리가 꽤 된다지만, 그래 봤자 십여 장에 불과했다.

아무리 정신이 흔들렸다고는 해도 모용군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니?

‘강해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던가?!’

모용군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닌데, 대화에 방해가 될까 싶어 인기척을 줄였습니다. 불쾌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공공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모용가주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오시는 걸음 다 듣고 있었으니 불쾌하고 말 것도 없소이다.”

비꼬는 게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사실을 말함이었다.

모용군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대단한 것은 모용가주외다. 벼락처럼 강렬한 힘을 담고서도 그처럼 기척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가주의 무도(武道)가 내외합일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소?”

“잔재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모용군이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대사님은 물론 군사와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침 두 분이 함께 계시니 기척까지 줄이면서 왔습니다. 혹 폐가 되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안 그렇소, 군사?”

공공대사의 말에 제갈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

“멀리서부터 기척을 죽이고 오셨다면 제가 하는 말도 다 들으셨겠군요.”

모용군은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띄엄띄엄이지만, 들을 만한 건 다 들었소이다.”

제갈문호는 시원하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말이오? 남궁가주에 관해서 말이오?”

“연호정 소부주에 관해서.”

과연 모용군은 다 들은 게 분명했다.

“세상천지에 논쟁이 안 될 일은 없소이다.”

“역시 그렇습니까?”

“다만, 맹부가 동맹을 맺은 이 상황에 소부주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작게는 동맹 조직에 대한 폐가 될 것이고, 크게는 아군 간의 신뢰를 무너트리는 행위로서 훗날 외적과의 싸움에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오.”

제갈문호의 얼굴에 의외란 빛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모용군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군사답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떠한 권력욕 없이, 무림맹을 위해 움직이는 그 맹목적인 봉사 정신 말이오.”

칭찬인 듯하면서도 묘하게 칭찬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나 같았으면 논쟁이 벌어지도록 그냥 두었을 것이오. 그리고 남궁가주가 허점일 보일 때까지 기다린 후, 결정적인 순간 그를 정치적으로 매장시켰을 것이오.”

“……!”

“남궁가주가 이 봉공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혹은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리했을 것이오.”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공대사 역시 모용군의 말에 웃어 줄 수가 없었다.

모용군이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권력에 미친 나 같은 협잡꾼과는 다르시오. 제갈가주께서 군사직에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물끄러미 모용군을 보던 제갈문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소. 꼭 나눠야 할 대화가 있소.”

“하면…….”

“하지만 그 전에, 대사님께 먼저 볼일이 있소이다. 대사님과의 일이 끝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소?”

제갈문호가 멈칫했다.

폐관을 마치고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모용군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대답이 없었지만 기다릴 거라 믿는 듯, 모용군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대사님.”

“말씀하시오, 모용가주.”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올라가지 않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오?”

“빛을 보고, 빛까지 이어지는 길을 닦으셨음에도 어찌하여 그에 이르지 않으십니까?”

“……!”

공공대사가 흠칫 놀랐다.

제갈문호는 모용군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만히 공공대사를 보던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러셨군요. 천좌(天座)를 향해 손을 뻗을 역량이 되시는 분께서, 일부러 이 자리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모용가주.”

“이제 제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

공공대사와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쿠르릉!

하늘 저 어디선가, 기이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지이이이이잉.

모용군의 발등 위에서 몇 줄기 푸른 실선이 일렁였다. 그 푸른 선은 땅 이곳저곳을 번개처럼 누비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발산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지지직!

요대에서 꺼낸 보검 한 자루.

검갑을 잡은 그 손에 푸른 뇌기가 방전되기 시작했다.

“검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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