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화. 다시, 무림맹으로 (11)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군이 다시 잔을 비웠다.
“크, 이거 정말 독하군. 그래도 마시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 같소.”
몇 번 입맛을 다신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또 백주 한잔할 일 있으면 안주 좀 챙겨 주시오. 그럼 더 괜찮을 것 같소이다.”
“……왜 생각이 바뀌셨소?”
“음?”
“무림맹주가 꿈이었던 분께서 어찌 생각이 바뀌셨냔 말이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주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오. 아마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한, 죽을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지.”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의 무림맹이라면 맹주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셨소?”
“그렇소.”
“이상하구려. 무림맹이 어떤 상태이든, 모용가주가 꿈을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소. 오히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조직을 자신에 맞는 조직으로 만들겠다며, 두 주먹 움켜쥐고 나아갈 분이라고 보았소만.”
조직의 상태에 따라 수장직의 호오를 구분하는 행위.
어리석은 사람의 막연한 동경이었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모용군은 상당한 현실주의자였다. 날카로운 안목과 혜안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 못지않게 야심도 컸으며, 야심을 뒷받침할 만한 능력 역시도 탁월했다.
설령 무림맹이 산산이 분해되어 바닥을 전전하는 상태였더라도 직접 맹주가 되어 이 조직을 천하제일로 만들겠다며 분연히 일어설 만한 사람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맹주직을 포기하겠다니?
“오해하지 마시오. 앉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을 뿐, 맹주라는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다른 듯하지만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오. 지금의 무림맹이 그대의 눈에 어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맹주 선출이 코앞에 다가온 이때 의지를 불사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맹주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내가 맹주직에 나선다면, 이 많은 봉공분들께서 나를 지지해 주기나 하겠소?”
“…….”
“맹주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그것은 힘이나 지혜로 이룰 수 없는 영역이오.”
모용군이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가만히 그를 보던 연위가 자신의 잔을 비우고 말했다.
“힘이나 지혜로 이룰 수 없다?”
“이전과는 달라졌소이다.”
“……?”
“지금의 무림맹 말이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이전의 무림맹은, 속된 말로 악랄한 정치질과 뇌물 공작, 여론 조장 등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맹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문을 가지고 있었소.”
“…….”
“한데 지금은 어떻소? 이전의 무림맹과 지금의 무림맹이, 정말 같다고 보시오?”
“내 눈에는 똑같소.”
“똑같지만 다르오. 하지만 나와 시선이 다르다고 하여 그대를 욕하진 못하오. 내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이, 그대의 눈에는 같아 보일 수 있는 것이니까.”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나는 보고 있다는 의미의 말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다르다는 것, 즉 모용군이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연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연가주. 그대가 바라보는 곳에는 언제나 이상이 있었소.”
“…….”
“무지몽매한 염세주의자들은 그것을 손에 쥘 수 없는 허상을 추구하는 흔한 군상의 발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다르오. 나와 다른 길을 걷지만, 적어도 그대가 보는 이상이 무가치하다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소.”
“세상 어떤 사람의 이상도 무가치하지는 않소.”
“물론 그렇지. 가치는 있지. 타인의 가치와 다를 뿐.”
“나아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있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과 기대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참으로 묘한 미소였다.
“생각해 본 적 있소? 내가 왜 이리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목숨을 거는지.”
“…….”
“해 본 적 없으시겠지. 아니, 했지만 단편적인 선에서 끝났을 거요. 그저 권력욕에 눈에 돌아 버린 타락한 위정자라고 생각하셨을 테지.”
연위는 굳이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모용군이 연위의 잔을 채워 주며 말을 이었다.
“남들이 날 그리 보는 것을, 나는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소이다. 내 사람 챙기기도 어려운 세상에 남들 눈까지 신경 써야 쓰겠소?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정작 내가 나아가야 할 길에 걸림돌밖에 되지 않소이다.”
“…….”
“나는 지금껏 내가 선택한 길을 나아가는 데 있어 단 한 점의 머뭇거림도 없었소. 주변의 시선은 물론 도덕의 한계도 상관하지 않았지.”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모용군이 말하는 도덕의 한계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마 정치적 위상을 위해 벌인 여러 일 때문에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휘말려 죽은 사람도 많을 것이고, 가정이 파탄 난 이들 역시 많을 것이다.
한 사람의 꿈을 위해, 아무 연관도 없이 희생되어 버린 불쌍한 사람들.
그들은 결국 힘이 없는 민초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림맹주가 되어 백도 무림 연합을 천하제일의 세력으로 만들고 싶었소이다.”
“힘으로 강제되는 영역에서의 제일을 뜻하는 것이오?”
“물론 힘도 있어야겠지. 실질적인 무력은 물론 정보력, 자금력 등등 여러 분야에서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최고의 세력으로 만들고 싶었소.”
“그것은…….”
“오해하지 마시오. 무림맹이라는 단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니까. 많은 사람이 평가하는 것처럼, 이 사람은 권력 없는 삶을 살 바에야 차라리 목숨을 끊을 위인이오.”
“…….”
“다만.”
손에 쥔 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화등을 보는 모용군의 눈은, 연위가 기억하는 모용군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소. 이러한 목표를 세운 이유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를 위한 작업이 너무 느슨해져 버렸다는 것을.”
“…….”
“천하제일의 세력, 그 세력의 주인으로 중원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은 자. 그 권력으로 천하를 통치하고 싶어 하는 야심가.”
“…….”
“하나, 그 야심가에게 ‘다음’은 없었소.”
“다음이라니?”
“맹주가 된 다음, 천하제일이 된 다음.”
“……!”
“나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자리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무리하게 개혁을 시도하여 세상을 말아먹을 것인가?”
놀랍게도 그의 그러한 생각은, 연호정의 직언을 들은 양천의 고민과 무척이나 흡사한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천은 타인의 말을 듣기 전까지 자각하지 못했고, 모용군은 스스로의 고뇌를 통해 성찰했다는 점이다.
이 경우 누가 더 대단한지를 따져 보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결과였고, 모용군 역시 양천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면, 양천처럼 이전과 다른 행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끄러미 모용군을 바라보던 연위가 다시 한번 자신의 잔을 비웠다.
유독 쓴 한 잔이었다.
“이런 얘기를, 어찌 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오?”
“모르겠소.”
“……?”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 모르겠소. 왠지 그대를 만나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소이다. 어쩌면 연호정 그 녀석의 아비여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회의장에서 본 그대의 무력에 큰 충격을 받아 문득 생각났는지도 모르겠소.”
“…….”
“의도가 있어 온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의심을 거두라는 말까지 하고 싶진 않소이다.”
달라졌다.
연위는 생각했다. 모용군이 달라졌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투나 성격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모용군이었다. 모용군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두 눈에 가득하던 열정과 자신만만함도 여전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여유로움만큼은 분명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며, 그 여유를 안고 나타난 이유 역시 존재할 것이다.
“좀 늦긴 했소만, 축하드리오.”
“……?”
“호정 말이오. 성천에 이름을 올렸잖소.”
연위가 쓰게 웃었다.
“부모가 축하받을 일은 아니오. 그 녀석이 잘나서 그만한 명성을 얻은 것이지. 그리고 높은 명성이 꼭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림인에게 명성은 곧 목숨이오. 명성으로 죽고 사는 족속들이니까.”
모용군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연배에 성천에 이름을 올릴 줄은 몰랐소. 무극을 연 것만 해도 고금사에 다시 없을 일이거늘.”
“…….”
“솔직히, 잡다한 번뇌를 다 털어 냈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그 소식을 듣고 잠시지간 멍해지더군. 세상에, 나도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녀석은 나아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원 정점에 올라 버렸으니.”
연위를 사람으로서, 무림인으로서 인정하는 모용군.
연호정은 다르다. 그는 연호정을 무림인 이전에 경쟁자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경쟁자로.
한데 그 경쟁자가 전설로 추앙받을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렸으니, 성인군자가 아닌 바에야 씁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용군의 솔직담백한 모습을 보며, 연위가 말했다.
“내려놓는 게 어떻겠소?”
“음?”
“개인의 야망이야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니, 내게는 그대의 꿈이 옳다 그르다 평가할 만한 자격이 없소. 다만…….”
“야망을 접고 삼교를 물리치는 데에 뜻을 모으자.”
“…….”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잖소?”
“그렇소.”
모용군이 솔직함을 보여 주자, 연위 역시 솔직함을 보여 주었다. 언제나처럼.
“그대의 지략과 통찰력은 나 따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소. 그와 같은 능력을 천하를 위해 쓰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오.”
“아쉽다…….”
“중원 사람이라 하여 모두가 중원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소. 하지만 그대는 중원 명가의 주인으로서…….”
“틀렸소.”
“……무슨 말이오?”
번쩍!
모용군의 눈에 차가운 불꽃이 어렸다. 오늘 처음으로 보여 주는 날 선 눈빛이었다.
“중원 사람이면, 제멋대로 살지언정 외적 놈들의 침입 앞에서만큼은 목숨 걸고 싸워야지.”
“……!”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누구도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소. 목숨을 걸지 못한다면, 차라리 없어져 버리는 것이 낫소.”
다소 극단적인 발언이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방법이 다를 뿐 목숨을 걸고 있소.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
“이 발언 역시,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겠소.”
모용군이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연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자리, 즐거웠소. 더 있다가는 괜히 약점 잡힐 모습만 보여 주게 될 것 같군.”
“예전에는 보였소.”
“내 약점 말이오?”
“그렇소. 한데 지금은 잘 보이지 않소.”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다행이군. 약점 잡히는 건 질색인 인생인지라.”
몸을 돌린 모용군이 방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모용군이 말했다.
“내 자리는 언제나 내가 만들었소.”
“……?”
“당신은 어떻소?”
“…….”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그를 돌아본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지금의 무림맹에, 그대는 제법 잘 어울려 보이는구려.”
쿵.
모용군이 문을 닫고 나갔다.
홀로 남은 연위는 말없이 문을 보고 서 있었다.
바람 불지 않는 방 안, 화등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연가주.”
“오셨소?”
아침 일찍 찾아온 제갈문호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연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무슨 일이오?”
“묵룡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호정이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로서 무림맹에 온다고 합니다.”